[223화]
“아무리 그래도 너 역시 생각이란 게 있을 텐데. 설마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겠어?”
이번에는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소리를 듣고 반응했을 때면 이미 늦었다.
손으로 이한울의 안면을 붙잡은 시현의 검이 그의 목을 베었다.
[크아아악!]
이한울은 상처를 붙잡으며 울부짖었다.
‘생각보다 얕았어.’
싸움을 길게 끌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때문에 이번 공격으로 목을 베어 버릴 생각이었는데 검이 목뼈에 걸리고 말았다.
처형의 효과로 상처가 더욱 크게 벌어졌으나 역시 이한울의 숨통을 끊어 놓지는 못했다.
[왜냐…….]
두 손으로 목을 틀어막은 이한울이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시현을 노려봤다.
여전히 그 눈에는 지독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왜 너를 이기지 못하는 거지?]
“그야 수준 차이 때문이지.”
[설아의 복수를 위해 내 목숨을 던지고, 외신의 힘까지 빌렸는데. 네놈을 죽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도대체 왜…… 커헉!]
그는 한 움큼 피를 토했다.
심장을 뚫고 목까지 반 이상 베었다.
아무리 외신의 육체를 빌렸다 한들 버틸 수 있는 데미지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자기 재생 능력도 한계에 봉착한 것인지 더 이상 이한울이 입은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아마 반 정도 회복되어 있는 심장을 한 번 더 꿰뚫는다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
“노력은 너만 한 게 아니거든.”
가까이 다가간 시현은 그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검은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이한울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동공은 확대됐고, 목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두 손은 아래로 늘어졌다.
상처로부터 흘러나온 피로 인해 발아래에 웅덩이가 생겨날 정도였다.
[설아야…… 미안하다. 결국 내가 모자라서 네 복수를 하지 못했어…….]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동생의 이름을 찾았다.
하지만 동정심 같은 감정은 일체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죗값을 받는 것뿐이다.
오히려 오래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속이 후련할 정도였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시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져 있었다.
“좋아.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설아와 동일한 방법으로 보내 주마.”
시현은 이한울의 머리 위에 검을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리그었다.
외신의 육체를 빌리고 있기 때문에, 지독하리만치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몸이 좌우로 나뉘는 것을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설아에게도 이 짓을 했다고?]
“그랬지. 이설아는 머리에 검이 들어가는 순간 절명했지만.”
[으아아아아! 윤시혀어어어언!]
이한울은 절규하며 시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미 시현의 검은 그의 머리를 지나 가슴, 배로 향하는 중이었으니까.
“아마 너만큼 간절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인간은 세상을 다 뒤져봐도 없을 거다.”
결국 이한울의 몸이 완전히 반으로 갈라졌다.
어떻게든 상처를 회복하겠다는 듯 잘린 단면으로부터 자그마한 촉수들이 꾸물거리며 튀어나왔다.
그러나 생기가 없다.
빠르지도 않다.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었을 테지만, 지금의 이한울에게는 그 마지막 발악을 할 정도의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이한울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죽어서도…… 평생 네 뒤를 따라다니며 저주할 거다. 네놈이 죽어서 나와 같은 곳으로 올 때까지…….]
그의 마지막 유언은 끔찍한 저주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흥.”
시현은 차가운 콧방귀로 대응했다.
더 이상 이한울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지간히도 분했는지 두 눈을 부릅뜬 채였다.
“하아…… 드디어 하나.”
시현은 길게 한숨을 토했다.
심신이 고단했다.
생각 같아서는 푹 쉬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그럴만한 여유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자프는 외신과 싸우고 있을 테니까.
시현이 이한울과 싸우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이자프는 상당히 먼 곳까지 이동해 외신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더군다나 정훈이었을 때처럼 아르하의 권능을 사용할 수 없는 이자프는 시현처럼 다양한 권능을 이용해 아군을 지켜 줄 능력이 없다.
때문에 그는 전투의 여파로부터 구원자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악마들이 밀집해 있는 적진 한복판에서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육안으로 그의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자프라면 알아서 잘하겠지. 이전에도 외신을 상대로 꼬박 며칠을 버텨 냈으니까. 이한울에게 힘의 절반이나 덜어 준 외신을 상대한다면 더 길게도 버틸 수 있을 거야.’
이자프는 강하다.
아르하의 권능이 없더라도, 인간 시절 사용하던 장비가 없더라도 아르하와 비견될 정도의 강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버티는 거라면 모를까, 이자프에게는 외신의 숨통을 끊어낼 결정력이 없다.
그렇기에 시현은 지친 몸을 이끌고서라도 적진의 한복판으로 향해야 했다.
“어?”
돌연 다리에 힘이 풀렸다.
미약하기는 하지만 두통이 느껴지기도 했다.
“……참나, 그래도 꼴에 외신의 육체라 이건가?”
아무리 소프트웨어가 수준이하라고 하지만, 그래도 하드웨어의 성능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상대적으로 쉽게 승리를 거머쥐기는 했지만, 시현 역시 정신력의 소모를 피할 수는 없던 것이다.
이 상태로는 외신과 이자프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장소로 향하는 것조차 버거울 것이다.
달리 방법이 없기에 시현은 마지막 남은 황혼의 이슬을 사용했다.
언제 피로했냐는 듯 몸에 활기가 돌고 정신이 맑아졌다.
‘이번에 끝내야 해.’
보석 안쪽에서 아름답게 회오리치던 세 개의 물방울은 이제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남아 있는 거라고는 빛을 잃어 아름다움마저 상실해 버린 보석 뿐.
더 이상 목걸이에는 아무 가치도 없기에 시현은 그것의 줄을 끊어 던져 버렸다.
‘이제 반 밖에 안 남았잖아. 이한울보다야 벅차겠지만, 이자프와 협공한다면 충분히 끝낼 수 있어.’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진 채 시현은 이자프와 외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시현이 처음으로 목격한 것은 외신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이자프였다.
“……너 뭐 하냐?”
[하…… 요 며칠 너무 무리한 모양이야. 더 이상 손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 그래도 적절한 때에 와 줬군.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웃고 있는 이자프를 보고 있자니 기가 찼다.
생각보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이자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결국 외신과 1:1로 싸워야 한다는 소리인데, 외신의 육신을 빌린 이한울을 처치하는 것조차 제법 힘을 사용하지 않았던가.
본인의 힘을 다루는데 완숙의 경지에 이른 외신을 상대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1:1이라면…….’
[크아아앙!]
“이런 씨발!”
옆에서 들려오는 악마의 괴성에 시현은 황급히 몸을 던졌다.
배후에서부터 날아든 악마 한 마리가 시현의 머리를 물어뜯으려 한 것이다.
만약 조금만 늦었으면 제대로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외피에 지대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너 왜 전장을 여기로 한 거야.”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려 했는데, 아무래도 실수한 모양이군.]
시현의 바람과 달리 외신은 정정당당하게 1:1을 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휘하 악마들을 물릴 법도 한데 그런 건 일절 없었다.
어떻게든 아군이 전투의 여파에 희생되는 것을 막으려 하는 시현과 달리, 외신은 휘하의 악마들이 얼마나 죽어 나가던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그 멍청한 인간이 실패했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내게 손해만 있는 계약이었어. 한때 내게 패배를 경험하게 해 준 인간을 너무 경계한 나머지 악수를 뒀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군.]
지금의 상황이 꽤나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외신의 표정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곤 바로 옆에 있는 중형 악마의 머리통을 으스러뜨리는 등 괜한 화풀이를 했다.
[보아하니 조금 전 황혼의 이슬을 한 번 더 사용한 거 같은데. 이제 1회 남았나? 그렇다면 그것부터 먼저 사용하게 해 주지.]
“…….”
더 이상 황혼의 이슬을 사용할 수 없는 시현으로서는 외신의 오해가 그저 난감할 따름이었다.
[가서 물어뜯어라.]
외신의 명령이 있은 후.
모든 악마들이 일제히 시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심지어 구원자들을 상대하던 악마들까지 시현에게 이를 들이밀었다.
등 뒤에서 구원자들이 칼을 꽂던 뭘 하던,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처해 있건 말건 오로지 시현을 향해 내달릴 뿐이었다.
어차피 외신에게 있어 악마는 소모품일 뿐이다.
죽어 사라진다면 다시 만들어 내면 된다.
“하아…… 돌아버리겠네.”
가능하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정신력과 체력 모두를 외신과 싸우는데 사용하고 싶었다.
그러나 죽자고 달려드는 악마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달리 방법이 없어 검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였다.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이자프가 입을 열었다.
[30분.]
“뭐?”
[딱 30분 동안 시간을 벌어 주마. 그동안 네가 외신과 1:1을 할 수 있도록 무대를 마련해 주지.]
“무슨 수로?”
말은 고마웠지만 그리 신뢰가 가지는 않았다.
농담이 아니라 지금의 이자프는 옆에서 툭 치면 죽을 만큼 쇠약해진 상태였으니까.
그런 주제에 눈빛만큼은 살아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어쩌겠어. 도박이라도 해야지.]
“뭔가 비책이라도 있어?”
[있지. 조금 시간을 벌어 줬으면 한다. 그동안 무대를 만들어 보겠다.]
이자프는 땅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곤 지그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는데 청각이 몹시 뛰어난 시현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뭘 하나 싶어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돌연 시현을 향해 달려들던 악마들이 방향을 바꿨다.
노리는 대상은 이자프다.
“……뭔지 몰라도 지금 네가 하려는 짓이 저놈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네.”
시현은 검으로 달려드는 악마들을 쳐냈다.
악마들은 제 목숨조차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악마들의 목숨을 건 돌격은 시현에 의해 전부 차단되었다.
결국 이자프는 원하는 것을 완성했다.
콰아아아!
조금 전까지 다 죽어가던 남자와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자프에게서 어마어마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발밑에서 시작된 검은 기류가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갔다.
그것에 닿은 악마는 그대로 검은 잿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검은 기운은 넓게 퍼지며 시현과 외신을 집어삼키는 반구체의 공간을 만들어 냈다.
점점 주변이 어둠에 잠식되는 것을 지켜보던 외신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멍청한 짓을 하는군.]
그 말을 끝으로 검은 공간이 완성되었다.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어 빛 한 점 들지 않는 공간이건만, 이상하게도 상대방의 모습을 육안으로 똑똑히 식별할 수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시현으로서는 영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분명 이자프는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소진한 상태였다.
그런 자가 어떻게 이 정도 규모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놀랍게도 시현의 고민에 답을 해 준 것은 함께 검은 공간에 갇히게 된 외신이었다.
[놈이 뭘 한 건지 궁금한 눈치군.]
“…….”
[그 멍청한 선택을 비웃어 줄 겸, 네게 말해 주마.]
놈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듯한 미소가 시현의 속을 긁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시현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놈은 자신의 생명과 영혼을 불태워 힘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 출력이라면 기껏해야 30분 남짓이겠군.]
“그렇다는 건…….”
시현의 동공이 격하게 떨렸다.
이제야 이자프가 말한 도박의 30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 네놈은 이자프와 계약해 힘을 얻었지.]
외신의 미소가 더욱 환해졌다.
귀에 걸릴 정도로 찢어진 입이 기괴함을 더해 주었다.
어두운 공간 가득 놈의 괴상망측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즉, 앞으로 30분 후면, 네놈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잃게 된다는 소리다. 나는 그 때까지 시간만 끌면 되고. 궁지에 몰린 나머지 자충수를 두었구나.]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