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시현은 시체의 언덕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뜬 눈으로 죽어 있는 구원자들, 참가자들의 시체가 마치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너 때문이야.’
‘네가 이길 수 있다고 우리를 유혹했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왜 우리가 죽어야 해?’
이제는 환청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실제 누가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듯한 생생한 음성에 시현은 귀를 틀어막았다.
그럼에도 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제야 네 주재를 파악했나?]
처음으로 환청이 아닌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얼굴 가득 피칠을 하고 있는 외신이 보였다.
황급히 권능을 사용하려 했으나, 손에 든 검에 권능이 모여들지 않았다.
‘……왜지?’
당황하는 시현의 앞에 무언가가 던져졌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고 나서야 시현은 권능이 사용되지 않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바닥을 굴러 시현의 발 앞에 도달한 것은 이자프의 잘려 나간 머리였다.
[선물이 별로인가? 그렇다면 다른 것도 던져 주지.]
한가득 으스댄 외신이 추가로 던진 것은 심장이 뻥 뚫린 아르하의 시신이었다.
시현이 구원자로 있을 수 있게 해 준 아르하와 이자프.
그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시현이 모든 권능을 잃게 되었다는 뜻이다.
말인즉, 지금의 시현은 구원자가 아니라 아무런 힘도 행사할 수 없는 생존자라는 것이었다.
7레벨 구원자의 힘을 가지고 있을 때도 한참 위에 있는 상대였는데, 그 힘마저 잃은 지금 외신의 상대가 될 턱이 없다.
온 몸에서 힘이 쫙 빠졌다.그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시시하군. 네게 가장 큰 절망을 심어 주기 위해 이런 무대를 준비했건만……. 이 정도라면 괜한 수고를 한 셈인가.]
조롱하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시선을 거둔 외신은 근처에 버려져 있던 주인 없는 검 하나를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시현의 발 앞에 던졌다.
[마지막 자비다. 최소한의 고통으로 죽을 기회를 주마.]
즉,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소리다.
자신의 앞에 던져진 검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현이 그것을 손에 들었다.
그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야, 이 버러지 새끼야.”
[…….]
설마 그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걸까.
외신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표정만 구겼다.
잠시 감았다가 뜬 외신의 눈동자는 살인귀의 것처럼 살벌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정녕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건가?]
듣고만 있어도 심장이 철렁일 정도로 공포를 유발시키는 눈빛과 음성이었으나, 시현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해 보던가, 거지 같은 놈아.”
언제 두려움에 떨었냐는 듯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표정엔 짜증이 가득했다.
“정신 공격이라 해서 원작에서도 자주 써 먹던 공포나 환각, 환청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 정도 규모의 환상을 보여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네.”
[그렇게 믿고 싶은 건가? 어리석구나……. 이 모든 게 네놈이 의식을 잃은 사이 일어난 현실이거늘.]
외신은 파리를 쫓듯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에 실선이 생겨나며 시현의 뺨에 긴 상처를 만들어 냈다.
뺨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진짜이며, 벌어진 상처에서 흐르는 피도 진짜였다.
짙은 피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외신은 조소했다.
[그 고통도 거짓이라 부정할 건가?]
“완전 속아 넘어갈 뻔했어. 꺾이기 직전이었다고. 만약 네놈이 마지막 자비를 베풀겠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헛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넘어갔을 거다. 대단한 새끼야.”
모든 오감이 지금의 상황이 현실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정신 공격을 당해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전쟁이 모두 끝나 있는 상황이라고. 이상한 부분은 없다고.
그래서 믿었다.
하지만 외신이 던진 자비라는 한 마디가 시현을 일깨운 것이다.
“너 이한울 그 새끼랑 섞여 있잖아. 나에 대한 원한이 절정을 찌르고 있을 그 놈의 의식이 남아 있을 텐데 내게 자비를 베푼다고? 웃기고 있네. 제 동생을 죽인 내게 가장 끔찍한 죽음을 선사하고자 벼르고 있을 놈인데?”
검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더한 시현은 걸음을 뗐다.
그러곤 외신의 앞까지 한달음에 달려 나갔다.
그 순간까지도 외신은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시현에게 확신을 더해 줬다.
“난 자살 같은 거 안 해. 불만이면 죽여 보던가.”
시현의 도발에 외신은 입술을 비틀었다.
[그렇군. 왜 그 인간 놈이 너를 그토록 증오하는지 알 것 같다.]
외신은 손을 들어 시현의 목을 졸랐다.
고통이 덮쳐오는 가운데에도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현은 외신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다.
어떠한 권능도, 축복도 담겨 있지 않은 발버둥에 가까운 일격이건만.
검은 마치 두부를 가르듯 외신의 몸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파직.
머리 위에서 무언가 유리 같은 것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올려다 본 하늘에는 커다란 균열이 생겨 있었다.
* * *
“…….”
시현은 눈을 떴다.
의식과 함께 멀어지던 전장의 소음이 하나 둘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구원자들의 함성 소리, 악마들의 울부짖는 소리.
그리고 번개가 내리꽂히는 소리.
시현은 아직 잘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그의 발이 피의 사슬을 박차며 몸이 앞으로 나아갔다.
꽈르릉!
시현이 서 있던 자리에 번개가 내리꽂혔다.
[깨어났나?]
고개를 돌려보니 무심한 얼굴의 이자프가 보인다.
그를 보고 있자니 외신이 보여준 환상 속 잘려 나간 머리가 떠올랐다.
“내가 얼마나 정신을 놓고 있었지?”
[약 2초. 생각보다 짧았군. 최소 10초 정도는 보호하고 있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신력 하나만큼은 굉장하군.]
이자프가 시현의 의지에 순수한 감탄을 보냈다.
그러나 그 이자프가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는 것보다, 고작 2초 정도밖에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체감상 족히 한 시간 정도는 정신을 놓고 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이 역시 외신의 능력일 터.
실로 두려운 권능이 아닐 수 없었다.
“진짜 재수 없는 놈이네.”
시현은 고개를 들어 멀리 보이는 외신에게 시선을 줬다.
환상 속의 외신은 시현에게 무심한 듯 행동했으나, 지금의 외신은 격한 분노와 증오의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환상 속에서와 달리 그의 얼굴에서 확실히 이한울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래도 저걸 보니 환상에서 제대로 깨어났다는 실감이 드네. 내가 저놈을 보고 반갑다 느끼게 될 줄이야.”
[한 번 이겨냈다고 방심하지 마라. 빈틈을 보이는 순간 놈의 정신 공격이 다시 파고들 거다. 그 때도 환상에서 쉽게 깨어날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어.]
“상관없어. 아니, 오히려 그래 주면 고맙지.”
외신의 정신 공격은 강력하다.
하지만 세상에 대가 없는 능력은 없는 법이다.
강력한 만큼 소모도 극심할 터.
애초에 장기전으로 끌고 갈 생각이기에 외신이 아무 효과도 보지 못한 채 대량으로 힘을 소모해 준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 시현의 속내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외신은 더 이상 정신 공격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음은 무슨 수를 사용할 거지? 불? 번개? 촉수? 아니면 다른 권능을 사용하려나?’
어떤 공격이 오더라도 회피할 수 있도록 시현은 극도로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외신이 사용한 수는 시현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온다!]
이자프가 다급히 소리쳤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저 멀리에서 거리를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부어 대던 외신이 삽시간에 시현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놈의 손에는 검은 뇌격을 휘감고 있는 핏빛의 검이 들려 있었다.
근접전을 극도로 꺼려하던 외신이 설마 먼저 거리를 좁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에 방어가 조금 늦어지고 말았다.
콰앙!
가까스로 검을 들어 막기는 했으나 자세가 좋지 않았다.
“젠장!”
시현은 버티지 못하고 사슬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환상을 깨뜨린 건 칭찬해 줄만 하다만, 생각이 짧군. 내가 거리를 내주지 않은 게 근접전에 취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나?]
외신은 떨어지는 시현을 향해 날아들며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어딜!]
이자프가 그런 외신의 뒤를 노리고 달려들었으나, 외신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그를 견제했다.
무려 외신의 등 뒤에서 본인과 완전히 동일하게 생긴 분신체가 솟아난 것이다.
본체와 분리된 분신체가 이자프를 공격하는 사이, 본체는 검으로 시현을 내리쳤다.
시현은 다시 한 번 검을 들어 놈의 공격을 막았다.
콰앙!
“커헉!”
위에서 아래로 내리 찍히는 강한 힘에 시현의 신체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지상에 내리꽂혔다.
상당한 충격이 육신을 덮쳤다.
외피가 없다면 가벼운 부상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유, 윤시현?”
“죽은 건 아니겠지?”
하필이면 추락한 장소가 아군의 진영이던 모양이다.
그를 발견한 구원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가까이 오지 마!”
시현은 발악하듯 소리쳤다.
이에 시현에게 다가가던 구원자들이 흠칫 놀라 발을 멈췄다.
잠깐의 당혹감 후 그들의 표정에 드러나는 감정은 불쾌함이었다.
“뭐야. 기껏 도와주려 했더니…….”
“우리 도움은 받기도 싫다 이건가?”
그들은 시현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투덜거렸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도 시현의 불량한 태도에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시현을 비난하기 위해 토해낸 말이 자신의 유언이 될 거라고는.
콰앙!
시현을 뒤쫓던 외신이 지면에 내리꽂혔다.
그 기세는 마치 유성과도 같았다.
대지가 갈라지고 파편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새빨간 핏물과 뼛조각, 살덩어리들도 함께.
[벌레들이 많군. 짓밟으면 톡톡 터지는 재미가 있겠어.]
눈동자를 붉게 물들인 외신에겐 지독한 광기가 함께하고 있었다.
그제야 시현의 외침이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구원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그나마 다행인 건 외신의 시선이 그들을 쫓지 않았다는 것이다.
붉은 두 눈동자는 오로지 시현에게만 못 박혀 있었다.
근접전에도 강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외신은 눈으로 쫓는 것조차 버거운 속도로 검을 휘둘러 댔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적색의 파동이 광범위하게 쏟아졌다.
엄청난 속도를 가진 주제에 위력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공격을 막을 때마다 팔이 떨렸다.
“이대로는 못 버티겠는데…….”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공격을 막기보다는 피하는 편이 압도적으로 체력 소모가 적다.
그러나 시현이 공격을 회피하면 그의 뒤쪽에 포진해 있는 아군이 추풍낙엽으로 쓸려 나갈 것이다.
악마와 교전하느라 위험지역에서 마음대로 퇴각하지도 못하는 그들에게 피해가 생기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시현은 악과 깡으로 공격을 막아 내며 기회를 노렸다.
‘……그러고 보니 눈이 보이지 않아.’
원거리에서 공격을 퍼부을 때는 머리 위에서 존재감을 뽐내던 공간을 왜곡시키는 눈이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해제한 건가? 소모가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공간 계열 능력이니 계속 유지하는 것도 부담됐을 거야. 하지만 미끼일 가능성도 있어.’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으니 답답함이 배가 되었다.
이러는 사이에도 피로는 차곡차곡 누적되고 있었다.
결단을 내릴 때라고 판단한 시현은 포탈을 사용했다.
그 순간.
외신은 활짝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말과 함께 놈은 검을 들고 있는 오른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펄럭이는 소매가 걷어 올라가고 그 안에 숨어 있던 검은색의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의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빛났다.
포탈의 목적지는 외신의 등 뒤.
그러나 외신은 공간을 왜곡시켜 목적지를 자신의 코앞으로 변경했다.
그러곤 검을 내리친다.
까앙!
[……?]
기대하던 살과 뼈를 가르는 소리가 아닌, 금속을 때리는 불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한 외신의 눈에 비친 것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시현이 아니라 맥없이 땅에 처박혀 있는 흑색의 검이었다.
“그럴 줄 알았지.”
포탈에 자신의 검만 집어넣어 외신을 기만한 시현은 폭발적으로 땅을 박차며 거리를 좁혔다.
휘둘러진 백색의 검이 외신의 목에 닿았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