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신이라 불리는 자들 중에는 유별나게 강한 개체가 존재한다.
아르하.
다른 신들을 통솔하는 입장에 있는 그녀는 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휘하의 신들이 갖는 권능을 모두 사용할 수 있다.
신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외신과 1:1로 맞설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외신은 어떨까.
사실 어째서 원작의 주인공이 정훈이었는지, 그것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인류가 악마라 부르는 생물들은 대한민국 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등장했다.
바다 건너 대륙에서도 다양한 인종들이 생존을 위해 악마와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죽고 죽이는 지옥과도 같은 나날이 지금 이 순간에도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원작에서 다루고 있는 배경은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세계지도를 놓고 보면 단번에 발견하기도 쉽지 않은 작은 땅덩어리에서 이루어진다.
그 이유는 외신들 중에서도 유독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권능을 사용할 줄 아는 존재가 대한민국 땅에 봉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를 쓰러뜨려야만 기나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아르하는 대한민국 땅에서 활동하는 구원자 중 가장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정훈에게 자신의 권능을 건네준 것이다.
정훈은 아르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다시 말해 지금 시현의 눈앞에 있는 존재는 다른 외신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며, 다양한 권능을 사용할 줄 아는 괴물들의 왕이라는 소리다.
[조심해라.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외신들 전부와 싸운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상처를 감싼 이자프가 나지막이 경고를 해 왔다.
“딱히 말해 주지 않아도 알아.”
시현은 흘러내리는 한 줄기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문자 그대로.
눈앞에는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정면을 보면 하늘과 땅을 잇는 불기둥이 바람을 만나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는 얼마 전 시현이 필사적으로 쓰러뜨리는데 성공한 외신의 권능이다.
왼쪽을 보면 대형 악마도 부러워할 덩치를 가진 거대한 촉수가 지상을 뚫고 올라와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런 게 휘둘러진다면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대지는 삽시간에 황량한 폐허로 변할 것이다.
이는 인천의 검은 수해에서 쓰러뜨린 외신의 권능이다.
오른쪽을 보면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모여 있고, 대지엔 반복해서 번개가 내리꽂히고 있다.
아마 등장하지 않은 외신의 권능일 것이다.
지금 보여 준 세 가지의 권능 외에도 최소 스무 종류 이상의 권능을 가지고 있을 터.
당연히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넌 대체 저런 걸 어떻게 이긴 거야?”
[솔직히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군.]
전력을 드러낸 외신과 마주한 이자프도 퍽 당황한 듯 보였다.
[만약 개미가 너를 공격한다고 가정해 보자. 기분이 어떨 것 같나?]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질의응답인가 싶지만, 보아하니 외신이 지금 당장 공격을 퍼부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엄청난 힘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는 외신을 공격하러 들어갈 엄두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시현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이자프의 질문에 대답했다.
“우습지.”
개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조차 손가락 하나로 간단하게 짓눌러 버릴 수 있는 자그마한 생명체다.
아무리 집게를 들이민다 한들 따끔할 뿐이지 그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못한다.
[그 개미가 무리를 짓고 있다면? 수십…… 아니, 수백 마리 정도.]
아무리 모여 봤자 개미는 종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수백이 뭐란 말인가.
수천 마리가 모여든다 한들 손짓 한 번, 발 구르기 한 번에 싹 다 죽어 나갈 것이다.
“그래봤자 개미는 개미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시현은 이자프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아차렸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개미를 대할 때의 태도와 놈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가 몹시 흡사하다. 놈은 인간 따위가 아무리 모여 봤자 자신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다시 말해 방심하고 있었지.]
하지만 아니었다.
신들로부터 싸울 수 있는 힘을 부여받은 인류는 악마를 쓰러뜨리며 점차 강해졌다.
그들 중 유난히 재능 있는 자들은 종의 한계를 뛰어넘어 외신에게도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다.
외신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쩌면 알고 있음에도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려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결과 외신은 패배했다.
인간이 개미에게 물려 죽는 것만큼 경이로운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놈은 한 번 인류에게 패했다. 인류가 가진 가능성을 인정했고, 그 결과 방심하지 않고 전력을 토해 내고 있는 거지…… 바로 지금처럼.]
이자프가 시현을 살짝 밀었다.
시현은 당황하지 않고 그의 힘을 이용해 옆에 있는 사슬로 옮겨 탔다.
꽈르르릉!
한 줄기 뇌전이 시현이 있던 장소에 내리꽂혔다.
흑색의 강력한 전류는 사슬을 타고 지상으로 흡수됐다.
졸지에 피뢰침 역할을 하게 된 사슬은 단 한 번을 버텨내지 못하고 새까맣게 타 재가 되어 버렸다.
[조심해라. 외피건 뭐건 일격이면 가루가 될 거다.]
“그래 보이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시현은 정면을 노려봤다.
외신 역시 시현을 바라보고 있기에 허공에서 시선이 교차했다.
외신은 슬그머니 손짓하고, 그것이 공격의 방아쇠가 되었다.
외신의 주변에 가득하던 힘의 회오리가 사라졌음을 인지한 시현은 땅을 박찼다.
꽈르릉!
시현이 서 있던 자리에 다시 한 번 번개가 내리꽂혔다.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쳤다.
더 이상 강소하의 사슬에 의지할 수 없기에 시현은 본인이 직접 사슬을 이용해 이동 경로를 만들어 냈다.
그런 시현을 향해 소용돌이치는 화염이 날아들었다.
막 일방통행으로 막아 내려는 찰나.
[너무 앞만 보고 달리는 거 아닌가?]
이자프가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엄청난 기세로 나아간 흑색의 검기가 화염의 폭풍을 도중에 흩어 버렸다.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만.”
[당연히 그래야지. 그 정도도 못한다면 통한의 눈물을 쏟았을 거다.]
“그래도 서포팅은 잘하네. 네가 저 정도 공격도 차단하지 못한다면 땅을 치며 통곡했을 거다.”
[그거 참 다행이군.]
이자프는 웃으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시현의 머리 위로 엄청난 규모의 그림자가 생겼다.
경이로운 크기의 촉수가 시현을 짓뭉개기 위해 휘둘러지고 있었다.
이자프는 다시 한 번 검기를 이용해 촉수를 공격했다.
촤악!
촉수는 너무도 쉽게 반으로 쪼개지고 말았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잘려 나간 촉수의 윗부분이 하필이면 구원자들이 밀집해 있는 장소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잘려진 촉수는 삽시간에 재생하고, 원래 목표인 시현을 향해 휘둘러졌다.
[이런…….]
찰나의 순간 이자프는 고민했다.
시현을 도와야 하는지, 아니면 아무런 저항도 못 해 보고 짓눌려 압사당할 구원자들을 살려야 하는지.
그런 이자프의 등을 걷어차는 이는 시현이었다.
“뭐 해! 가서 구해!”
거칠게 쏘아붙인 시현은 흑색의 검에 정신력을 불어넣었다.
그러곤 타이밍을 맞춰 검을 휘둘렀다.
적색의 불꽃을 품은 검이 촉수와 충돌했다.
두 손으로 강하게 말아 쥔 검 손잡이를 통해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견고하게 만들어진 검이 부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강한 충격에 욕이 절로 나왔다.
“이런 미친.”
손목과 팔의 관절이 삐걱거릴 정도였다.
가까스로 촉수를 쳐내는데 성공했으나, 시현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사슬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허공에 내동댕이쳐졌음에도 시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시현은 피를 이용해 로프와 갈고리를 만들어 냈다.
힘차게 던진 갈고리는 정확하게 피의 사슬에 걸렸고, 시현의 추락은 멈췄다.
시현과 공방을 주고받은 촉수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화염에 휩싸인 촉수는 괴로운 듯 춤을 춰 대고 있었다.
잘려 나간 부위는 이자프에 의해 정리되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선물을 주마.]
이자프는 지상을 향해 추락하는 촉수에 발길질을 했고, 촉수는 한참을 날아가 악마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떨어졌다.
한 순간에 대량의 악마들이 엄청난 촉수의 질량에 짓눌려 목숨을 잃었다.
아군의 무사를 확인한 시현은 로프를 당겨 사슬 위로 올라갔다.
“이런…….”
정면을 확인한 시현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가까스로 위기에서 모면한 시현을 향해 다음 공격이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숨 쉴 틈도 안 주네.”
정면을 향해 쭉 뻗은 피의 사슬.
그것을 휘감으며 화염의 뱀이 달려오고 있었다.
시현은 자신의 발 앞에 있는 사슬을 끊어 버렸고, 잘려 나간 사슬은 화염의 뱀과 함께 저 아래로 떨어졌다.
지상에서는 아군이 악마들을 계속해서 죽이고 있기에 새로운 사슬을 만들어 낼 피가 모자란다거나 하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시현은 외신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그 위를 전력으로 달렸다.
문제를 해결한 이자프도 옆으로 날아왔다.
[버거워 보이는데.]
“아니, 가까이 붙는 것부터가 문제인데. 이거 맞아?”
[도발이라도 해 보지 그래? 너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으니 아마 넘어오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야. 혹시 몰라 말해 두지만 공간 계열 권능은 자재해라. 그에 대한 대책은 충분히 해 두고 있을 거다.]
“알고 있어. 원작에서도 마지막 전쟁과 관련된 부분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거든. 그 공간 계열 구원자처럼 허무하게 죽을 생각은 없다.”
거리가 문제라면 공간을 뛰어넘으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놈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검은색의 눈 때문이었다.
검은 눈은 공간을 도약하는 대상의 좌표를 강제적으로 일그러뜨리는 효과를 가진 권능이다.
아마 공간 계열 권능을 사용하는 순간, 시현은 화염의 소용돌이, 혹은 검은 번개가 떨어지는 위치로 강제 이동될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직접 발로 뛰어 거리를 좁히는 수밖에 없었다.
[아.]
“무슨 일이지?”
[조심해라. 정신 공격이 올 거다.]
“……제길.”
이자프의 경고가 있고 나서야 시현은 외신의 음흉한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계속해서 공격을 쏟아내는 한편, 놈은 저 높은 하늘 위에, 그리고 무너진 건물 잔해가 가득한 대지 위에.
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내 능력은 정신 계열 쪽에 취약해서. 알아서 잘 버텨라. 마음 단단히 먹고.]
이자프의 충고는 시현에게 닿지 못했다.
이미 그의 정신은 나락 속으로 빨려 들어간 후였다.
* * *
“…….”
얼굴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비의 감촉에 시현은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붉게 물든 하늘이 보였다.
쏟아지는 비 역시 붉은색이었다.
몸을 일으키기 위해 땅을 짚었다.
찰박.
차가운 감촉에 확인을 해 보니 손목까지 핏물에 잠겨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빗소리 뿐.
주위를 둘러보면 어둠 탓에 제대로 형상을 확인할 수 없는 언덕만이 보였다.
손전등도, 충전된 스마트 폰도 없는 상황.
시현은 검에 빛을 담아 주변을 비췄다.
“…….”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정면에 보이는 언덕.
그것은 사람의 시체를 쌓아 만든 언덕이었다.
그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몇몇 보였다.
다 같이 Re write의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시현의 제안에 냉큼 그의 손을 잡던 젊은 여성 참가자.
얼마 전 태어난 아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고 다짐하던 중년의 남성 구원자.
권능을 잃어 도움은 될 수 없지만 멀리서나마 응원하겠다고 웃으며 말하던 어린 소년.
그들의 살아생전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시현은 빛을 뿜어 내는 검을 옆으로 돌렸다.
처음 발견한 것보다 작은 언덕.
그것 역시 사람의 시체를 쌓아 만든 언덕이었으며, 조금 전보다 더욱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한기훈, 강소하, 김영운, 쌍둥이, 이나연.
그리고 한소현, 민서라, 진우혁까지.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서로 의지하고 힘이 되어 주던 사람들이 처참한 몰골로 죽어 있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설마 내가 정신 계열 공격을 받고, 정신을 잃고 있는 사이에 이렇게 되어 버린 건가?’
검을 잡고 있는 손이 격하게 떨렸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