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황혼의 이슬은 체력, 정신력뿐만 아니라 육체에 가해지는 모든 피로를 날려 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 덕에 밤을 꼬박 새워 악마와 싸우던 구원자들도 아무런 부담 없이 전쟁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블랙마켓을 확인해 볼 걸 그랬네.”
다소 비싼 값을 치르기는 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이제 10억 남짓하게 남은 잔고를 보면 가슴이 아프지만, 끊임없이 밀려오는 악마들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구원자들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후련하기는 했다.
“조금 있으면 목적지에요.”
시현의 옆에 자리한 민서라가 중얼거렸다.
저 멀리 붉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붉은 하늘에 생겨난 구멍이 아직 수복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인 즉, 지금 이 순간에도 이자프는 외신을 상대로 철저하게 항쟁하며 시간을 벌고 있다는 뜻이 된다.
‘아무리 정훈이 한 번 외신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고는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너무 달라. 아르하와의 계약이 끝났기에 사용할 수 있는 권능도 한 가지뿐이고, 장비도 없고 동료도 없어.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 만약 이자프가 외신에게 당하기라도 한다면…….’
끔찍한 생각을 한 시현은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만큼 처음 마주친 외신은 엄청난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붉은 하늘을 향해 가까이 향할수록 들리지 않던 전투의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땅이 울리고 대기가 떨렸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선두에서 달리던 구원자들의 속도가 조금은 느려진 것 같았다.
아무리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사선을 넘어왔다고 하지만.
상대는 모든 악마를 통솔하며, 그 강함 때문에 외신이라 불리기까지 하는 존재다.
두렵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멈춰 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든 꾸역꾸역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멀리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이자프와 외신의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 밑에는 수많은 촉수 괴물들과 악마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이자프를 공격하기 위해 온갖 아우성을 쳐 대던 놈들은 지근거리에 도달한 구원자들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크아아아아!]
거대한 덩치를 가진 악마가 포효를 내질렀다.
그것을 시작으로 촉수 괴물과 악마들이 서로 뒤엉킨 채 구원자들을 향해 달려왔다.
“망할…… 더럽게 많네.”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구원자들은 극도로 불안해했다.
적의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갑작스러운 외신의 난입에 도망칠 때보다 족히 수십, 수백 배는 더 많아진 듯 했다.
아군이 겁을 집어먹은 게 눈에 보였다.
이대로는 분명 탈영병이 발생할 것이다.
“음…… 분위기를 고조시킬 연설이라도 하는 게 어때요?”
주변을 잠식한 분위기가 굉장히 어둡고 불안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민서라가 슬그머니 시현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가능하다면 좋기는 하겠지만, 애초에 그런 건 잘 못해서요. 괜히 사기를 떨어뜨리지나 않을까 걱정이네요.”
“그래도 지휘관은 시현 씨잖아요.”
“그렇죠. 전 지휘관이죠.”
길게 숨을 몰아쉰 시현이 무전기를 잡았다.
전원을 넣기는 했지만, 무엇을 하면 좋을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떤 말이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을지.
어떻게 하면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와중에도 악마들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이 없기에 시현은 나오는 대로 입을 열었다.
“뭐…… 더럽게 많기는 하네. 여러분들이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지금 제정신이에요?”
사기를 끌어올리기는커녕 실시간으로 나락까지 처박고 있는 시현의 대사에 민서라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현도 뱉어 놓고 후회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기왕 이렇게 된 거 끝을 봐야지.
“다 같이 살아남자, 누구 하나 죽게 놔두지 않겠다. 이런 바보 같은 약속은 못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죽을 사람은 결국 죽겠죠.”
“이 미친놈아!”
“아주 죽으라고 저주를 하지 그러냐!”
무전을 들은 생존자들이 기어코 시현을 향해 욕설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 더 자극하면 돌이라도 던질 기세다.
아니, 만약 시현에게 외신을 퇴치한다는 중요한 임무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이미 돌이 날아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시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저놈은 결코 인류를 살려 두지 않을 겁니다. 멸종 위기종이라면서 보호해 주지도 않을 거고, 노예로 삼아 평생 부리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겁니다. 전 인류의 몰살. 저놈의 머리에 들어 있는 건 그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이 무서워서 도망간다 한들 살아남지 못합니다. 고작 1∼2개월 더 살아남자고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걷어차 버리는 멍청한 사람은 없을 거라 믿겠습니다. 옆을 보세요. 당신이 도망가면 지금 당신의 눈에 보이는 사람은 십중팔구 죽습니다.”
그 말이 있자 슬금슬금 발을 빼던 몇몇 구원자들의 걸음이 딱 멈췄다.
시현은 슬쩍 민서라의 눈치를 살폈다.
이미 포기한 얼굴을 하고 있는 민서라는 알아서 마무리하라는 식의 눈치를 보냈다.
“그러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끝을 냅시다. 이 땅에서 악마들을 몰아내는 겁니다.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고, 남을 사람은 더 이상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되게 말입니다. 악마들의 눈을 피해 주인 없는 편의점을 뒤지며 한 끼 식사에 고민해야 하는 나날은 오늘로 끝을 내는 겁니다.”
무전기의 전원이 깜빡였다.
너무 오랜 시간 충전도 없이 혹사시킨 결과였다.
앞으로 송출할 수 있는 목소리는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가장 힘든 일은 제가 맡겠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외신과 전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함께 생존을 위해 싸웁시다.”
우렁찬 환호나 박수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전투에 임하는 구원자들의 눈빛은 조금 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시현은 마지막 목소리를 송출했다.
“전원, 전투준비.”
그 목소리에 맞춰 구원자 전원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크아아아!]
그러자 악마의 군세가 구원자들을 덮쳤다.
번쩍!
섬광이 터져 나왔다.
“다들 들었지?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저 시건방진 놈이 외신과 싸울 수 있게 길을 뚫어 주는 거다!”
“가라! 길 열어! 설마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해 놓고 뒤지기야 하겠어?”
“그래, 망할!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그게 그거지!”
참가자들을 필두로 한 구원자들이 불도저처럼 앞으로 밀고 나갔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던 악마들은 완전히 박살이 났다.
소형의 경우 제대로 힘도 못 써보고 박살 났으며, 중형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에 손톱을 드러내고 사납게 뜬 눈으로 위협을 가해 봐도 구원자들의 기세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두려움을 모르는 적과 맞닥뜨리는 것은 악마들에게 있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늘 포식자의 입장이었으며, 다른 생물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으니까.
그렇기에 이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놀란 몇몇 놈들이 주춤거리는 일이 발생했다.
그 기세를 몰아 돌파하려 했지만 촉수 괴물이 문제였다.
어디까지나 이미 죽은 육신에 기생해 조종하는 것뿐인 촉수 괴물들은 겁도 없이 구원자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기생한 육신이 망가지면 새로운 육신을 찾아 기생하면 될 뿐이니 겁낼 이유가 없었다.
“길 뚫을게요.”
시현의 주변에서 알짱거리던 이나연이 단번에 치고 나갔다.
이나연 뿐만 아니라 공격력에 자신 있는 구원자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권능을 발했다.
폭풍이 한차례 정면을 쓸고 지나갔으며, 그 뒤를 이어 갖가지 권능들이 오색으로 빛을 발했다.
“와…… 뭔가 전에 사용했을 때보다 조금 더 강해진 것 같기도 하고…….”
보다 위력이 상승한 자신의 폭풍에 이나연은 놀란 듯 보였다.
본래라면 촉수 괴물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기는 것으로 그쳤어야 할 일격이 놈들을 아주 박살내 버렸으니까.
덕분에 고속도로마냥 시원하게 뚫린 길을 시현은 달릴 수 있었다.
좌우에 퍼져 있던 악마들이 시현을 향해 마수를 뻗었으나, 참가자들이 달라붙어 그것을 저지했다.
“야, 넌 그냥 가!”
“그냥 달려요! 칼 휘두를 생각 말고. 아니, 기왕이면 뛰지 말고 조금 빠른 걸음 정도로! 달릴 때 쓰는 체력조차 아깝다!”
시현의 체력과 정신력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남아 있어야 외신과의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구원자들, 특히 참가자들은 필사적이었다.
외신과 맞닥뜨리기 전에는 시현의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눈물겹네, 아주.”
피식 웃은 시현은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7레벨 구원자에게 있어 달리는데 쓰는 체력 정도는 느낌도 안 난다.
‘문제는 어떻게 저기까지 가느냐는 건데…….’
현재 이자프와 외신은 지상으로부터 약 20여 미터 떨어진 상공에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시현은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늘을 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것도 아니다.
목적지 인근까지 도착한 상황인데 마지막 장애물을 만난 상황.
어떻게 돌파해야 하나 싶어 잠시 머리를 굴리려던 찰나, 시현의 발아래에서 피의 사슬이 솟구쳐 올랐다.
직경이 약 1미터는 될 법한 사슬은 가파른 경사를 그리며 외신과 이자프가 있는 장소로 뻗어 있었다.
시현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뭘 봐.”
언제부터 거기에 있던 걸까.
강소하가 뚱한 얼굴로 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센스 좋네. 고맙다.”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놈이었어?”
“누구랑은 달라서. 도움을 받으면 감사 정도는 할 줄 알거든.”
“……아, 그러셔.”
그 말을 끝으로 강소하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피의 사슬을 향해 달려드는 악마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배배 꼬인 응원이기는 하지만, 강소하가 만들어 준 피의 사슬은 아주 유용했다.
다소 경사가 가파르기는 해도 시현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빠르게 사슬을 타고 움직인 시현은 결국 이자프와 외신이 있는 장소에 도달할 수 있었다.
[왔나. 생각보다 빨랐군.]
“그러는 넌 생각보다 꼴이 말이 아니네.”
[……부정할 수 없군.]
이자프는 피식 웃었다.
현재 그의 몸 상태는 어떻게 저리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건지 의아함이 들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다.
왼쪽 팔은 아예 잘려나가 있으며, 절단면으로부터 시작된 검은 기운이 어깨까지 잠식한 상황이다.
그 외에도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전에 한 번 짓밟아 본 적이 있는 놈이라 방심하고 있는데. 권능도 부족하고 장비도 없으니 제법 힘드네.]
[아니.]
이자프의 말에 반응한 이는 시현이 아닌 외신이었다.
그는 실망이 깃든 눈으로 이자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약해졌다. 이전의 너에게는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지. 그를 위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기적까지 선보였어. 하지만 지금의 네게는 그런 욕망이 없군.]
[나 혼자 길게 살아 뭐하겠어. 외롭기만 하지. 그거 알고 있나? 천사 놈들은 징그럽게 재미없다. 그 놈들이랑 한평생을 사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그렇다면 내가 친히 네놈에게 마지막을 선사해 주마. 그리고…….]
온갖 감정이 가득 담긴 외신의 시선이 시현에게 향했다.
[네놈에게도.]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