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
인간적으로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시현은 망설였다.
처음 시현이 가지고 있던 재화는 60억.
하지만 이제 와서는 그 절반도 채 남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돈이기는 하지만,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나 집값을 생각해 보면 예전처럼 상사 얼굴에 사표를 던질 정도의 금액은 아닌 셈이다.
더군다나 그 돈을 굴려 무너진 집안을 일으킬 생각이던 시현에게는 더욱이나 적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아,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시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깊은 자기혐오에 몸부림치면서 말이다.
만약 시현이 망설임 끝에 구매를 포기한다면, 저 아래에서 악마와 싸우고 있는 구원자 중 최소 3할은 전사할 것이다.
아무리 큰돈이 걸려 있는 문제라고는 하지만,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 아닌가.
고민하는 것 자체가 죄악처럼 느껴졌다.
시현은 곧장 블랙마켓을 호출했다.
“진짜 있네.”
귀찮게 물건의 목록을 하나씩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마치 ‘내가 필요하지?’라고 주장하듯 목록의 가장 상단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으으.”
구매 버튼에 올린 시현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이미 결정을 내렸음에도 마지막 순간에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황혼의 이슬에 적힌 문구 때문이다.
<황혼의 이슬.>
본인을 포함해 주변에 있는 구원자의 체력 및 정신력을 회복시킨다.
일시적으로 정신력의 총량이 증가하며 순도가 높아져 정신력을 사용한 권능의 위력이 소폭 상승한다.
사용 가능 횟수 : 3회.
효과는 뛰어나다.
현재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뿐더러 지금 당장이라도 채비를 마치고 이자프와 외신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전장으로 복귀할 수 있다.
문제는 마지막 문구다.
“차라리 길더라도 쿨타임이 있는 게 낫지. 소모품이라니…….”
즉, 세 번을 사용하고 나면 황혼의 이슬은 영구적으로 소실된다는 소리다.
그런 주제에 가격은 억 소리가 나오도록 비쌌다.
그래도 필요하다면 사야지 어쩌겠는가.
막 구매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이었다.
돌연 신경 쓰이는 점이 발견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옆에서 시현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던 한소현이 시현의 중얼거림에 곧장 반응했다.
“뭐가?”
“자랑은 아니지만, 아마 현 시점에서 블랙마켓을 사용할 수 있는 참가자는 제가 유일할 겁니다.”
“분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블랙마켓에서 사용되는 화폐는 원화다.
그리고 참가자가 원화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아마 몇 가지 방법이 있을 테지만, 시현이 기억하고 있는 방법은 다른 참가자를 죽이는 것뿐이다.
그마저도 수급량이 극히 제한적이라 사실상 참가자가 수억을 지불해야 하는 블랙마켓의 물건을 구매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시현처럼 아주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래서 저는 블랙마켓 목록을 항상 기억해 두고 있습니다. 어지간해서는 지갑을 열 생각이 없지만, 만약의 사태에 바로 ‘블랙마켓의 그 아이템을 사용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들게끔. 이름뿐 아니라 성능과 가격까지도 기억해 두고 있습니다.”
“성능은 그렇다 치고 가격까지?”
설마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 걸까.
한소현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 역시 가끔씩 블랙마켓을 확인하기는 하지만, 시현처럼 목록 전부를 외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 블랙마켓에 황혼의 이슬은 존재하지 않았거든요.”
“그래?”
시현의 기억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지만, 한소현은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확신을 갖고 말하는데, 기억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블랙마켓에 변화가 발생했다 보는 게 맞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치 누군가가 저희에게 필요한 물건을 마켓에 올려놓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맞아.]
시현의 말에 답을 한 이는 한소현이 아니었다.
배후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음성.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 굳이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었다.
익숙한 음성이었으니까.
“아르하.”
담담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돌린 시현은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누가 봐도 그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벽에 기댄 아르하의 안색은 굉장히 창백했으며, 복부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피가 쏟아지지는 않지만, 거미줄 모양의 검은 무언가가 그녀의 몸을 좀먹고 있었다.
복부의 작은 구멍에서 시작된 거미줄은 그녀의 허벅지와 어깨까지 잠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황혼의 이슬은 내가 판매 목록에 올려놓은 거야. 원래라면 직접 구해야 하지만, 내게 그 정도 권한은 있거든. 그것뿐이라면 인과율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까. 물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건 너이기도 하고. 그리고 네가 가진 재화는 상위 차원에가 사져온 재화라 가치가…… 아니, 굳이 거기까지 말할 필요는 없나.]
거기까지 말한 아르하는 울컥 피를 토했다.
검게 물든 피.
그녀의 상태는 굉장히 심각해 보였다.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 괜찮은 건가?”
[전혀 괜찮지 않아. 보다시피 시간이 별로 없어. 물론 나도 네가 가진 재화를 전부 사용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달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어. 죽는 건 그리 무섭지 않지만, 만약 내가 죽게 되면 너도 상당히 곤란해질 거야.]
“그거야…… 그렇겠지.”
부정할 수 없었다.
시현이 다른 구원자나 참가자들보다 압도적인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건 레벨의 차이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시현이 남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두 개의 낙인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아르하의 권능은 다수의 다른 권능을 모방하는 것.
있고 없고의 차이는 천차만별이다.
[선택은 네 몫이야. 어디까지나 내 추천이라고만 생각해 줘. 하지만 정말 얼마 안 남았어.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지만…….]
“알겠어, 알겠으니까 요양이라도 하고 있지 그래.”
시현은 실시간으로 죽어가고 있는 아르하의 입을 막았다.
애초에 블랙마켓의 판매 품목이 갱신된 게 이상하다 생각했을 뿐이지,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시현은 곧장 구매 버튼을 눌렀다.
강렬한 빛과 함께 시현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푸른 보석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목걸이였다.
투명한 보석의 안쪽에서는 작은 물방울 세 개가 원을 그리며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자, 됐지?”
[……고마워.]
대체 뭐가 고맙다는 건지 모르겠으나, 시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르하는 고통과 싸우는 와중에도 힘겹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말해 주는 걸 깜빡했네. 전에 네가 한 제안 말이야.]
“내 제안이라면…… 구독 취소 건에 대한 이야기인가?”
[맞아. 고민 끝에 우리는 네 제안을 수락하기로 했어. 물론 전부를 수용하는 건 인과율이 허락하지 않아서 조금 수를 쓸 수밖에 없었어. 그 정도는 양해해 줬으면 해.]
“확인해 볼게.”
아르하가 말하는 수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시현은 랭킹을 불러왔다.
약속대로 모든 참가자들의 구독 및 조회수가 0으로 변해 있었다.
제대로 약속을 지킨 것이다.
덕분에 시현 역시 아래에서 싸우고 있는 참가자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고.
이대로 엔딩을 맞이한다면 참가자 전원이 행복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아르하가 말한 한 가지 수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모든 참가자들의 순위는 1이 아닌 2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랭킹 1위는 구독자 1, 조회수 1인 윤시현으로 표기되어 있었고.
“이거 참…….”
굉장히 난감한 상황이었다.
모두 함께 1위로 Re write를 끝내자고 기타 참가자들을 설득한 건 시현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2위 자리를 안겨 주고 본인이 1위 자리를 홀랑 차지해 버린다면, 그들이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지 빤하지 않은가.
“잠깐만, 이건 너무하잖아. 차라리…… 그새 어디로 사라진 거야?”
랭킹에서 눈을 뗀 시현이 다급히 아르하를 찾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아르하는 자취를 감춰 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신음하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한소현 뿐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기에 시현은 한숨을 내쉬며 랭킹 목록을 눈앞에서 지워 버렸다.
어떻게 다른 참가자들을 납득시킬지, 머리로는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말이다.
장거리 마라톤이라도 한 듯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킨 한소현은 잔뜩 얼굴을 구긴 채 방 안을 살폈다.
“어디 갔어?”
“사라졌습니다.”
“무슨 신이 예고도 없이 막 강림하는 거야? 깜짝 놀랐잖아.”
그녀의 기분은 굉장히 불쾌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아르하가 강림과 동시에 위압감으로 그녀를 찍어 눌렀기 때문이다.
본인이야 상처 때문에 괴로워 불필요한 문답을 줄이기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졸지에 바닥을 기게 된 한소현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시현의 손에 들린 목걸이를 발견한 한소현의 기분은 금방 풀렸다.
“그게 황혼의 눈물이야?”
“네. 바로 사용하겠습니다. 범위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 1층으로 가시죠.”
아르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안 이상 1분 1초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외신을 쓰러뜨리고 소설에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1층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동쪽! 동쪽에 악마 다수 출몰! 지원 바람!”
“이쪽은 불가. 지금만으로도 한계야.”
“남쪽에도 지원 좀……! 젠장, 서쪽은 지금 여유롭잖아! 인원 좀 빼서 우리 쪽으로 돌려달라고!”
“너네만 힘드냐? 우리도 힘들다!”
온갖 고성이 오가는데다가 서로를 향해 욕설까지 토해 내고 있는 상황.
사실 상호간의 협력이 유지되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 할 만큼 분위기가 살벌했다.
피로로 인한 스트레스와 정신력 고갈로 인한 두통이 구원자들을 날카롭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오기까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에 반성하며, 시현은 황혼의 이슬을 사용했다.
화악!
그가 가지고 있는 목걸이를 중심으로 푸른색의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비눗방울이 터지는 듯한 경쾌한 소리와 함께 파동에 닿은 구원자들의 몸에 청아한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그러니까 나는 간밤에 잠도 제대로 못…… 응?”
“뭔가 몸이 편해진 거 같은데, 착각인가?”
몸과 정신이 편해진 구원자들 사이에서 고성이 잦아들었다.
“와…… 이거 효과 확실하네.”
특히 회복 술사로서 밤낮을 구분하지 않고 부상자들을 치료해야 하던 한소현의 경우 느끼는 감동의 규모가 더욱 컸다.
마찬가지로 황혼의 이슬의 효과를 톡톡히 본 시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색의 용에게 힘을 부여한 이후, 병든 닭 마냥 골골거리던 눈동자가 더할 나위 없이 청명해졌다.
날아갈 듯 몸이 가벼웠으며 지속적으로 두통을 호소하던 머리는 실컷 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해졌다.
“확실히 비싼 값은 하네요. ……이제 사용 가능한 횟수가 2회뿐이라는 게 아쉬울 정도입니다.”
보석의 안쪽에서 맴돌던 세 개의 물방울.
그중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제 남은 횟수는 두 번뿐이라는 것을 확실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목에 건 시현은 무전기를 손에 들었다.
“윤시현입니다.”
분명 무전기를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리더들이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시현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답하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채널이 복잡해질 것을 염려한 시현이 따로 대답할 필요는 없다고 사전에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모두 피곤할 텐데 지시는 확실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덕분에 시현은 빠르게 다음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조금 전 황혼의 이슬을 사용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세력 리더는 참가자이기에 굳이 말을 길게 늘어놓으며 설명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됐다.
“휴식 중인 인원 전부 집결해 주세요. 지금부터 악마들을 몰아내고 전장으로 복귀하겠습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