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하여간 생각대로 움직여 주는 놈이 없네.]
도대체 언제부터 그곳에 있던 것일까.
이자프가 외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와 마주한 외신의 무표정이 처음으로 깨졌다.
사납고 폭력적인 시선.
시현 역시 그런 시선을 몇 번이고 받아 본 적 있었다.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그 상태에서 차곡차곡 원한을 쌓아 올렸을 때.
그렇게 성립된 원수 관계에 놓인 상대방은 저런 시선으로 시현을 보고는 했다.
[이러기 위해 다시 시작한 게 아닌데 말이야.]
그 말과 함께 한숨을 푹 내쉰 이자프가 시현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사전에 무언가 약속한 것은 없지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시현이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참가자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시현이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고개를 끄덕인 참가자들이 세력원들을 이끌고 하나 둘 전장을 이탈했다.
외신과 싸우기 위해서는 7레벨 구원자인 시현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시현은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
따라서 다음을 기약하며 작전상의 후퇴를 하는 것이다.
[이자프…… 한 번 승리를 경험하더니 기고만장해졌군. 겁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내 앞에 나타나다니.]
[버러지니 어쩌니 욕하고 다니던 인간이랑 손을 잡은 주제에 말이 참 많아. 창피를 모르나?]
[…….]
조롱하기 위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내뱉은 말이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외신은 말없이 한참이나 이자프를 노려봤다.
입은 달싹거리고 있는데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몸을 웅크리고 손으로 눈가를 덮은 채 부들부들 떨던 외신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진정해라. 반응할 가치도 없는 단순한 도발이다. 우리의 목표가 무엇인지, 왜 봉인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이곳까지 왔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중얼거림에 답을 하는 이는 이자프가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시끄럽다. 너 역시 목표를 눈앞에 두고 인간 여자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느냐.]
[…….]
외신과 그 육체에 흡수된 이한울.
그들의 사이가 퍽 좋지는 않아 보였다.
인간과 외신.
서로의 목적이 일치해 손을 잡은 결과, 상승효과를 누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 할 수 있었다.
[너에게 허락할 수 없는 문제가 있듯 내게도 있다. 그게 바로 저 인간이고.]
[인간이라니…… 그렇게 불린 것도 오랜만이네.]
이자프는 웃으며 자신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이자프가 사용하는 무기는 검.
원작에서 최후의 전쟁 때 사용한 무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반면 외신은 어떠한 무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놈은 두 손에 강한 기운을 품은 채 이자프를 향해 걸었다.
“뭐 하고 있어요?”
이나연이 시현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제야 시현은 주변에 있던 구원자들이 전부 퇴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만약 이나연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홀로 덩그러니 남아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냥…… 나도 모르게 정신이 팔려서.”
원작 최강의 구원자이자 주인공이며, 이제는 인간 그 이상의 영역에 발을 들이며 이자프라는 새로운 이름까지 얻게 된 정훈.
정훈에게 힘을 준 천사보다 한참은 뛰어난 무력을 가지고 있는 악마.
높은 경지에 있는 그들의 싸움이 어느 정도인지 눈에 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이나연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오빠한테 가장 중요한 건 휴식이에요. 지금 강림한 신이 외신을 막아 주고 있는 것도 오빠가 회복할 시간을 벌어 주려고 하는 거 아닌가요? 여기 있다가 불똥이라도 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알았어.”
결국 시현은 이나연에게 붙들린 채 전장을 이탈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질질 끌려간다는 표현이 옳을 정도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현의 눈은 주변 환경에 경이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두 남자의 전투에 못 박혀 있었다.
* * *
이자프의 도움 덕에 시현은 촉수 괴물이 득실거리는 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시현은 일행의 도움을 받아 악마의 둥지로 사용되고 있던 빌딩 하나를 청소한 후, 그곳을 임시 거주지로 삼았다.
그러곤 뿔뿔이 흩어진 참가자들을 집결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푹 자고 만족스럽게 먹고 마시며 쉬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런 망할! 또 와요!”
최상층에서 망원경으로 주변을 살피던 이나연이 보고인지 분노인지 모를 말을 토해 냈다.
그녀의 말이 있자,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것들은 어디 공장에서 막 찍어 내기라도 하는 건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네.”
강소하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비단 짜증이 머리끝까지 나있는 사람은 강소하뿐만이 아니었다.
그 성격 좋은 민서라도 얼굴 가득 짜증과 분노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귀찮게 흘러내리는 머리를 묶어 올리며 한 번, 손이 상하지 않도록 장갑을 착용하며 한 번, 옷 위에 갑옷을 덧대며 한 번, 허리춤에 단검이 매인 벨트를 착용하며 한 번.
끊임없이 한숨을 쉬어댔다.
그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고 있기에 시현은 말없이 창가로 다가갔다.
[크아아아아!]
멀리서 악마의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이나연은 망원경을 사용했지만, 사실 육안으로도 악마의 모습을 확인하는 게 가능했다.
“확실히 징그럽기는 하네.”
시현 역시 그들의 한숨 행렬에 동참했다.
여길 봐도 악마, 저길 봐도 악마.
빌딩 주변이라면 어디를 봐도 오로지 악마뿐이다.
마치 빌딩 주변에 대량의 신혈이라도 뿌려 놓은 것처럼 악마들이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었다.
아마 이 순간에도 이자프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외신의 짓일 것이다.
놈은 모든 악마들을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까.
놈의 명령만 있다면 기꺼이 붉은 빗속으로 뛰어드는 악마들 아니던가.
빌딩 근처에 이미 동족의 시신이 산처럼 쌓여 있다 한들 놈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B조랑 교대까지 얼마나 남았지?”
“네 시간. 제발 저게 마지막 웨이브였으면 좋겠는데.”
“음…… 지금까지 대충 두 시간 간격으로 놈들이 쳐들어왔으니, 아마 한 번은 더 싸워야 하지 않을까요?”
“망할.”
일행은 투덜거리면서도 모든 무장을 마치고 1층으로 향했다.
임시로 만들어 놓은 바리케이드 앞에서 이미 다수의 구원자들이 몰려오는 악마를 상대로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기 안쓰러울 만큼 그들은 지쳐 보였다.
‘체력이나 정신력의 보충을 위해 세 개 조를 편성해서 교대로 굴리고 있기는 하지만…… 악마의 수가 너무 많아.’
답답한 마음에 시현은 입술을 씹었다.
심지어 전투로 인한 소음과 불안감 때문에 제대로 마음 편히 쉬지도 못해 구원자들의 체력과 정신력은 보충되는 양보다 소모되는 양이 더 많았다.
생각 같아서는 시현 역시 참전하고 싶지만, 그의 정신력이나 체력은 지난번의 소모 이후 아직 보충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시현은 소파에 몸을 뉘였다.
“왜 그러세요?”
시현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감지한 건지, 그의 호위를 위해 곁에 남아 있던 이나연이 질문을 던졌다.
딱히 숨길 내용도 아닌지라 시현은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회복이 너무 느려. 아마도 백색 용에게 힘을 부여한 후유증이겠지. 원래라면 하루만 쉬어도 충분히 보충됐을 테지만…… 지금 상태를 보아하니 1주일은 꼬박 걸릴 거 같아.”
“그렇게나 오래 걸려요? 그러면 안 되는데.”
이나연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시현의 회복에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그만큼 다른 구원자들에게 걸리는 부담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맞아. 그러면 안 되지.”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다.
시현의 체력이 보충되었다 한들 함께 싸워 줄 저들의 체력과 정신력이 바닥이라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만약 지금처럼 외신이 최전방으로 나오지 않고 제 영역의 심층부에 자리 잡은 채 봉인을 푸는데 집중한다면, 시현은 어쩔 수 없이 그가 있는 심층부까지 향해야 한다.
그때 함께해 줄 구원자들이 없다면 시현은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체력과 정신력을 대거 사용해야만 한다.
“하다못해 치유의 권능이라도 남아 있다면 모르겠는데, 하필이면 다른 쓸모없는 권능 놔두고 그 권능이 사라지는 바람에…… 멍청한 로아 렐레아.”
이제는 저 세상으로 가 버린 무능한 신을 향해 투덜거리고 있던 때였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더니 한소현이 방 안으로 침입해왔다.
“C조는 벌써 한계야.”
그러더니 대뜸 인사도 없이 그리 말하는 게 아닌가.
다소 무례한 태도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쪽이 편한 건 시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계라는 건 체력입니까? 아니면 정신력?”
“둘 다.”
“끄응…… 역시 이렇게 되나.”
시현은 골머리를 싸맸다.
처음 조를 편성할 때 너무 급하게 행동한 게 문제였다.
각 세력에 속한 구원자들의 특기, 머릿수를 헤아려서 조를 편성해야 하는데, 당장 파도처럼 밀려오는 악마들 앞에서 그런 것까지 계산할 여유가 없었다.
급한 대로 각 세력에 속한 구원자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묶어 조를 편성했는데 그 결과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확인 사살이라도 하려는 건지 한소현은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언급하기 시작했다.
“우선 A조 같은 경우, 전체적으로 원거리 공격에 능한 구원자들로만 편성되어 있어. 근접 능력이 부족하다보니 불가피하게 권능을 많이 사용해야 해서 항상 정신력 고갈에 시달리고 있어. 그나마 있는 근접 계열 구원자들이 고레벨이라 버티고 있는 실정일 뿐이지. B조의 경우는 반대. 인원도 많고 전체적으로 레벨도 높아. 하지만 광역기를 가진 구원자가 없다시피 해서 효율이 굉장히 뒤떨어져. 마지막으로 C조는…… 최악이야. 머릿수도 모자라고 레벨 평균도 떨어져.”
“심각하네요.”
앞으로 며칠은 더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보다 효율적으로 구원자들을 배치해야 하는데 이 역시 문제가 발생한다.
가장 최선책은 A조에서 인원 몇을 빼 휴식을 취하게 하고 B조나 C조에 편성하는 식으로 조금씩 인원을 돌려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었다.
현재 굉장히 아슬아슬하게 악마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는 실정이라 A조건 B조건 인원의 일부를 차출하는 순간 방어가 무너지고 만다.
그렇다면 차선책은 A조에서 인원 일부를 B조의 시간대까지 연장 근무를 시키는 것인데, 사실상 이 역시 불가능한 방법이다.
전투를 끝마치고 나면 체력이건 정신력이건 바닥을 치게 되는데, 그 상태로 연장 근무까지 하게 되면 사상자가 대거 발생할 것이다.
즉, 처음 조를 편성한 시점에서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셈이다.
‘민서라 씨나 한소현 씨를 중심으로 한 D조를 편성해서 그들이 빈자리를 채우게 하면…… 아니, 그렇게 되면 그 사람들에게 너무 부담을 주게 돼. 차라리 내가…… 그건 또 본말전도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봐도 좀처럼 괜찮은 수가 나오지 않자 슬슬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그때 한소현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내게 방법이 있어.”
“어떤 방법입니까?”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기에 시현은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그녀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아이템 중에 일정 범위 내에 자리한 구원자들의 회복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주는 아이템이 있어. 아마 너도 알고 있을 걸? 황혼의 이슬이라고…….”
“……!”
시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어찌 그 이름을 모르겠는가.
원작의 마지막 전쟁에서 불리한 전황을 뒤집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보물인데.
시현 역시 가능하다면 마지막 전쟁이 있기 전에 황혼의 이슬을 손에 넣고 싶어 했다.
그러나 구조상 황혼의 이슬을 얻으려면 최소 3년차는 되어야 하기에 포기하고 있었다. 그때 한소현의 입에서 그 이름이 언급된 것이다.
“가지고 계십니까?”
“만약 그랬다면 진즉 꺼냈겠지.”
그녀의 말에 조금은 흥분이 가셨다.
“하지만 어떻게 구하는지는 알고 있어. 그리고 그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준비한 글을 낭독하는 것처럼 무심하게 주절거리는 한소현이 어째서인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만한 여자가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일까.
괜히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안 좋은 쪽에서 시현의 감은 대충 들어맞는 편이었다.
“블랙마켓.”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