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두 손에 순백의 깃털과 새빨간 피를 잔뜩 묻히고 온 그 날.
자신의 둥지로 돌아온 남자는 관심 갖고 지켜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주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 멍청한 놈이 인간 따위에게 당하다니…… 한심스럽군.]
그뿐이랴.
며칠 동안 애써 만들어 놓은 붉은 하늘에 숭숭 뚫려 있는 구멍도 그의 분노를 한 층 더 키웠다.
뚫린 구멍으로부터 밝은 빛이 쏟아졌다.
그 빛은 붉은 하늘 아래에서 활동하던 촉수 괴물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이미 죽은 놈은 어쩔 수 없고, 일단 망가진 통로부터 수복하도록 하지.]
봉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 위해 소량의 힘도 아까운 마당이기에 남자의 불쾌함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붉은 하늘 위에 몸을 띄운 채 망가진 부분을 수복하던 남자의 표정이 돌연 변했다.
[확인해 봐야 할 것이 생겼다.]
[뭐지?]
[아까 말했듯 봉인이 완전히 풀린 악마를 인간 따위가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으로부터 2∼3년 정도의 시간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다면 무언가 다른 수단을 썼다고 생각해야 한다.]
무력한 인간.
그런 인간에게 당한 동료.
그렇다면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그 쇳조각이겠군.]
홀로 문답을 나누던 남자는 기어코 답을 도출해 내는데 성공했다.
남자는 하늘을 수복하는 것도 멈춘 채 곧장 자신의 둥지로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바닥에 고여 있는 피의 웅덩이 속에 조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남자의 표정에 분노가 깃들었다.
말은 쇳조각이라 했지만, 그건 결코 단순한 쇳덩어리가 아니다.
멍청하고 겁 많은 천사들이 인과율을 비틀어 가며 만들어 낸 무기.
한낱 인간 따위가 천사에게도, 악마에게도 상처를 입힐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일종의 신기다.
그가 가진 것은 네 개로 나누어진 검의 조각 중 하나일 뿐이지만,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신을 죽이는 자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안심하고 있었건만,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런 사고가 터지고 만 것이다.
[놈이 멍청해서 당한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 관리 소홀이 원인이었군. 천사 놈들을 심판하러 간 게 실패였나…….]
[아니. 아직 실패라 칭하기에는 이르지. 놈들에게 무기를 쥐어 준 것보다 반 이상의 천사들을 죽여 없앤 게 몇 배는 더 이득일 테니까. 아르하 역시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이번 전쟁에는 참가할 수 없을 거다. 우리가 할 일은 얌전히 힘을 키우며 전쟁을 준비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병력을 모으고 그것들이 활약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줘야겠군.]
남자는 곧장 망가진 하늘을 수복했다.
하늘을 수복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법 많은 힘을 소모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게 못내 아쉬웠다.
하늘의 수복을 마친 남자는 병력을 끌어모았다.
붉은 하늘과 푸른 하늘의 경계에 있는 구원자들이 허튼 짓을 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촉수 괴물들을 경계에 보내 놈들을 위협했다.
그리고 본인은 둥지로 돌아가 남아 있는 봉인을 마저 깨뜨리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제 머지않았다. 곧 있으면 버러지 같은 놈들에게 종말을 선언할 것이다. 그 하찮은 복제품들을 처리하고 난 다음에는…….]
남자는 눈을 감았다.
복제품이 아닌, 진짜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
사실 아무 의미도 없는 이 소설 속 세상의 원본.
떠올리기만 해도 치가 떨렸다.
[종말을…….]
[……뭔가가 오고 있다.]
남자는 눈을 떴다.
멀리서부터 엄청난 힘의 덩어리가 이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을 감지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네 갈래로 갈라진 힘의 파동은 남자의 둥지를 중심으로 정확하게 동서남북 네 군데를 가격했다.
붉은 하늘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네 개의 통로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춘 것이다.
심지어 가고일이 교대하느라 자리를 비운 취약한 시간대를 노린 일격이었다.
[…….]
남자는 분노했다.
고고고고!
남자가 느끼는 감정을 따라 일대의 공기가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대지가 진동하며 돌가루가 떨어지고, 바닥에 고인 피의 웅덩이가 기괴한 형태로 소용돌이쳤다.
[크아아아!]
하늘 위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딱히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남자는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덩치에 아름다운 백색의 비늘을 가진 용.
원래는 악마의 창조물이었으나, 천사들의 계략에 빠져 인간의 종살이를 하고 있는 가엾고 불쌍한 짐승이다.
[그렇다고 해서 봐 줄 수는 없지. 감히 짐승 따위가 주인에게 이를 들이밀었으니…… 대가는 죽음뿐이다.]
남자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콰아아아!
적색의 섬광이 쏘아진 직후, 육중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 이후로 더 이상 남자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소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보아하니 내 봉인이 풀리기 전에 끝장을 볼 생각인 거 같은데…… 원한다면 싹 다 잡아 죽여 주마.]
* * *
“크헉! 크아아악!”
한껏 신이 나 있던 이재준이 돌연 바닥에 쓰러졌다.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문 그는 기괴하게 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구멍이 뚫린 하늘, 약해진 붉은 비.
전투 중 울려 퍼지는 소음과 함성으로 인해 쓰러진 이재준이 발견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저래?”
“심폐 소생술 같은 것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일단 치료 가능한 구원자부터 불러!”
그를 발견한 사람들이 소란을 떨었다.
전방으로 나가 있던 한소현이 급하게 복귀했다.
그녀만큼 즉효성 높은 회복 계열 권능을 사용하는 구원자가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힘을 신룡에게 쏟아 부은 대가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시현도 부리나케 달려왔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모르겠어. 뭐가 이유인지 모르겠는데 권능을 사용해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시현의 질문에 한소현이 미간을 찌푸린 채 대꾸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회복의 권능이 전혀 효과를 보이지 않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의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은 시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먼 촉수에 얻어맞은 것도 아니고, 정신력이 바닥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원작에서도 신룡의 군주가 대뜸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는 묘사는 없다.
그렇기에 더욱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찰나였다.
“어? 어어어어!”
“이거 뭐야! 왜 우리를 공격해? 뭐가 어떻게 된 건데!”
전방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전장을 눈에 담은 시현은 그제야 이재준이 발작을 일으킨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미친.”
욕을 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수목원을 향해 호기롭게 날아간 백색의 용.
시현의 힘을 죄다 흡수하고 어마어마한 덩치를 갖게 된 그 놈이 촉수 괴물을 대동한 채 구원자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백색 용의 가슴은 뻥 뚫려 있었으며, 쩍 벌어진 입과 눈에서는 촉수들이 빠져나와 있었다.
“아니, 날아간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당한 거야?”
시현은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쳤다.
“실수했네.”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래도 자신의 힘을 전부 흡수했으니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오히려 외신의 힘을 상당 부분 깎아 놓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까지 품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쏘아 낸 광선에 힘의 상당 부분을 사용했음을 감안했어야 했다.
“차라리 전선에 세워 뒀으면 엄청난 활약을 선보였을 텐데…….”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아군의 편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어야 할 백색의 용은 이제 적이 되어 아군을 위협하고 있었다.
“으아아악!”
“사, 살려 줘!”
구원자들의 비명과 통곡하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촉수 괴물의 강함은 해당 생물체가 생전에 가지고 있던 힘에 비례한다.
백색의 용은 7레벨 구원자인 시현의 힘 대부분을 집어삼키고 만들어진 괴물.
그 중 상당 부분을 소모했다 한들 저레벨 구원자들이 버텨 낼 수준이 아니었다.
벌써부터 희생자가 발생했다.
자연히 시선이 괴로워하는 이재준에게 향했다.
‘이재준을 죽이면 저놈도 사라지나?’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애초에 시현의 힘을 용에게 불어넣은 것도 이재준의 권능.
그의 권능이 사라진다면 최소한 용이 가지고 있는 시현의 힘은 사라질 것이다.
‘아니…… 뭐 하는 건지 모르겠네.’
시현은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나쁜 생각을 떨쳐 냈다.
당장 급한 상황을 모면하자고 아군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현은 전방으로 향했다.
“퇴각! 퇴각해!”
“이런 빌어먹을! 네가 뭔데 멋대로 지휘를 내려? 아직 윤시현으로부터는 아무런 지시도 없었어!”
“닥쳐! 그 새끼 지시 기다리다가 다 죽게 생겼잖아! 우리 세력의 구원자라도 살릴 거야!”
“거기 조심해!”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갑작스러운 강적의 난입에 달아나려는 자들, 그들을 만류하는 자들, 남들이야 뭘 하건 묵묵히 자신이 할 일만 하는 자들.
그들이 한 데 섞여 혼란을 빚어내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시현은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참가자와 그들이 이끄는 구원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들 모두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뭉쳤으나, 문제는 시간이 모자라 제대로 된 지휘 체계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시현이 최종적인 지휘권을 갖고, 각 세력의 리더들에게 지시를 내리면 그들이 밑에 있는 구원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그런 형태의 단순한 체계를 만들기는 했지만, 하나하나 연락을 돌리는 것도 쉽지 않았으며, 제각각의 성향을 가진 그들은 시현이 생각하는 대로 착착 움직여 주지 않았다.
“윤시현!”
백색의 용이 있는 곳을 향해 달리고 있으려니 우렁찬 목소리가 그를 불러 세웠다.
LT마트의 리더 한기훈이다.
“얌마, 힘도 안 남아 있는 놈이 어디 가는 거야? 그쪽은 위험해.”
“그래도 크게 한 방 정도 먹일 여유는 있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한 방 먹이고 나면 그 뒤로는 대책이 없다는 말이네?”
“…….”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한기훈이 낄낄거리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래도 뭐, 한 방이면 충분하겠지. 그 전후는 우리가 도와주마.”
그 든든한 한 마디가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시현은 저도 모르는 사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자, 다들 들었지? 우리 목적은 이놈이 저 도마뱀에게 한 방 크게 먹여 줄 수 있도록 무사히 호위하는 거다!”
“오오오오!”
한기훈 휘하의 구원자들은 군기가 잘 잡힌 군인과도 같았다.
딱히 지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모여 시현을 중심으로 큰 원을 그리듯 자리를 잡았다.
시현은 그들을 믿고 앞을 향해 달렸다.
높아진 체온만큼 쏟아지는 빗줄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왼쪽 조심해!”
“앞에서도 온다!”
시현이 백색 용까지 향하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계속해서 촉수 괴물들이 공격을 해 왔고, 그럴 때마다 아군 구원자들은 몸을 던졌다.
부상자가 속출할 때마다 시현을 보호하는 원에 구멍이 생겼다.
제법 규모가 있는 상태에서 시작한 원은 인원이 빠져나갈 때마다 점점 크기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도착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백색의 용이 날뛰고 있는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현장에는 수많은 참가자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 있는 인물은 이나연이다.
“앗, 우앗…… 진짜 더럽게 싸우네!”
거대한 몸집과 꼬리를 이용해 근접해 오는 것을 막고, 원거리에서 촉수로 일방적인 공격을 해대는 백색의 용을 보며 이나연이 분통을 터뜨렸다.
더군다나 대형 촉수 괴물보다 더욱 강력한 공격력은 그녀의 몸에 크고 작은 상처를 만들어 냈다.
“심장이 없으니까 머리만 부수면 되는데…… 가까이 갈 수가 없으니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그녀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폭풍을 날렸다.
중형은 고사하고 대형마저 적중하면 몸 성히 끝나지 않는 강력한 위력을 가진 권능이건만, 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녀의 폭풍은 백색 용의 비늘 하나 벗겨 내지 못한 것이다.
“아, 진짜! 아아아!”
결국 제 성을 이기지 못한 이나연은 거칠게 발을 굴렀다.
그 모습을 하나부터 열까지 지켜보고 있던 두 남자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저거 가만 두면 혈압 터질 거 같지? 빨리 뭐라도 해 줘야 할 거 같은데.”
“그러게요.”
시현은 유난히도 무겁게 느껴지는 흑색의 검을 뽑아 들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