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시현은 가로로 크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길게 뻗은 빛의 검을 타고 흐르는 흑색의 기류가 반월을 그리며 뻗어 나갔다.
마치 악당의 속내처럼 한없이 검지만, 누가 봐도 분명한 신성함을 담고 있는 흑색의 기운은 정면에 있는 촉수 괴물들을 여지없이 쓸어버렸다.
촉수 괴물들은 괴로움에 몸을 뒤틀어 대며 죽어 나갔다.
‘악마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놈들이라 단단하기는 한데…… 그래도 그 때와 비교하면 동일 개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쉬워.’
검을 휘두를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가 여실히 느껴졌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지치지 않았으며, 권능을 마음껏 발휘해도 정신력이 마르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촉수 괴물이 반격해 와도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신이 나서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게 된다.
그렇게 두 자리 수의 촉수 괴물을 베어 넘길 때였다.
“시현 씨!”
민서라가 그를 불러 세웠다.
일방적인 학살극을 벌이던 시현은 그제야 검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분명 옆에서 함께 싸우고 있어야 할 구원자들이 멀리서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정확하게는 붉은 하늘과 푸른 하늘의 경계에서 원거리 공격만 깔짝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나마 가까이에 온 민서라도 우비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갑자기 비가 강해졌어요. 3레벨 구원자의 경우, 우비를 착용해도 버티지 못할 정도에요.”
“그러고 보니…….”
시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7레벨 구원자가 된 후 붉은 비에 완전한 내성이 생겨 알아차리지 못했다 뿐이지, 민서라의 말대로 빗줄기는 더욱 강해져 있었다.
이전까지가 소나기였다면 지금은 폭우라 봐도 무방한 수준.
가장자리도 이 정도인데 중심부는 도대체 어느 정도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일단 복귀해요. 그 다음에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아요. 각 세력의 리더들을 모아놨으니, 시현 씨만 오시면 돼요.”
민서라의 말에 시현은 침음을 삼켰다.
시현의 손에 쓰러진 촉수 괴물의 수가 두 자리 수라 해도 이 붉은 영역 안에 모여 있는 촉수 괴물의 수는 그보다 수십, 수백 배에 달할 것이다.
그 많은 수의 촉수 괴물 전부를 시현 혼자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
따라서 기껏 모은 참가자와 구원자들을 써먹을 수 있도록 방법을 구상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시현은 얌전히 민서라의 뒤를 따라 붉은 영역을 벗어났다.
한 번 호되게 당했기 때문인지, 촉수 괴물들은 더 이상 시현의 뒤를 쫓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에게 지시라도 받은 듯 일사불란하게 특정 장소를 향해 이동했다.
시현은 민서라의 안내를 받아 경계의 바깥에 위치한 폐건물로 진입했다.
각 세력의 리더들만 모아 놓은 자리이지만, 모인 세력이 워낙 많아서 그런지 그 수가 상당했다.
그들은 목청껏 각자 의견을 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빗속에서 버틸 수 있는 구원자들을 뽑아서 정찰을 시켜야 한다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저 빗속에서 10분 이상 버틸 수 있는 구원자는 극소수인데, 그 소수의 인원으로 촉수 괴물들을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러니까…… 거 참,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누가 안에서 촉수 괴물을 토벌하라 했나? 피해 다니면서 비가 강해진 원인을 찾으라는 거지.”
“차라리 각 세력의 창고에 있는 재료들을 모아 비를 견딜 수 있는 장비를 만들어서…….”
“그런 게 있겠냐?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싸우자는 건가?”
사공이 많아서 그런지 배는 진즉부터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저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던 사이 아니던가.
이렇게 공공의 목적을 가지고 한자리에 모였다 한들 과거의 일들이 없던 것으로 치부되는 것은 아니다.
칼부림만 없다 뿐인지 오가는 고성이나 살벌한 눈빛은 전장이나 다를 게 없었다.
“왔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털어 내는 시현을 발견한 한소현이 말했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시현에게 향했다.
부담이 느껴질 법도 하건만, 시현은 태연하게 그들을 지나쳐 준비된 자리로 향했다.
“보아하니 제가 오기 전부터 말씀들 나누시는 거 같던데, 혹시 괜찮은 의견들 있으신가요?”
“그거야 당연히…….”
“내가 생각하기에는…….”
“여러 분들이 동시에 말하면 못 알아들으니 한 명씩 발언권을 받고 발언하도록 하죠. 진행은 민서라 씨가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길 안내를 위해 여기까지 왔다가 빠져나갈 타이밍을 못 재고 멍하니 서 있던 민서라는 시현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안하게 장식처럼 서 있기만 하는 것보다야 뭐라도 역할이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수선하던 회의장의 분위기는 빠르게 정리되었다.
사람의 머릿수가 많다 보니 상당한 수의 의견이 모였다.
그러나 구겨진 시현의 표정은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뭐 하나 멀쩡한 게 없네.’
그들이 낸 의견의 대부분은 하나 이상의 심각한 하자를 가지고 있었다.
다수의 희생을 강요한다거나, 현실적으로 시행이 불가능하다거나.
그런 식으로 말이다.
이래서 현장 경험 없는 탁상공론이 위험하구나 싶었다.
“저기…….”
거듭되는 퇴짜에 새로 올라오는 의견도 거의 없어지다시피 할 무렵.
균열이 생긴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말씀해 주세요.”
“저희 세력원 중에서 재미있는 권능을 가진 구원자가 한 명 있거든요. 그 사람의 권능에 윤시현 리더가 가진 정보와 능력을 조합하면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요.”
“정확하게 어떤 권능이죠?”
“그러니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일부러 말을 흐린 남자는 여우처럼 웃었다.
“제가 신룡의 군주를 데리고 있습니다.”
그의 발언에 회의장은 난리가 났다.
모두가 깨달은 것이다.
사실상 붉은 비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작전을 사용할지 결정된 거나 다름없다고.
* * *
신룡의 군주.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은 어중이떠중이이지만, 언젠가 군주급의 강력한 구원자로 거듭나게 될 남자는 생각보다 왜소한 체구와 평범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원작에서는 분명 포악하고 주변 사람들을 위협하는 듯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들었는데…… 정말 본인 맞아요?”
“그러게요. 솔직히 의외네요.”
“저기…….”
시현과 민서라가 주고받는 속삭임을 견디다 못한 남자, 이재준은 떫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무슨 동물원의 진기한 동물도 아니고, 그런 신기한 것을 보는 듯한 눈은 그만두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그제야 시현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고개 숙여 사과했다.
원작에서 활약한 네임드를 만나는 건 늘 신선하고 신기한 기분이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당사자들에게는 꽤나 불쾌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현장에 모여 있는 사람은 시현과 민서라만 있는 게 아니었다.
회의실에 있던 참가자 대부분이 신룡의 군주를 보기 위해 현장에 몰려 있었다.
하나같이 기대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데, 부담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이도 훗날 신룡의 군주로 성장하는 인재답게 이재준은 대담하고 호탕한 편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제 권능을 이용하고 싶으시다 들었습니다.”
“꽤나 패널티가 큰 권능이라고 들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오히려 유일무이한 7레벨 구원자께서 제 권능에 힘을 보태어 주시는 게 크나큰 영광이죠.”
괜히 하는 소리는 아닌 건지, 이재준의 얼굴은 꽤나 상기되어 있었다.
이는 시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신룡의 군주와 합작할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기에 상당히 들떠 있었다.
“목표 지점의 좌표는 제가 입력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권능을 사용하는 게 한결 더 수월해지겠네요. 길게 끌 것 없이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재준은 휘파람을 불렀다.
하늘 높이 뻗어 나간 휘파람 소리를 듣고 저 높은 하늘에서부터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구아아악!]
다소 맥 빠지는 느낌의 포효와 함께 태양을 등진 채 날아드는 것은 사람의 머리통만큼 자그마하고 앙증맞은 백색의 용이었다.
“아, 악마다!”
뭣도 모르는 구원자 하나가 용을 발견하고는 총을 겨눴다.
그러자 이재준이 다급하게 그를 만류했다.
“쏘지 마세요! 제 권능입니다!”
“네? 권능이라고요?”
구원자는 크게 당황한 듯 했으나, 일단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았다.
자신보다 강한 구원자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누구 하나 백색의 아기 용에게 무기를 겨누지 않았다는 것도 그의 선택에 한 몫을 더했을 것이다.
덕분에 백색의 용은 무사히 지상에 안착할 수 있었다.
“제법…… 귀엽게 생겼네요.”
“하나도 안 강해 보여.”
[구악!]
자신에게 향하는 호기심 가득한 시선에 아기 용은 푸른 눈동자를 굴리며 경계의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다가도 이재준의 손길이 닿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배를 발라당 까뒤집으며 애교를 부렸다.
용의 배에는 이재준의 손등에 새겨진 것과 동일한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시작해도 될까요?”
이재준은 시현에게 허락을 구했다.
시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재준은 용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용의 머리 위로 여러 도형이 뭉쳐 만들어진 기괴한 빛의 문양이 나타났다.
“준비 끝났습니다.”
뭘 어떻게 하면 된다는 식의 설명은 없었으나, 본인이 어떻게 하면 될지 시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시현은 용의 머리에 나타난 문양 위로 손을 얹었다.
그러자 시현의 손바닥과 문양 사이에 빛의 통로가 생겼다.
통로를 통해 무형의 무언가가 용에게 흘러 들어갔다.
[구우우우!]
용의 크기는 빠른 속도로 커졌다.
처음에는 사람의 머리통만 하던 놈이 눈 깜짝할 사이에 대형견만큼 커지더니, 승용차를 넘어 대형 버스 크기까지 성장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용은 계속해서 크기를 키웠다.
“오오오!”
두 주먹을 불끈 쥔 이재준의 눈동자가 기쁨과 격양의 감정으로 반짝였다.
반면 시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입술을 씹고 있었다.
‘더럽게 힘드네.’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실상은 당장이라도 드러눕고 싶을 만큼 몸이 고됐다.
용은 시현의 정신력, 축복, 신체 능력 등 그가 구원자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모든 힘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영구적으로 건네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대여라고는 하지만, 그로 인한 여파는 오롯이 시현이 감당해야 했다.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버티고 버티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하려던 찰나.
“그만! 그만해 주세요. 더 이상은 애가 버티지 못할 겁니다.”
감격에 찬, 동시에 다급함이 묻어나는 이재준의 음성이 들려왔다.
도형에서 손을 떼고 비틀거리는 시현을 민서라가 부축해 줬다.
“오오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다른 구원자들의 힘을 빌려 이 애를 성장시켜 왔지만, 단언하건데 이 정도 크기로 성장한 건 처음이에요!”
잔뜩 흥분해서 소리친 이재준은 벅차오르는 감동의 물결을 인내하지 못해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시현의 능력을 받아먹고 성장한 용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자그마하던 용은 3층짜리 상가만한 덩치를 갖게 되었다.
날개를 펴면 넓은 범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질 정도다.
“시작하자.”
이재준이 명령하자 고개를 끄덕인 용은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위풍당당한 자태로 머리 위를 한 바퀴 선회한 용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쩍 벌어진 입 안에 백색의 빛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쿠오오오오!]
우렁찬 포효와 함께 섬광이 쏘아졌다.
엄청난 힘을 내포한 섬광은 보이지 않는 벽을 깨부수며 진격. 특정 구역에 이르러 네 갈래로 나뉘어졌다.
섬광은 정확하게 대전 수목원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에 내리꽂혔다.
멀리서 연달아 네 번의 굉음이 울린 후.
다시 한번 대전 하늘에서 어둠이 걷혔다.
“와아아아아!”
함성이 울려 퍼졌다.
사라진 것은 어둠뿐만이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레벨이 낮은 구원자들의 진입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붉은 비.
태풍이라도 온 것처럼 줄기차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봄날의 이슬비마냥 약해져 있었다.
이 정도 수준으로는 구원자들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돌겨어어억!”
잔뜩 흥분한 참가자들은 시현의 지시가 떨어지기도 전에 붉은 하늘 아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아직 힘이 남아있던 백색의 용은 수목원을 향해 날았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