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Re write의 참가자는 총 666명.
그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어림잡아 400여 명 안팎일 것이다.
아무리 원작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한들 모든 이가 그것을 사용할 수는 없을 테고, 한순간의 실수나 억울할 정도로 부조리한 상황을 만나 목숨을 잃은 참가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남은 참가자들은 원작의 지식을 적극 활용해 많은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원작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영웅들.
빠르게 레벨을 올릴 수 있는 기가 막힌 사냥터.
보통의 방법으로는 구할 수 없는 고품질의 장비 등.
참가자들의 성장은 빨라졌고, 반대로 원작에서 이름을 날린 구원자들의 성장은 대폭 느려졌다.
그에 따른 가치 역시 폭락했고, 참가자들은 그들을 누르고 각 세력의 리더로서 자리매김했다.
그렇기에 최후의 전쟁에서 보다 많은 아군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설득해야 하는데, Re write의 시스템은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참가자는 오로지 상위 열 명 뿐.
나머지 인원은 Re write의 엔딩이 결정되는 순간, 이 세상에 잔류하게 된다.
아무리 목숨이 붙어 있고 악마들이 멸절된 세상이라 한들,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10위권 밑의 참가자들은 자신을 도우려 하지 않을 거라고 시현은 판단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옳았다.
실제로 민서라의 구원 요청에 돌아온 답변은 거절이었다.
말로 하는 거절은 그나마 얌전한 경우에 속했다.
심한 경우 전령을 향한 공격까지 감행한 세력도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시현은 한 가지 묘수를 냈다.
눈앞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존재.
인간이었으나 이제는 보다 높은 영역에 이른 이자프.
정훈과의 타협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너와 아르하가 만든 Re write 시스템은 실패야. 설계부터가 잘못됐어.”
[잘못이라고?]
동의할 수 없는지 이자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표정이나 분위기로 불쾌함을 풍겨대고 있었으나, 시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비어 버린 네 자리를 대신해 줄 인물을 구하기 위해 원 세계에서 참가자들을 꼬여 냈다. 666명이나 되는 인원이 있으니 그 중 한 명만 기준치를 통과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했겠지.”
[…….]
시현의 말이 정답이었기에 이자프는 팔짱을 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기용할 수 있는 재화를, 인과율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모든 힘을 몰아준다 해도 그 한 명이 이 세상을 구원해 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자프는 666명의 참가자를 기용했다.
그중 극소수가 재능을 발휘해 영웅의 영역에 들어선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영웅을 만들어 내기 위한 방법으로 경쟁을 선택한 게 잘못이었어.”
[성장에 있어 경쟁은 필요 불가결한 요소다. 라이벌의 존재는 서로를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어 주지.]
“하지만 그 결과가 어땠지?”
시현은 멀리 있는 붉은 하늘 아래를 가리켰다.
그 아래에는 대한민국 땅에 마지막으로 남은 외신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이 순간에도 힘을 키우고 병력을 부풀리는 중이었다.
본래라면 수 년 후에나 깨어났을 외신이 벌써부터 완전한 힘을 되찾은 데에는 어디까지나 원작 지식을 악용한 참가자 이한울이 있었기 때문이다.
“666명 중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고작 열 명. 그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시스템의 허점을 악용하는 놈이 나타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어.”
[그로 인해 발생하는 변수 역시 상위 랭커들이 해결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설마 상위 랭커가 그런 비이성적이고 비효율적인 선택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예외는 언제나 존재하지.”
아마 이설아가 무난하게 랭킹 10위권 내에 진입했더라면, 이한울도 굳이 외신과 손을 잡는다는 수단은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한울이 너무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갔고, 이설아는 상대적으로 가려졌다.
결국 이한울과 이설아 남매는 이자프가 이해 못할 선택을 했고, 결과적으로 이 사단을 일으켰다.
“결국 우리는 충분히 성장할 만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어. 그렇다면 다른 참가자들과 손을 잡아야 하는데 네가 만든 경쟁 시스템 때문에 아무도 우리와 손을 잡으려하지 않아. 지금 Re write를 끝마치면 이득을 보는 건 나를 포함한 상위 열 명 뿐이니까.”
[…….]
“하다못해 나연이나 강소하 같은 네임드들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참가자들에게 생존을 위한 수단을 빼앗긴 구원자들은 이 전쟁에서 활약하기에 너무 약해. 결국 참가자들의 협력을 어떻게든 구해야 하지만, 시스템 상 그럴 수가 없으니…… 네 설계라도 탓해야지 어쩌겠어.”
동의를 구하는 시현의 질문에 이자프는 한참이나 침묵했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건지 한껏 찌푸린 표정은 자기혐오에 가까워 보였다.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내가 만든 시스템에 의거하면 참가자끼리의 협력은 불가능하지. 하지만 지금의 넌 조력자들을 확보하지 않았나. 보아하니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네게 협력하고 있는 거 같군.]
이자프의 시선이 전장에 모인 구원자들에게 향했다.
그의 말대로 붉은 하늘의 경계에 모여 촉수 괴물들과 대치하고 있는 구원자들의 수는 엄청났다.
거기에 속한 참가자들 또한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
이자프로서는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저들에게 뭘 약속한 건가?]
“아직 정해진 건 아니고…… 이자프, 아니, 정훈. 네게 요구 사항이 있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초월적 존재로 거듭나며 새로이 얻은 이자프라는 이름이 아니라, 굳이 인간 시절 사용하던 이름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듣도록 하지.]
“참가자 전원의 랭킹을 동일하게 만들어야겠어. 그러니 모든 신들…… 그러니까 천사들은 현재 구독 중인 Re write의 구독을 해제할 것. 이게 내 요구 사항이다.”
[……구독을 해제하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요구 사항이었기에 이자프의 눈이 또 한 번 가늘어졌다.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시현은 Re write의 랭킹을 불러들였다.
“보다시피, 요 며칠 동안 참가자들의 랭킹이 급변했어.”
최근 참 많은 사건이 있었다.
하늘이 열리고, 이자프가 강림하며, 외신과의 전투가 있었다.
그리고 상당수의 참가자들이 자신의 권능을 상실했다.
그 결과 구독자의 수가 크게 줄며 랭킹이 추락했고.
그런데 시현은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권능을 잃은 구원자가 추락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야. 흥미를 느낄 요소가 더 이상 없으니까. 하지만 멀쩡한 구원자의 랭킹이 갑자기 폭락하는 경우가 몇 개인가 있었지. 어떤 이유에서인지 구독자의 수가 떨어져있더군.”
Re write에서 구독자의 수가 늘어나는 경우는 있어도 줄어드는 경우는 그리 없다.
읽던 소설에 싫증 났을 경우 굳이 찾아가서 구독을 해제하기보다는 그마저도 귀찮아 방치해 놓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 며칠 동안은 이상하리만치 구독 해제 수가 폭증했다.
시현의 Re write에서도 많은 구독자가 빠져나갔다.
외신을 쓰러뜨렸기 때문에 구독자 수가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줄어든 것은 구독자 수만이 아니었다.
“보아하니 저기 하늘에 있는 균열 너머의 공간에서 무언가 사고가 있던 거 같은데……. Re write의 시스템에 이 정도로 영향을 끼칠 만큼 큰 사고.”
[놈이 쳐들어왔다.]
“놈?”
[내가 열어 놓은 저 문을 통해 기어 올라갔더군.]
“……제정신인가?”
시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자프의 말인 즉, 대전의 중심부에 있는 외신이 혈혈단신으로 적진 한복판에 파고들었다는 소리다.
아무리 악마가 천사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사바나의 제왕인 사자도 하이에나 무리에게 둘러싸이면 꼬리를 내리고 도망가는 법이다.
그런데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인 천사들이 득실거리는 장소에 스스로 들어가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솔직히 나도 그 소식을 들을 때는 놈의 정신을 의심했지. 하지만 아니었어. 놈은 ‘천사는 인간을 해할 수 없다.’라는 규칙을 교묘하게 이용하더군.]
현재 외신은 이한울과 합쳐진 상태다.
본래라면 인간에 불과한 이한울은 육신이건 영혼이건 할 것 없이 외신에게 삼켜졌을 것이다.
하지만 외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겪은 패배를 뒤집기 위한 패로 이한울을 선택한 것이다.
천사들이 인간을 택했듯이.
[내가 너에게 간접적으로 진실을 알려 준 걸 조금은 후회하는 중이다. 그게 그 정도 규모로 인과율은 건드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천사들이 대량으로 죽어 나간 게 마음에 걸렸는지, 이자프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시현에게는 그의 마음에 공감해 줄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자프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뭐, 네가 궁금한 건 이게 아니겠지.]
“내가 궁금한 건 이거야. 구독자가 줄어들면 해당 구독자가 늘려 놓은 조회 수 또한 함께 빠져나가는 거 맞지?”
[대단한 비밀도 아니니 말해 주지. 네 말대로 구독을 취소하면 그동안 쌓은 조회 수 또한 함께 빠져나간다. 이건 내 설계 미스라고 할 수 있지. 나름 순위를 뒤집을 수 있는 한 방을 준비할 생각이었는데, 멍청한 생각이었지.]
“기뻐하지 그래? 그 멍청한 선택이 지금의 상황을 뒤집을 한 수를 만들었는데.”
시현은 Re write가 처음 시작될 때를 떠올렸다.
막 게임이 시작되던 때라 구독자를 가진 참가자도 적었고, 조회 수 또한 평균 한 자리, 많아 봐야 두 자리를 기록하고 있을 때.
랭킹에는 동률이 꽤나 많이 존재했다.
공동 1위가 세 명이 있으면 그 다음 순위는 4위.
이런 식으로 말이다.
“즉, 모든 참가자들의 구독자, 조회 수가 0을 기록한다면, 랭킹 또한 동률이 되지 않겠어?”
시현은 이자프를 바라보며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답을 요구했다.
반드시 이 추측이 정답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의 일이 상당히 피곤해질 테니까.
[…….]
약 1분 정도 이자프는 침묵했다.
그 1분이 시현에게는 10분,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이자프는 입을 열었다.
[잔꾀를 부리는군…… 하지만 네 말이 맞다. 모든 구독자, 조회 수가 0을 기록하면 너희들의 랭킹은 1로 동률이 되겠지.]
그로부터 확답을 얻은 시현은 크게 안도했다.
자신의 추측이 정답일 가능성이 높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100%가 아닌 이상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 시현의 추측이 맞았다.
즉, 이자프를 비롯한 천사들의 협력만 이끌어 낼 수 있다면, 다른 참가자들의 도움 또한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나저나 너도 참 대단하군.]
이자프는 웃었다.
조롱이나 멸시 따위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였다.
살아남은 참가자 전원이 랭킹에 들어간다.
상당히 재미있고 유쾌한 아이디어 아닌가.
마음 같아서는 기꺼이 시현의 제안에 협력하고 싶었다.
그 역시 인류가 보다 나은 미래를 쟁취하기를 원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전 인원 공동 1위는 불가능하다. 약속한 특전을 전원에게 지급하는 것은 인과율이 허가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생각만큼 전능하지 않아. 뭘 하던 제약과 족쇄가 뒤따르지. 하지만…….]
이자프의 입에서 나온 부정적인 견해들에 심장을 졸이고 있던 시현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에 나온 하지만이라는 단어가 그리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방법은 존재한다.]
“무슨 방법이지?”
[그건 우선 빌어먹게 콧대 높은 천사들을 설득한 후 말해 주마. 아니…… 때가 되면 딱히 내가 말해 주지 않아도 너 스스로 알게 되겠지. 걱정하지 마라. 설득이 안 된다면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할 생각이다. 나는 네 제안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이자프는 자취를 감췄다.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져 버린 그의 자취를 쫓던 시현은 웃었다.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는데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약속한 것처럼 이자프는 어떻게든 천사들의 협력을 받아 올 것이다.
이젠 더 이상 망설일 게 없었기에 시현은 지상으로 내려갔다.
허리춤에 매어 둔 흑색의 검을 멋들어지게 뽑아 드는 시현의 몸에 검은색의 기류가 맺혔다.
모든 구원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것을 확인한 시현은 웃으며 말했다.
“협상 완료.”
여러 가지 의미에서 불안에 떨던 참가자들의 얼굴에 꽃이 피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