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어느 폐건물의 옥상.
위태롭게 난간 위에 걸터앉은 시현은 멍하니 특정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전장치도 없이 그런데 앉아 있으면 무섭지도 않아요?”
배후에서 민서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그녀는 문 옆에 서서 주춤거리기만 할 뿐 시현에게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사람이 개미만큼 작게 보이는 높이는 고소공포증을 가진 그녀에게 어지간히도 두렵게 느껴졌을 것이다.
늘 다른 이들에게 어머니, 혹은 큰누나 같은 포지션을 고수하던 민서라가 보이는 의외의 모습에 시현은 작게 웃었다.
“하늘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린 시현은 재차 정면을 바라봤다.
단순히 감성에 취해서 하늘을 보고 있던 게 아니다.
붉게 물든 대전의 하늘.
가고일이 지키고 있던 네 개의 웅덩이를 파괴한 후 대전의 하늘은 구멍이 숭숭 뚫린 솜사탕처럼 원래의 색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계속해서 범위를 넓혀 가던 붉은 하늘은 기세를 잃고 주춤거렸으며, 빗줄기와 어둠 또한 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점점 영역을 넓혀 가던 푸른 하늘이 재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푸른색이 거의 사라진 상황이다.
여기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자리를 비운 외신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거겠지.’
바꿔 말하자면 외신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대전의 하늘 아래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된다.
모처럼 전쟁을 위해 다수의 구원자들을 모았는데 써먹을 수 없게 되다니.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세요?”
민서라는 높은 곳을 무서워한다.
그런 민서라가 무서움을 이겨 내고 옥상까지 왔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아니, 그 사람을 손님이라 해야 할지 의문이기는 하지만…….”
민서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옥상의 문 너머에서 소란이 일었다.
“저리 비켜! 직접 만나서 이야기한다고 했잖아! 뭐가 이리 꽉 막혔어?”
“그러니까 오빠의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안 된다고 했잖아, 이 원숭이 새끼야!”
“뭐, 뭐? 원숭이?!”
옥상으로 진입하려는 남자의 목소리와 그것을 저지하려는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
목소리들의 주인이 대강 누구인지 알아차린 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연아, 문 열어 드려.”
“네!”
시현의 허락이 있자, 이나연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던 옥상 문을 열었다.
그러자 상당히 화가 난 것인지 얼굴을 붉히고 씩씩거리는 한 남자가 들이닥쳤다.
건장한 체구, 군복 차림에 짧게 자른 머리, 그리고 어깨에 붙어 있는 23사단 마크, 목깃에 자리한 소령 계급장.
자기소개는 없지만, 시현은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23사단의 리더이자 참가자인 정대한이다.
“윤시현!”
두리번거리던 그는 시현을 발견하자마자 그를 잡아먹을 기세로 다가왔다.
“음…… 일단 조금 진정하시는 게 좋을 거 같네요.”
그런 정대한의 앞을 민서라가 가로막았다.
이번에 대량의 악마들과 싸우며 레벨이 올라간 민서라는 정대한보다 한 수 위에 있었다.
힘에서 밀린 정대한은 어쩔 수 없이 성질을 가라앉혔다.
“윤시현.”
시현을 부르는 목소리가 확실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상대가 대화할 준비를 마쳤음을 확인한 시현은 돌아앉아 그를 마주 봤다.
“이야기에 앞서, 우선 도움을 주기 위해 구원자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와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그래.”
정대한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현에게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테크노벨리 사건으로 인해 세력이 크게 줄어든 것도 원인이었지만, 무엇보다 큰 원인은 그가 10위권 내에 들어가지 못한 참가자라는 것이다.
그로서는 Re write의 엔딩을 보려 하는 시현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목숨을 위협하는 원수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현의 전쟁을 돕기 위해 소속 구원자들을 이끌고 대전으로 찾아왔다.
그 이유는 시현에게 받은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다.
“피차 바쁠 테니 긴 말은 하지 않겠어. 편지에 적혀 있는 내용…… 믿어도 되는 건가?”
조심스럽게 내뱉은 말에는 숨길 수 없는 간절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장난칠 만큼 시현의 성격은 모나지 않았다.
“편지에 적었듯이 어디까지나 협상에 성공하면입니다. 협상이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고, 애초에 지금 상황이면 협상 테이블에 상대방을 앉힐 수나 있을지…… 그것부터 걱정해야겠군요.”
“하지만 협상에 성공할 자신은 있는 거지?”
“물론입니다.”
시현은 듣고만 있어도 가슴 한편이 든든할 만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희들 이상으로 애가 타고 있는 건 그 인간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알겠다. 내가 이끄는 23사단을 포함해 강원도 지역에 위치한 아홉 개 세력 전부 네 전쟁을 돕겠어. 네가 그 자와 협상에 성공한다면 그 때부터 지휘권을 넘기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는 내가 해야겠지.”
약속을 받아 낸 정대한에게서는 독기가 많이 빠져 있었다.
언제 시현을 향해 으르렁거렸냐는 듯 얌전해진 정대한이 옥상을 빠져나갔다.
“들어올 때와 나갈 때의 태도가 엄청 다르네요.”
“그러게요.”
시현과 민서라는 마주 보며 웃었다.
23사단을 선두로 한 강원도 소속 아홉 개 세력.
수도권에 위치한 세력에 비해 소속되어 있는 구원자의 강함은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머릿수는 제법 많은 편에 속한다.
그들은 전쟁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 줄 것이다.
“그래도 어렵지 않게 설득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는 믿지 못하겠다고 뻗대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뭘 벌써부터 안심하고 그래요. 아직 만나야 할 세력의 리더들이 잔뜩 남아 있는데.”
“음…… 뭐, 어떻게든 되겠죠.”
“……그나저나 시현 씨가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시현을 바라보는 민서라의 시선은 대체로 호의적이다.
그러나 오늘은 유난히도 그 정도가 심했다.
호의를 넘어 추종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녀 역시 시현으로부터 편지에 대한 내용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같이 성공하면 좋잖아요. 아, 또 도착했네요.”
막 구원자들이 집결해 있는 장소로 들어오는 다수의 차량을 확인한 시현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 민서라가 보낸 편지에는 꼼짝도 하지 않던 전국 각지의 참가자들.
그러나 시현이 보낸 편지를 받은 그들은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대전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다.
시현의 시선은 저 멀리, 아직까지도 열려 있는 하늘로 향해 있었다.
* * *
아직 붉은 하늘이 닿지 않는, 흰 구름이 넘실거리는 대전의 푸른 하늘 아래에서 구원자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물자를 확보하고 작전을 수립하며 최상의 상태로 전쟁에 임할 수 있도록 컨디션을 조절하는 등.
전쟁의 준비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어? 어어어?”
모두 각자의 할 일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 누군가가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극도로 당황한 듯한 목소리에 놀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그들은 정면의 붉은 하늘 아래에 모여 있는 다수의 촉수 괴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놈들은 붉은 하늘과 푸른 하늘의 경계에 모여서 마치 구원자들에게 위협이라도 가하듯 촉수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소식은 빠르게 시현에게로 전달되었다.
또 다시 옥상에 자리를 잡은 시현은 눈을 찌푸린 채 촉수 괴물들의 동향을 살폈다.
“설마 병력을 모으고 있는 건가?”
촉수 괴물 역시 어느 정도 지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다.
기껏해야 강하거나 다수인 적을 상대하기 위해 서로 뭉칠 줄 아는 정도.
지금처럼 특정 지역에 모여들어 위협을 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해 지금의 현상은 누군가에 의해 강제되고 있다 봐도 무방하다.
그 누군가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보아하니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는데, 가만히 방치해 둬도 괜찮은 건가요?”
옥상으로 올라온 시현의 뒤를 당연하다는 듯 따라온 이나연이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촉수 괴물들은 실시간으로 경계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지금이야 열 마리 남짓이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수십, 수백에 달하는 수가 모여들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적의 수가 많지 않은 지금 공격하는 게 이상적이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효율을 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재 지휘권은 시현이 가지고 있다.
즉, 시현의 명령 한마디만 떨어지면, 대기하고 있는 구원자들은 겁도 없이 도발을 감행하고 있는 촉수 괴물들을 향해 공격을 퍼부을 것이다.
대전에 모인 모든 구원자들은 당연히 명령이 떨어질 거라 믿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여 준 행적에 의하면 시현은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대기합니다.”
누가 봐도 황금 같은 기회이건만, 시현은 대기를 명령했다.
“대기라고? 도대체 왜…….”
“지금이 아니면 놈들이 더 모여들 거고, 그만큼 전투가 힘들어질 거야. 지금이라도 수를 줄여 놔야 하는데 도대체 왜?”
“윤시현이 그 정도 판단도 못 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었나?”
구원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한 번 시작된 의심은 시현의 지휘관으로서의 자질까지 의심받게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촉수 괴물들은 점점 모여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캬아아악!]
하늘 위에서 한 무리의 날개 가진 악마들이 날아들었다.
놈들은 한껏 긴장하고 있는 구원자들에게 날아드는 대신 붉은 하늘 아래로 진입했다.
자신들의 무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장소를 향해 일말의 주저도 없이 몸을 던진 것이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자유로이 하늘을 날던 악마들은 가장 선두에서 날던 놈부터 시작해 하나 둘 지상으로 추락했다.
붉은 비의 효과로 인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목숨을 잃은 악마 전원이 촉수 괴물로 재탄생했다.
“…….”
아군의 목숨을 깎아, 보다 강한 병력으로 만들어 내는 광경을 눈으로 목격한 구원자들은 하나같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무겁고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다수의 악마들이 붉은 지역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것이 목격됐다.
“윤시현! 정말 계속 이대로 기다리고만 있을 거야? 밑의 구원자들은 이미 전투준비가 끝난 상황이라고!”
결국 참다 못 한 한기훈이 옥상까지 올라와 소리를 질렀다.
이 땅에서 외신과 악마들을 몰아내기 위해.
자신들이 살아갈 세상에 평화가 찾아오게끔 하기 위해.
LT마트의 구원자들을 이끌고 전쟁에 참가를 선언한 한기훈이다.
적의 수를 소모 없이 대거 줄일 수 있는 이 천금 같은 기회에 미동조차 않는 시현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현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점점 모여드는 악마의 수가 늘어났고, 그만큼 촉수 괴물의 수도 증가했다.
더 이상 피해 없이 촉수 괴물을 토벌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을 때.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머리 위에서부터 뇌리에 파고드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분노한 듯한 음성에 시현은 웃으며 머리 위를 올려다봤다.
저 하늘 높은 곳에서부터 분노로 점철된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자프.
이전에는 정훈이라 불린 남자가 다시 한번 지상에 강림한 것이다.
그가 내뿜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옥상에 자리하고 있던 이나연, 한기훈 등은 반대편 끝까지 달아나 겨우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반면 시현은 마냥 여유로웠다.
“어서 오고.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네.”
그 모습에 이자프는 이를 갈며 이마를 짚었다.
인간 이상의 존재로 격이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버릇은 그대로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이자프와 만나는 건 이걸로 두 번째였으나 원작에서 끊임없이 그의 이름이 언급되기 때문인지, 이상하리만치 낯익게 느껴졌다.
여유로운 모습의 시현과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답답해하는 구원자들.
그리고 시시각각 세를 부풀리고 있는 촉수 괴물들.
그것들을 번갈아가며 눈에 담은 이자프가 입을 열었다.
[너에게도 생각이 있겠지. 어디 이유를 말해 봐.]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