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흐음…….]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표정에 숨길 수 없는 불쾌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 위를 올려다봤다.
빌어먹을 천사들이 지상에 강림하기 위해 열어 둔 통로.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표정에 드러나는 불쾌함이 한 층 더 심해졌다.
이쯤 되면 그 감정은 불쾌함을 넘어 혐오에 도달해 있었다.
[어째서지? 조금만 더 하면 그 년의 목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목소리에는 불만이 가득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어지는 목소리에는 분노를 잠재우려는 듯한 차분함이 담겨 있었다.
[소모가 너무 심했다. 그리고 이자프는 건재한 상태였지. 이 이상 힘을 소진하면 앞으로가 곤란해진다. 무엇보다…… 아르하를 죽인다 해서 당장 그 여자가 가지고 있는 권능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 한 건 너다. 그렇다면 의미 없는 짓이다. 오히려 살려 둬서 이득을 취해야 한다.]
이어지는 침묵.
남자는 반쯤 눈을 내리깐 채 이어지는 자신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입이 열렸다.
[어째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대천사 아르하보다 버러지들에게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군. 권능을 잃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자들 아닌가.]
[기억해라. 너희는 한 번 패배했다. 그렇기에 정훈을, 그리고 인간을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고 있지. 그래서 나와 손을 잡은 것 아니었나? 나를 완전히 흡수하지 않고 내 의지를 남겨 두었지. 무엇보다 원하는 것은 충분히 이루지 않았나.]
남자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새빨간 피로 물든 손에는 붉게 얼룩진 깃털이 달라붙어 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떼어 내 땅에 내버렸다.
깃털의 끝부분에 남은 새하얀 부분이 원래의 색상이 어떠했는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많은 구원자들이 힘을 잃었다. 예언자도 힘을 잃고 머지않아 인도자의 힘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만한 상처를 입었다면 아르하의 숨도 머지않아 끊어지겠지.]
[그건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전쟁에 직접 참가하지는 못하겠지. 권능을 잃는 구원자는 계속해서 많아질 거고. 그들은 아군의 발목을 붙잡을 거다. 아르하 역시 이자프의 발목을 붙잡을 거다. 저 문이 존재하는 한, 우리의 방문을 두려워한 아르하가 이자프를 곁에 묶어 둘 테니까.]
[그때, 아르하의 숨통을 끊으려던 내 움직임을 막은 것은 그게 목적이었나?]
남자는 웃었다.
[지금 인류는 외신을 막을만한 힘이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사들의 도움이 필요 불가결. 하지만 천사들은 인류 따위를 생각하고 있을 겨를조차 없어졌지. 기뻐해라.]
그 미소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을 앞에 두고 있을 때 간간히 보여 주던 이한울의 미소와 몹시 흡사했다.
[승리의 때가 도래했다. 남은 건 천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이 땅에 개입하기 전에 날개 달린 것과 힘을 합쳐 이 땅에 종말을 선언하는 것뿐이다. 지금의 인류는 거기에 저항할 힘을 갖추지 못했다. 그렇게 되면…….]
남자는 눈을 감았다.
[윤시현도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눈을 감겠지.]
그가 원하는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윤시현.
그 원수의 목숨을 빼앗는 것.
그냥 빼앗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최대한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분해서 울부짖다가 서서히 죽어나가는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
천만 다행이도 그 때가 머지않았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어이가 없군.]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감정은 분노였다.
[조금 전 동포 하나가 당했다. 기껏 먼 곳에서 데리고 온 애완동물까지 죽었다. 이상한 일이군. 분명 인류에게 우리를 상대할 만한 힘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하지 않았나?]
[…….]
남자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허공을 응시하는 두 눈동자는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끝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바닥을 적셨다.
* * *
“헉…… 허억…… 와, 나…… 씨…….”
시현은 거칠게 숨을 토했다.
체력은 한계를 넘은지 오래였다.
사실상 지금까지 시현의 몸을 움직이게 한 것은 체력이 아니라 정신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하지만 이렇게 개고생을 하는 것도 드디어 끝이 났다.
[나는 또…… 이렇게 패배하는가…….]
외신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힘을 상징하는 날개는 모두 잘려 나갔으며, 심장에는 커다란 대검이 꽂혀 있었다.
외신은 죽지 않는다.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해도, 모든 날개가 잘려나갔다 해도 긴 시간동안 잠에 빠질 뿐.
인간이 가진 무기로는, 기껏해야 신의 탈을 쓴 천사들에게 빌린 힘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하지만 신을 죽이는 자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대검을 이용해 심장을 찌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무기 중에서도 외신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무기다.
[……원통하군.]
그 말을 끝으로 외신은 눈을 감았다.
놈이 두 번 다시 눈을 뜨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생각보다 더 추하게 굴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고 버티던 시현은 결국 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보면 시현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계속해서 아군의 부상을 돌봐 준 한소현.
사슬을 이용해 외신의 움직임을 방해한 강소하.
인도자의 권능을 이용해 아군으로 하여금 올바른 길을 제시해 준 이찬열.
비록 능력 부족으로 근접전을 할 수는 없었지만, 권능을 이용해 끊임없이 외신의 이목을 앗아간 민서라까지.
모두가 체력이나 정신력을 한계까지 사용한 상황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시현의 말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입을 열고 성대를 쥐어짜 내는 것조차 힘들었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가까스로 생존 신고만 하는 게 전부였다.
‘아…… 한숨 푹 자고 싶다.’
몸이 너무 고됐다.
마음 같아서는 노숙이건 뭐건 이대로 눈을 감고 푹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외신은 끝을 냈지만, 아직 외신이 불러들인 악마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추가적으로 악마들이 몰려들지는 않겠지만, 이미 이 자리에 모여든 놈들은 본능적으로 인간을 향해 달려들 테니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놈들을 처리할 만한 체력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지?”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켜 전장을 확인한 시현은 침음을 삼켰다.
악마들의 수는 많았고, 거기에 대응하는 아군의 수는 극도로 적었다.
시현 일행과 등대에서 뽑은 소수의 정예 멤버.
그들 역시 시현이 마음 놓고 외신과 싸울 수 있도록 악마들과 사투를 벌인지라 체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어도 퇴로가 꽉 막혀 있는 상황.
어떻게 해야 지금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경이로운 존재를 토벌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구원자로서 의무를 다한 당신에게 합당한 보상이 지급됩니다.
<이자프의 각인. 7차 해금 완료.>
<이자프의 축복을 받아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됩니다.>
<처형의 권능을 사용했을 때, 무기 공격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권능이 악한 기운으로부터 사용자의 전신을 보호합니다.>
<아르하의 각인. 6차 해금 완료.>
<총 열두 개의 권능을 모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와.”
너무 지치고 고된 나머지 깜빡 잊고 있었다.
상대는 외신이다.
소형, 중형 악마 나부랭이가 아니라, 모든 악마를 통솔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존재를 토벌한 것이다.
당연히 보상이 없을 리가 없다.
그 보상이 가벼울 리도 없고.
하지만 이제 막 6레벨 구원자가 된 터라 7레벨이 될 거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럴까.
느껴지는 감동은 이루 말할 데가 아니었다.
“결국 내가 여기까지 오는구나.”
드디어 도달했다.
원작에서도 단 한 사람만이 도달한 영역.
사실상 천사들과 동격의 힘을 갖게 된다는 그 영역에 말이다.
시현은 몸을 일으켰다.
완전한 건 아니지만 레벨이 오른 덕분인지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되었다.
비단 시현뿐만이 아니었다.
외신을 토벌하는데 일정 수준 이상으로 기여한 멤버 전원이 어느 정도의 보상을 받았다.
아마 5레벨로 올라선 이도 존재할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 다들 어느 정도 회복된 거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위험할 것 같으니 일어들 나시죠.”
“으으…….”
시현의 말에 일행은 싫은 표정을 하면서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시현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기다리는 것은 다 같이 사이좋게 공멸하는 것뿐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이제 퇴로를 확보해야 하는데…….’
바닥을 치던 체력을 어느 정도 확보했다고는 하지만, 여유로운 수준은 아니다.
그래도 한 점 돌파를 잘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기는 하다.
문제는 이 순간에도 건물 어딘가에 남아 있을 생존자들이다.
외신이 죽었으니 그들 역시 공포에서 벗어났을 터.
어떻게든 건물의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는 중이지만, 여기 모인 구원자들이 빠져나가면 그들은 꼼짝없이 악마들의 먹이가 되고 말 것이다.
그들을 구해서 함께 공주시를 벗어나야 하는데, 일행들의 체력을 계산해 보니 과연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어쩔 수 없나.’
시현은 아랫입술을 강하게 씹었다.
지금까지 어떻게든 그들을 살리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그 노력은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그렇다고 생존자들을 살리기 위해 여기 모인 구원자 전원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는 노릇.
비정한 결정을 내린 시현이 막 명령을 입 밖으로 내놓으려던 찰나였다.
“어? 트럭?”
민서라가 북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를 따라 북쪽으로 시선을 옮긴 시현의 눈에 보인 것은 앞을 가로막는 악마들을 들이받으며 질주해 오는 다수의 군용 트럭이다.
트럭에는 인천연합을 상징하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공주시에 도달한 것은 인천연합의 트럭만이 아니었다.
다수의 구원자를 태운 버스와 차량들이 그 뒤로 줄줄이 달려오고 있었다.
LT마트, 교회 등 수도권에 위치한 동맹 관계의 세력들이 소식을 듣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공주시에 도착한 것이다.
그중에는 당연히 시현의 세력도 함께하고 있었다.
“와…… 살았다.”
마음 깊이 안도한 시현은 드디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비인륜적인 결정을 할 뻔했다고 생각하니, 고동이 평소보다 몇 배는 빨라져 있었다.
“와아아아아!”
절망적인 싸움을 강요받고 있던 구원자들 사이에서도 함성이 올라왔다.
지원군의 도착을 확인한 구원자들은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악마들을 밀어냈다.
“싹 다 쓸어 버려!”
한기훈을 필두로 트럭에서 내린 구원자들이 악마들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앞, 뒤.
양쪽에서 공격을 받게 된 악마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우어어어!]
아직까지도 남아 있던 대형 악마 한 마리가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다.
아무리 아군의 수가 많아도 대형은 홀로 전황을 뒤집을 힘을 가진 괴물이다.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싶던 시현은 처형의 권능을 사용했다.
“……어?”
그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늘 무기에만 맺혀 있던 검은 기운이 전신으로 옮겨진 까닭이다.
물론 당황한 것은 잠시뿐이었다.
금방 자신의 변화에 익숙해진 시현은 땅을 박찼다.
“이런 미친!”
무의식적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5레벨과 6레벨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지만, 6레벨과 7레벨 사이의 격차는 그보다 훨씬 심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강해진 자신의 육신에 적응하지 못해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대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속도면 속도.
힘이면 힘.
모든 게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시현은 낯설게만 느껴지는 자신의 육체를 컨트롤하려 용을 쓰면서 대형 악마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촤악!
시원하게 휘둘러진 검에 대형 악마는 제대로 힘을 써 보지도 못하고 머리가 잘려 나갔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