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모든 준비를 끝마친 시현은 공간을 도약했다.
그가 나타난 곳은 잠시 공격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데스피어의 머리 위였다.
자신의 머리를 누군가가 밟는 느낌이 들었는지, 데스피어는 덩치에 비해 한없이 작은 눈동자를 굴렸다.
시현과 눈이 마주치자 데스피어는 펄쩍 뛰며 그를 떨어뜨리려 했다.
막강한 공격력에 비해 한없이 나약한 내구를 가지고 있기에, 데스피어는 누군가에게 공격당하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러나 고작 몸을 흔드는 것 정도에 나가떨어질 시현이 아니었다.
“초대형 주제에 외피도 없다니. 어떻게 되먹은 놈인가 싶네. 하긴, 이 정도 고도를 올라올 수 있는 생물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데스피어가 날고 있는 고도는 상당히 높다.
산소가 어찌나 희박한지 제대로 호흡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정도다.
만약 시현이 구원자가 아니었다면 산소 농도의 저하로 인해 의식을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꾸물꾸물.
데스피어가 급격히 몸을 떨었다.
그러자 놈의 피부로부터 끈적이는 액체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예의 강한 산성을 품은 독액을 몸에 발라 시현을 떨쳐 내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시현은 데스피어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핏빛 구슬로부터 뿜어져 나온 피가 허공에 거대한 창을 만들어 냈다.
본래 강소하의 권능은 피를 이용해 다양한 것을 할 수 있었다.
주로 사슬을 이용하는 것은 그 편이 가장 피의 소모 면에서 효율이 좋기 때문이지, 사실상의 활용법이 무궁무진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대형 정도 되면 시현이 가진 무기로는 어떻게 해도 치명상을 입히기 어렵다.
아무리 승리의 영광을 이용해 검신을 늘린다 한들 엄연히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시현은 강소하로부터 빌린 권능을 이용, 한계까지 모은 피를 이용해 길고 날카로운 창을 만든 것이다.
길이가 무려 30여 미터에 달하는 창은 제아무리 초대형이라 한들 두꺼운 피부를 뚫고 심장에, 뇌에 틀어박힐 것이다.
“죽어라.”
완성된 피의 창이 데스피어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데스피어가 피할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피의 창이 막 데스피어의 두개골을 꿰뚫으려는 순간.
[으하하하하!]
기분 나쁜 웃음소리와 함께 화염의 방패가 창의 진격을 가로막았다.
방패로부터 시작된 불꽃은 창 전체를 덮어 버렸고, 피로 만들어진 창은 고열을 버티지 못하고 죄다 증발해 버렸다.
시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유유히 허공을 날고 있는 외신이 있었다.
[어리석고 미개한 자여. 네놈의 생각을 내가 읽지 못할 거라 생각했나? 우습고 오만하구나.]
외신은 아주 유쾌하고 즐거워서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웃어댔다.
어떻게든 품위를 지키려 노력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말이다.
만약 이 자리에 지켜보는 이가 없었다면 배를 잡고 바닥을 구르며 웃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눈물이라도 참고 있는지 고개를 숙이고 부르르 떨고 있는 시현을 보며, 외신의 미소가 더욱 커졌다.
[네놈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회심의 한 방을 노린 계획이 물거품 되었는데. 기분이 어떤지 알고 싶군.]
“기분이 어떠냐고? 당연한 거 아니야?”
시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을 확인한 외신은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놀랍게도 시현이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지만 똑똑한 줄 알지. 미안한데 당연히 네가 막으러 올 거란 걸 알고 있었거든?”
[…….]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운 외신은 시현을 노려봤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든 알아내야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놈은 모르고 있었다.
이미 시현의 계략은 성공했고, 상황은 뒤집어졌다는 것을.
[오오오오오!]
데스피어가 크게 울부짖었다.
일정한 고도를 유지하고 있던 데스피어의 거구가 서서히 지상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외신의 표정 관리가 무너졌다.
현재 외신은 갑자기 데스피어가 저러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현은 살짝 손끝을 움직였다.
그러자 데스피어의 가슴을 뚫고 거대한 피의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한 외신이 분노했다.
[이 건방진 놈! 감히 나를 속이다니……!]
“겨우 이 정도에 속아 넘어가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시현은 그를 조롱했다.
시현이 한 짓은 실로 간단했다.
머리 위에서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 척을 하며 외신을 끌어들인다.
그 때 이미 시현은 피의 절반을 데스피어의 그늘 아래 숨겨 놓았다.
외신이 데스피어를 지켜 주기 위해 놈의 머리 위로 이동했을 때, 숨겨 놓은 피를 이용해 새로운 창을 만들어 데스피어의 밑에서부터 올려 찌른 것이다.
그 결과 창은 시원스럽게 데스피어의 심장을 뚫었다.
[네놈, 네놈이 감히 나를 우롱하다니! 아주 비참할 정도로 때려 죽여주마!]
“그러게 왜 방심을 하고 그래.”
추락하는 데스피어 위에 선 시현은 두 손으로 신을 죽이는 자를 쥐었다.
[……!]
분노에 몸을 맡겨 달려들려던 외신은 멈칫하고 말았다.
조금 전과 비교해 시현의 몸에서 느껴지는 힘이 급격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시현은 그에게 있어 가지고 놀기 쉬운 장난감에 불과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약자였다.
그러나 지금의 시현은 아니었다.
힘의 총량을 비교하면 여전히 외신이 우위에 있지만, 그는 경우에 따라 외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다.
[설마…… 그렇군. 데스피어를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었단 건가.]
자신의 방심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확인한 외신은 견디지 못하고 분노의 불길을 태웠다.
“역시 초대형이라 그런지 장난 아니네.”
<이자프의 각인. 6차 해금 완료.>
<이자프의 축복을 받아 신체 능력이 향상됩니다.>
<권능을 최대한으로 사용했을 때 이자프의 능력 일부를 몸에 담아낼 수 있습니다.>
5레벨 구원자의 힘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 봐야 외신에게 닿을 수 없다.
하지만 6레벨 구원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외신이 말한 것처럼 시현이 온갖 수단을 총동원해 외신을 속이고 데스피어를 죽인 것은 어디까지나 과정에 불과했다.
그의 목표는 초대형인 데스피어를 사냥해 막대한 양의 경험치를 독식하고, 이를 통해 6레벨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즉, 외신과 싸우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하는 것.
이게 시현의 목적이었다.
“이제부터는 조금 아플 거다.”
[하여간 인간이란 것들은 옛날부터 그랬어. 주제를 모르지.]
외신의 두 눈동자가 타오르듯 빛을 뿜어 댔다.
* * *
공주시에서 발생한 인간과 악마의 존속이 걸린 전쟁.
그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공주시에 도착한 인물은 한소현이었다.
사실상 부산 인근 지역의 세력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시피 했다.
대부분을 한소현의 등대가 흡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서라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세력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원군을 요청하는 동안, 배불리 식사를 하고 체력을 되찾은 한소현은 할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고민 끝에 전령 및 전투가 불가능해진 나머지 인원을 놔두고 공주시로 향한 것이다.
“너까지 따라올 필요는 없었는데.”
한소현은 일행 중 유일하게 전투 능력이 없는 김영운을 보며 말했다.
“리더 말 뜻 알겠음? 쓸모도 없는 사람이 여기까지 오면 방해만 된다는 소리임.”
“…….”
유서인의 조롱에도 김영운은 꽉 말아 쥔 주먹만 부들부들 떨어 댈 뿐 이렇다 할 반응은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이 방해만 된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따라온 이유는 마지막 전쟁을 통해 인류의 운명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 자신의 눈으로 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
한소현은 은근슬쩍 유서인을 노려보며 김영운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의 것이던 무언가를 상실하는 아픔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Re write에 참가까지 한 것이었고.
다행이도 김영운은 자신의 감정을 잘 컨트롤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시현 씨가 걱정입니다. 상대는 외신…… 그때 인천의 수해에서 본 끔찍한 괴물과 동격의 존재입니다. 솔직히 완전히 봉인이 풀린 외신을 상대로 시현 씨가 잘 버텨 주고 있을지조차 걱정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네 리더는 내가 아닌 윤시현인 줄 알 거야.”
“아니, 뭘 그런 걸로 질투를 하고 그러십니까.”
입을 삐죽 내미는 한소현을 보며 김영운은 마음껏 웃었다.
그러나 사실은 조금 찔리는 구석도 있었다.
김영운의 리더는 한소현이다.
이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쭉 김영운은 한소현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그는 이번 전쟁의 주인공이 한소현이 아닌 시현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놓고 비교해 봤을 때, 많은 분야에서 한소현이 우위를 점한다.
따르는 구원자들의 수, 세력의 강함과 크기, 이끄는 자로서의 카리스마, 부하들을 돌볼 줄 아는 다정함, 그리고 필요할 때는 내칠 줄 아는 냉정함.
한소현은 모든 것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
무력만큼은 시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리더로서의 자질보다 개인의 무력이 중요한 때다.
그렇기에 김영운의 시선은 한소현이 아닌 시현에게 향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시현 씨가 계신 곳까지 이동하도록 하죠.”
시현에게 어느 정도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 권수용이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언제까지 떠들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막 이동을 하려던 찰나였다.
[끼아아악!]
하늘로부터 익룡 비슷하게 생긴 악마가 기습적으로 공격해 왔다.
하필이면 노리는 인물이 김영운이다.
“아……!”
반사적으로 반격을 하려던 김영운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크게 당황해했다.
습관적으로 뽑아 든 검이 말도 안 되게 무거운 탓이었다.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처럼 몸이 따라 주지를 않았다.
그렇게 채 전투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이미 악마는 김영운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김영운은 눈을 감았다.
콰직!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신체 어디에서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아?”
한소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지켜 준 것이다.
“……괜찮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작 소형 악마에게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무척이나 비참하고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런 김영운의 심정을 모르는 게 아닌지라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 그와 견원지간인 유서인조차 눈치를 살폈다.
한소현 일행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전장으로 향했다.
“덥다.”
오랜 침묵을 깨뜨린 이는 유서인이었다.
유난히 옷을 두껍게 입고 있던 그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외투를 벗었다.
“그야 더울 수밖에.”
혀를 찬 권수용의 시선이 정면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불지옥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에서는 계속해서 화염비가 내렸으며, 도시는 온통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노을이 질 무렵도 아니건만 세상이 온통 주홍빛으로 물들었는데, 기온이 올라가지 않을 리 없었다.
“으아…….”
그 불지옥 속에서 제 몸이 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중심부를 향해 달려드는 수많은 악마들을 확인한 유서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별 거 아닌 소형 악마라 한들 그 수가 너무 많았다.
늘 자신감에 넘치는 유서인이지만 이번만큼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리더, 적이 너무 많은 거 아님? 솔직히 좀 쫄리는데…….”
“으아아악!”
“아, 씨!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럼!”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놀란 유서인이 펄쩍 뛰었다.
그녀의 옆에 자리하고 있던 구원자 하나가 입을 쩍 벌리고 하늘을 가리키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인원 전체가 자연스럽게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했다.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크기를 짐작할 수도 없는 거대한 초대형 악마가 일행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한소현이 가진 회복의 권능이라 해도 단번에 몸이 짓이겨진다면 회복할 수 없다.
한소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머리 위로 거친 잿가루가 쏟아졌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