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몰려오는 악마는 비단 임프만이 아니었다.
[캬아아아아!]
좀비와 임프가 상당수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종류가 워낙 다양해 하나씩 언급하는 게 어려울 정도로 종류가 다양했다.
소형, 중형을 가리지 않았으며, 초소형과 저 멀리 두 마리 뿐이기는 하지만 대형까지도 보였다.
공주시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 있는 모든 악마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악마들은 시현과 임주찬을 향해 달려드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본능은 저 별거 없어 보이는 두 남자가 자신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포식자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몸은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다.
인류에게 악마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준 것이 신들이라면, 악마들에게 인간을 사냥할 수 있는 힘을 준 이가 외신이었으니까.
“바퀴벌레도 아니고 어디서 저렇게 기어 나오는 건지 모르겠네.”
흉포한 외형에 대체적으로 인간보다 덩치가 큰 악마는 존재만으로도 위압감을 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현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뭐야, 왜 웃고 있는 거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을 한껏 찌푸린 임주찬이 질문했다.
상황이 한참은 악화되었는데도 오히려 웃고 있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가능한 일이 아니라 생각한 것이다.
“아까 말했죠? 준비는 다 해 왔는데 조건이 충족되지 못했다고.”
“들은 것 같기는 하네.”
“기뻐하시죠. 지금 막 조건이 충족됐습니다.”
[크아아아악!]
빠른 속도를 자랑하며 시현의 코앞에 도달한 검은 늑대가 이를 들이밀었다.
고작해야 소형.
5레벨 구원자인 시현의 상대는 못 됐다.
촤악!
대충 휘두른 검에 늑대의 몸이 정확하게 반으로 잘려 나갔다.
절단면에서 대량의 피가 쏟아졌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피는 바닥으로 쏟아져야 한다.
그러나 검은 늑대가 쏟아낸 피는 중력을 거스르며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시현의 머리 위에서 작은 구체를 만들어 냈다.
“외신을 하늘에서 끌어내릴 정도로 피를 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친절하게 제물을 가져다주다니. 어떻게 감사 인사를 하면 좋을지 모르겠네.”
시현은 드물게 검을 두 손으로 잡았다.
흑색의 기운과 백색의 빛.
상반되지만 서로 잘 어울리는 두 가지 기운이 동시에 검에 머무른다.
촤아악!
한껏 길어진 검신이 동시에 여러 마리의 악마의 허리를 끊어 놓았다.
부지불식간에 수십에 달하는 생명이 죽어 나가다 보니 모여드는 피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심지어 시현이 모으고 있는 것은 악마가 흘린 피뿐만이 아니었다.
고오오오…….
악마들이 죽을 때마다 검신에 사이한 은색 기운이 모여들었다.
검신이 파르르 떨릴 때마다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것처럼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검에 달린 기능을 제대로 사용해 보는 건 처음이네.”
아무래도 조건이 까다롭다보니 마구잡이로 사용하기에는 망설여지는 감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데미지 실험용 허수아비가 되어 줄 상대가 도처에 널려 있지 않은가.
시현은 가감 없이 전력을 쏟아 냈다.
“중격.”
검에 모인 사기가 한계에 달했다.
[우우우우!]
때마침 대형 하나가 시현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물범을 닮았다.
그러나 귀여운 물범과 동떨어진 흉악한 인상에 등 쪽에 자리한 고슴도치 비슷한 가시들은 놈이 결코 쉽지 않은 악마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마침 잘 됐네. 그렇지 않아도 조그마한 놈에게 사용하기에는 조금 아쉬운 느낌이 있었는데.”
시현은 자신을 한 입에 집어삼키려는 대형 악마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에 모여 있던 사기가 일제히 폭발했다.
은빛의 폭발과 함께 대형 악마는 달려들던 기세 그대로 뒤로 넘어가 버렸다.
놈의 거구에 짓눌려 수십에 달하는 소형 악마들이 목숨을 잃었다.
쓰러진 놈이라 해서 멀쩡하지는 않았다.
두개골이 보일 정도로 깊이 잘린 얼굴에서는 엄청난 양의 피가 흘러나왔다.
대형이라 그런지 흘리는 피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덕분에 피의 구슬은 태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덩치를 부풀렸다.
“이건…… 나태의 군주의 권능?”
시현이 다루는 권능의 정체를 알아본 임주찬이 눈을 빛냈다.
시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준비하시죠.”
시현의 말에 임주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잔챙이들을 일 검에 베어 넘긴 후, 그 시체로 쌓아 올린 산에 올라갔다.
타이밍을 맞춰 시현은 모아 둔 피의 구슬을 해방시켰다.
촤르르륵!
구슬로부터 만들어진 사슬이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갔다.
하늘 위에서 오만한 자세로 지상을 내려다보던 외신은 화염의 검을 만들어 사슬을 쳐냈다.
“이거 생각보다 다루는 게 쉽지가 않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연습 좀 해 둘 걸 그랬어.”
작게 혀를 찬 시현은 두 번째, 세 번째 사슬을 올려 보냈다.
한 두 개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아 모아 놓은 피를 전부 사용해 사슬을 만들었다.
어차피 소모되는 피야 주변에 널려 있으니까.
이리저리 공격을 회피하던 외신이 결국 분통을 터뜨렸다.
강한 능력을 가졌지만, 그만큼 근접전이 뒤떨어지는 외신에게 수십 가닥의 사슬 전부를 회피하는 것은 난이도가 있는 일이었다.
[감히, 버러지가!]
“대사가 식상한 것으로도 모자라 도돌이표네.”
[감히, 감히! 절대 가만 두지 않겠다.]
“……잡았다.”
머리끝까지 열이 뻗친 외신이 마구잡이로 검을 만들어 휘두르는 사이, 배후에서 교묘하게 접근한 사슬 하나가 외신의 발목을 휘감았다.
당황한 외신이 사슬을 끊어 내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시현이 사슬을 잡아당겼다.
외신은 강제로 끌어내려졌다.
“아무래도 날개를 한쪽만 남겨 두면 더 이상 날아오르지 못하겠지?”
외신이 추락하는 타이밍에 맞춰 임주찬이 시체의 산에서 뛰어올랐다.
추락 중이던 외신과 뛰어오른 임주찬이 허공에서 교차한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외신의 날개 한 장이 추가로 뜯겨 나갔다.
[으아아아아!]
외신은 포효했다.
그게 고통에 의한 것인지, 수치심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한 것인지.
원인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그 외침이 무언가를 불러냈다는 것은 확실했다.
돌연 주변이 어두워졌다.
붉은 지역 안에 있을 때처럼 비정상적인 어둠이 드리운 게 아니라, 거대한 그림자가 진 것 같았다.
추가로 악마들을 베어 소모한 피를 보충하던 시현은 당황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위.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무언가가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저게 뭐야.”
하늘 높이.
짙게 드리운 구름 위로 거대한 가오리가 있었다.
비행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의 속도.
차라리 부유하고 있다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저 크기라면…… 초대형?”
“……조심해라. 데스피어다.”
“데스피어라면…… 아, 망했네.”
낯익은 이름이었다.
원작에 등장하는 초대형 악마로, 공격력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괴물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시현은 놈에 대한 걱정을 일체 하지 않았다.
데스피어가 등장한 곳이 남미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남미에 있어야 할 놈이 공주시의 하늘을 비행하고 있었다.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었다.
[절망해라!]
자신을 붙잡고 있는 사슬을 떨쳐 낸 외신은 하늘을 향해 솟구쳐 데스피어의 곁에 자리 잡았다.
그러자 데스피어의 복부에 있던 흑색의 기이한 문양이 적색으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데스피어의 등 뒤에서 녹색의 빛이 솟아올랐다.
“엄청 위험한 놈이 올 거다.”
임주찬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데스피어의 몸을 끈적이는 액체가 뒤덮었다.
데스피어가 크게 몸을 털자 몸을 덮고 있던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퍽!
시현의 바로 옆에 덩어리 하나가 떨어졌다.
지면과 닿은 충격에 의해 덩어리는 작게 분열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중 하나가 시현의 옷자락에 튀었다.
치이익!
매캐한 냄새가 나며 옷자락이 타들어 갔다.
“조심하세요. 저 덩어리에 강한 산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알아, 아는데……. 보고 피하기에는 난이도가 너무 높아!”
단순히 떨어지는 것을 피하기만 하는 거라면 모를까, 추락 후 불규칙적으로 터지는 덩어리 전부를 피하는 것은 아무리 고레벨 구원자라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피해야 하는 게 저것만 있는 것도 아닌 거 같고.”
임주찬의 말이 있고 나서야 시현은 하늘이 어두워졌음을 깨달았다.
단순히 가오리가 몸으로 태양을 막아 생겨난 어둠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솜사탕처럼 하얗던 구름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구름 안에서 전류가 튀는 게 눈에 보였다.
“설마…….”
시현의 미소가 뒤틀렸다.
부디 이 예상이 빗나가기를 기도했지만, 어떻게 안 좋은 방향에서의 예상은 꼭 맞아 떨어졌다.
꽈르르릉!
대기를 찢어발기는 우렁찬 소음과 함께 푸른색 뇌격이 내리꽂혔다.
“…….”
십여 마리의 악마를 삽시간에 재로 만들어 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바닥에 남은 전류가 흘렀다.
시현은 말없이 침만 삼켰다.
다행이도 명중률은 형편없는 것 같았지만 문제는 속도다.
도저히 눈으로 보고 피할 만한 속도가 아니었다.
그 순간 시현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은.
‘아, 이거 죽을 수도 있겠다.’
……였다.
외피마저 녹여 버릴 만큼 강한 산성을 가진 덩어리.
눈으로 보고 피하는 게 불가능한 속도를 자랑하는 뇌격.
그것만 해도 버거운데 기동을 저해하는 대량의 악마들도 문제였으며, 본격적으로 공격을 퍼붓기 위해 불덩어리를 만들어 내는 외신도 문제였다.
심지어 생존자들이 있는 건물까지 지켜야 하는 상황.
겨우 두 명이서 대처할 수준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다른 구원자들의 도움만 받을 수 있어도…….”
일손이 부족한 게 너무도 아쉽게 느껴졌다.
하다못해 대전에 있는 나머지 멤버들과 등대의 구원자들에게 도움만 받을 수 있어도 전투가 몇 배는 수월해질 것이다.
하지만 민서라와 한소현조차 버티지 못하는 공포를 그들이 버텨 내고 전투에 임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우리끼리 해결하거나, 홀랑 도망 가 버린 그 두 놈이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는 소리인데…….”
둘 중 어느 쪽도 그리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았다.
두 장의 날개를 찢어 놓기는 했지만, 놈에게는 아직 여섯 장의 날개가 더 남아 있었다.
시현은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했다.
‘이러다가 체력이 먼저 바닥나겠어. 만약 그렇게 되면…… 민서라 씨와 한소현 씨를 데리고 달아나는 수밖에.’
공주시에는 아직 공포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생존자들이 최소 세 자리는 존재했다.
그들을 버린다는 최악의 상황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 망할 가오리를 지상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나? 아까 그 사슬을 사용해서.”
“놈의 크기를 고려하면 엄청난 양의 피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의 피를 모을 때까지 저희가 버틸 수 있을지가 의문이네요.”
악마들은 여전히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어찌나 머릿수가 많은지, 데스피어의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 대량 살상에도 수가 줄어드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아무리 사냥감이 많으면 뭐 한단 말인가.
그들을 죽여 수확할 사냥꾼의 손이 한참 모자란데.
데스피어가 광범위 공격을 통해 대량 살상을 자행하고 있다 하지만, 대상의 뼈도 남기지 않고 녹여 버리는 점액과 혈액을 한순간에 증발시켜 버리는 뇌격.
둘 다 악마의 시체로부터 피를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최악이었다.
‘어쩔 수 없어.’
결국 시현이 비정한 선택을 내리려던 찰나였다.
콰아아!
한 줄기 섬광이 터져 나왔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