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푸하! 다녀왔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웅덩이에 들어간 이찬열은 약 1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핏물에 흠뻑 젖은 이찬열은 옷을 비틀어 물기를 대충 짜냈다.
시현은 사전에 준비해 둔 보송보송한 수건을 그에게 건넸다.
이 정도로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테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찬열은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에 뭍은 핏물을 중심적으로 털어 냈다.
새하얀 수건이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조각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찬열은 주머니에서 조각을 꺼내 내밀었다.
마지막 조각이다.
“일단 여기에서 뭘 하는 건 위험해 보이니 안전한 장소까지 이동하도록 하죠.”
시현은 일행을 데리고 웅덩이가 있는 공간에서 빠져나갔다.
지금이야 주인이 자리를 비운 상태라 하지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일 아닌가.
일행과 함께 중심부를 벗어나 빛이 스며드는 건물 안에 자리를 잡은 시현은 조각을 모았다.
네 개를 한 곳에 모으자 조각들은 격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강한 빛을 발하던 조각은 이내 하나로 뭉쳐 검이 되었다.
시현이 가진 흑색의 검과 달리 아름다운 백색의 검신을 가진 대검.
상당한 크기를 가지고 있으나 이상하리만치 무거울 것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시현은 검을 손에 쥐었다.
<신을 죽이는 자>
신화 속 이름 난 대장장이가 만든 무기.
초월자들을 향한 원망이 담겨 하얀 날개와 검은 날개를 가진 존재들을 죽이는데 탁월한 위력을 갖게 되었다.
거창한 이름과 달리 실제로 신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격의 차이를 무시하고 대상에게 상처를 입히는 게 가능하다.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공격이 닥쳐오면 자동으로 긴급 회피가 발동한다.
사용자의 힘을 빌려야만 본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기대와 달리 검의 기능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기껏해야 긴급 회피로 목숨을 1회 보전할 수 있는 것 정도.
목숨이 하나 더 붙게 된다는 것만 보면 굉장히 우수한 능력이지만, 공격 기능이 아쉬워 무기로서의 성능은 애매한 편이다.
격의 차이를 무시하고 데미지를 입힐 수는 있지만, 직접적인 공격력을 더해 주지는 않는다.
이렇다 할 공격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철저하게 사용자의 능력에만 의존하는 무기인 셈이었다.
“생각보다 써먹기 힘든 무기네요. 그나마 대검 치고는 가볍다는 게 다행이기는 하지만.”
시현은 검을 이리저리 휘둘러봤다.
상당한 크기 탓에 엄청난 무게를 각오했지만, 의외로 검은 시현이 애용하는 흑룡검 수준의 무게밖에 되지 않았다.
“일단 준비는 다 끝났네요. 이제 공주시로 바로 이동하시는 건가요?”
그렇게 말하는 김영운은 굉장히 초조해 보였다.
공주시에 한소현과 민서라가 강제로 수용되고 벌써 하루가 꼬박 지났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에서 버텨 내기에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감안하면 김영운의 초조함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시현 역시 민서라에 대한 걱정으로 간밤에 제대로 잠조차 자지 못했을 정도이니까.
하물며 한소현은 등대의 리더이자 정신적 지주 아닌가.
한소현을 향한 김영운의 걱정은 시현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리라.
“애초에 리더가 제대로 살아 있는지조차 걱정입니다. 이 하루 동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지…….”
“그렇게 걱정이시라면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김영운이 느끼는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 시현이 말했다.
천리안을 사용해도 되지만 그보다 더 간편한 방법이 있었다.
시현은 Re write의 랭킹을 불러들였다.
그 직후 나타난 메시지에는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문구가 기입되어 있었다.
<랭킹 1위 : 윤시현의 Re write.>
<랭킹 2위 : 한소현의 Re write.>
“…….”
처음 드는 생각은 ‘이게 꿈인가?’였다.
최초에 밑바닥부터 시작한 시현과 달리, 신이라 불리는 천사들의 사랑을 받으며 사도로서 최고의 스타트를 끊은 한소현.
두 사람의 격차는 좁히는 게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시현은 천천히 그녀의 뒤를 쫓았다.
사도인 한소현을 제외한 모든 참가가 중 최초로 각성을 하며 단번에 랭킹을 끌어올렸고, 그 후에도 차근차근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이한울을 꺾고 2위가 된 이후, 마지막 한 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던가.
그렇게 결국 성공을 거머쥔 것이다.
한소현이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시현은 계속해서 주인공다운 활약을 선보였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불가능처럼 느껴지던 정상의 자리를 쟁취하고 만 것이다.
‘드디어…….’
이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벅차오르는 감동을 어쩌지는 못했다.
랭킹 2위와 1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오로지 정상에 오른 참가자만이 쟁취할 수 있는 특별한 보상.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왜 그러세요?”
시현이 말없이 굳자 김영운이 불안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한소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싶은 것이다.
시현은 황급히 표정 관리에 나섰다.
“괜찮습니다. 한소현 씨는 무사합니다.”
“그렇군요.”
시현의 확답이 있고 나서야 김영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싶어 확인해 봤지만 민서라의 이름 또한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장 필요한 무기도 손에 넣었겠다.
남은 건 붉은 지역 바깥에 있는 일행들과 합류, 그리고 공주시에 나타난 외신과 전투를 벌이는 것뿐이다.
‘전체적으로 장비는 잘 갖춰져 있지만 역시 레벨이 문제야. 하다못해 6레벨은 돼야 제대로 활약을 할 수 있을 텐데.’
시현의 레벨은 5.
두 개의 권능을 가지고 있기에 6에 가까운 5라고 하지만, 그래 봤자 5는 6이 되지 못한다.
걱정이 태산 같았다.
‘결국 믿을 건 임주찬 씨뿐인데…….’
한시적으로나마 6레벨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기상천외한 권능을 가진 임주찬.
그가 현재로써는 희망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가 한 말이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내뱉은 거짓말이 아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뒤따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임주찬 씨.”
시현은 임주찬을 불렀다.
방호복에 부착된 방독면이 불편했는지 만지작거리던 임주찬이 흠칫 놀라며 시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 무슨 일이세요?”
“지금부터 임주찬 씨께서 중요한 일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물론 저도 전력으로 임주찬 씨를 서포트 하겠지만, 외신을 상대로 제가 가진 능력이 얼마나 통할지 미지수인지라…….”
모든 것은 너에게 달려 있다.
그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
<더 이상 치유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해당 낙인이 제거됩니다.>
<더 이상 천리안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해당 낙인이 제거됩니다.>
<더 이상 백색 불꽃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해당 낙인이 제거됩니다.>
“……이, 이게 뭐야!”
“왜 그러세요?”
시현의 단말마에 놀란 임주찬이 이유를 물었다.
그러나 시현에게는 거기에 답해 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떨리는 눈동자로 눈앞에 나타난 세 줄의 메시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읊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문구이기에 시현은 다급히 천리안을 사용해 봤다.
하지만 권능은 발동되지 않았다.
“이런 미친!”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는 비단 시현뿐만이 아니었다.
허공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김영운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비명을 질렀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권능이 사라졌다는데요? 으허어억!”
김영운은 그 말을 끝으로 힘없이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아르하의 권능을 통해 여러 가지 권능을 몸에 담고 있는 시현과 달리, 김영운이 가진 권능은 하나뿐이다.
그게 사라지면 김영운은 평범한 20대의 남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물론 예언이라는 특별한 능력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쏟아지는 붉은 비는 구원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맹독이다.
그렇기에 몸에서 힘이 풀린 것이다.
만약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우비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목숨을 잃고 촉수 괴물이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되먹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에서 벗어나도록 하죠.”
시현은 김영운을 등에 업었다.
다행이도 포탈의 권능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나머지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난리가 난 것은 비단 시현과 김영운만이 아니었다.
“혀어어어엉!”
“리더어어어!”
신호석과 진우혁.
두 사람이 울면서 시현의 양쪽 팔에 매달렸다.
단순히 우는 척만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오열한 건지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어으어어어으, 으으흐흐.”
“제가, 끄으윽…… 권능을 빼면 아무 쓸모도 없는 저한테서 권능까지 뺏어 가다니…… 흐어엉!”
두 사람 모두 울먹이느라 알아듣지 못할 언어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해하지는 못해도 두 사람이 무슨 말을 전하고자 하는지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시현의 두 팔을 잡고 있는 그들의 손에선 힘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진정해. 진우혁 씨도 진정하세요.”
업고 있던 김영운을 내려놓은 시현은 등대 측을 살폈다.
등대라 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오히려 시현 일행보다 멤버가 많은 만큼 권능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을 통솔할 한소현도 자리를 비운 상황이고, 김영운도 큰 충격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사건은 원작에서 발생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원인은 참가자들에게 있다는 말이 된다.
그들의 존재가 원작을 너무 크게 뒤틀었고, 그 결과 전혀 예측할 수 없던 미래를 맞이하고 만 것이다.
‘천사들과 연관되어 있는 일이니 아르하와 이자프를 만나 봐야겠어.’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전장의 한복판으로 몸을 던져야 한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기에 시현은 망설이지 않았다.
남은 것은 아까 미처 끝내지 못한 임주찬을 설득하는 것뿐이다.
“임주찬 씨.”
“네, 리더.”
드디어 때가 왔다고 판단한 임주찬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엿보였다.
과연 임주찬이 잘 해 낼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믿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함께 공주시로 가 주셔야겠습니다.”
대답이 돌아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포탈을 사용하기 전, 시현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부터 임주찬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시현의 요청을 수락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 임주찬과 함께 공주시로 이동할 준비를 하는 시현에게 김영운이 다가왔다.
아직 완전히 몸이 회복되지 않은 것인지 동료에게 부축을 받고 있었다.
“리더를 부탁드립니다.”
머리를 숙이는 김영운을 보며 시현은 씁쓸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구원자의 수가 부족한데 김영운 같은 거물급 구원자까지 힘을 잃게 되었으니, 마지막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시현에게는 크나큰 출혈이었다.
‘젠장, 이렇게 되면 마지막 전쟁이 발생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구원자를 육성해야 하는 거야? 이미 참가자들이 단물이란 단물은 죄다 빨아먹어서 남은 것도 없는…….’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이를 갈던 시현이 멈칫했다.
돌연 중대한 사실 하나를 깨달은 것이다.
‘마지막 전쟁…….’
마지막 전쟁이라 하면 앞으로 수 년 후에나 있을, 인류와 악마가 생존을 걸고 모든 것을 맞부딪치는 전쟁이다.
종의 존속을 위해 목숨까지도 갈아 넣어야 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전쟁.
만약 패배한다면 인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멸종뿐이다.
그렇기에 시현은 철저하게 준비를 해왔다.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참가자는 좋은 방향으로 미래를 바꾸기도 했지만, 안 좋은 방향으로 미래를 바꾸기도 한다.
‘인천에서 하나를 처리했으니 남은 건 셋. 하나는 붉은 하늘의 중심에 있고, 하나는 아르하, 이자프와 싸우고 있으니…… 남은 건 하나. 하지만 그 하나의 봉인을 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은신이 필요해. 하지만 더 이상 은신의 권능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니 남은 하나는 영원이 깨어나지 못해. 그렇다면…….’
굳이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깨닫지 못했다 뿐이지 마지막 전쟁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