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결정을 확보하는데 성공한 시현은 예정대로 석상이 자리하고 있던 장소를 확인하러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석상이 앉아 있던 자리는 평범하지 않았다.
조금만 앉는 위치가 틀어지면 석상조차 빠지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크고 깊은 구덩이.
그곳에 대량의 붉은 액체가 고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건…… 젠장.”
이찬열이 사정없이 인상을 쓰며 코를 틀어막았다.
구원자로서의 레벨이 높을수록 웅덩이의 냄새는 불쾌하게 느껴졌다.
시현이라 해도 별 수 없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에 자연스럽게 코를 틀어막게 됐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웅덩이를 발견한 이찬열의 반응이 단순히 불쾌함만 있는 게 아니라,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기에 혹시나 싶던 시현이 질문을 던졌다.
이찬열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던 것인지 거세게 고개를 흔든 후에야 입을 열었다.
“붉은 하늘의 중심부에도 이것과 같은 웅덩이가 존재합니다. 아마 석상이 여기에서부터 힘을 얻은 것 같네요.”
“그렇다면 이 웅덩이가 중심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까?”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그의 답은 애매모호했다.
그럴 때는 몸으로 부딪쳐 보는 게 제일이다.
시현은 머리 위로 대량의 백색 불꽃을 만들어 냈다.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조금 떨어져 계세요.”
“알겠습니다.”
이찬열은 기다렸다는 듯 뒤로 물러나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그래도 마냥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두 남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거기까지 확인을 마친 시현은 붉은 웅덩이를 향해 화염구를 던졌다.
콰앙!
폭발과 함께 피의 분수가 사정없이 솟구쳐 올랐다.
솟아오른 물줄기는 더욱 강한 빗줄기가 되어 일행을 덮쳤다.
웅덩이에 남아 있던 핏물은 고열에 의해 증발해 버렸다.
남은 것은 사람의 머리까지 푹 잠길 정도로 깊은 구덩이와 바닥에 뚫려 있는 자그마한 구멍이었다.
그 구멍이 중심부와 연결되어 있을 거라던 이찬열의 추측이 맞았는지, 소량의 핏물이 꾸역꾸역 솟아나고 있었다.
‘만약 이 통로가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있지 않다면 멤버들 전원을 데리고 올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사람이 드나들기에는 너무 좁아.’
기껏해야 주먹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인데 사람이 오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의도적으로 구멍의 크기를 넓힌다면 모르겠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 줄 알고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역시 정석적인 수단으로 네 개의 석상을 파괴하는 게 제일인 듯싶었다.
‘그렇다면 이 웅덩이의 역할은 뭐지?’
중심부와 연결되어 있는 피의 웅덩이.
분명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시현 씨.”
이찬열이 낮은 목소리로 시현을 불렀다.
시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이찬열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쿵, 쿵.
조금 전부터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굉음과 함께 조금씩 바닥이 진동하고 있었다.
시현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어어어어!]
우렁찬 포효를 하며 거대한 석상 하나가 접근해 오고 있었다.
처음에 이찬열이 말한 것처럼 석상이 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있던 놈과는 생김새가 조금 다르네.”
조금 전 시현이 파괴한 석상이 날렵한 외모를 가졌다면, 지금 접근해 오는 놈은 조금 둔한 외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놈은 보이는 것과 다르게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현은 놈을 공격하지 않았다.
“저…… 시현 씨?”
시현의 태도에 이찬열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시현은 여전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찬열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두 남자를 데리고 모습을 숨겼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저런 거 시현 씨에게는 한주먹 거리도 안 되잖아요.”
“조금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생겨서요.”
시현은 차분하게 기다렸다.
자리에 도착한 석상은 자신의 앞에 널브러져 있는 동료의 시체에도 아랑곳 않고 웅덩이 위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러곤 언제 움직였냐는 듯 더 이상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제야 시현은 석상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시현이 자세를 잡자 이찬열은 기겁하며 그를 만류했다.
“그러다가 반사 데미지에 골로 가십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확신이 있던 시현은 크게 검을 휘둘렀다.
콰앙!
강한 힘이 담긴 일격이 석상에 닿았다.
시현이 가진 흑색 날의 검은 석상의 몸 속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예의 기묘한 빛에 의한 반사 공격은 없었다.
“……어?”
“역시.”
이찬열은 당황해하고, 시현은 환희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호기심을 참지 못한 이찬열이 다가와 질문을 던졌다.
이에 시현은 웃으며 머리 위를 가리켰다.
“조금 전부터 빗줄기가 약해졌는데, 느끼셨습니까?”
“네?”
그제야 이찬열이 손을 뻗어 빗줄기의 강도를 확인했다.
“세상에.”
이찬열은 크게 당황했다.
시현의 말대로 처음 붉은 영역에 진입했을 때보다 빗줄기가 약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막 눈에 띌 정도로 확연하게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을 집중해 보면 알 수 있는 정도의 변화였다.
변화는 빗줄기의 강도뿐만이 아니었다.
시야를 방해하는 어둠도 조금은 약해져 있었다.
“그 동서남북에 위치해 있다던 네 개의 웅덩이가 아마 붉은 지역의 빗줄기와 어둠의 농도를 강하게 만드는 역할인 거 같습니다. 석상은 웅덩이의 힘을 일부 빌려 그 지역을 지키는 역할이고요.”
“그렇다면 나머지 웅덩이도 없애 버리는 게 좋겠군요.”
“바로 움직이도록 하죠. 하지만 그 전에…….”
시현은 자신의 검에 온갖 권능을 불어넣었다.
“이것부터 처리하고 결정을 확보하도록 하죠.”
온갖 것들을 몸에 휘감은 검은 처형장의 단두대처럼 시현의 검은 석상의 목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러나 웅덩이를 지켜야 하는 석상은 자신의 급소에 공격이 날아옴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 * *
첫 번째 웅덩이를 파괴하고 빗줄기가 다소 약해졌음을 깨달았을 때.
나머지 세 개의 웅덩이를 파괴하면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붉은 하늘의 영향을 줄일 수 있겠구나.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네 개의 웅덩이를 부수고 나타난 성과는 시현의 기대 이상이었다.
“빛이다…….”
정신을 차린 김영운이 멍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아직 붉은 하늘 아래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운의 손 위에 밝은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시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온 후에 하늘에서 먹구름 사이로 빛이 쏟아지듯, 붉은 하늘 사이사이로 밝은 빛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짙은 어둠이 걷힌 것이다.
쏟아지는 빗줄기 또한 약해졌다.
여전히 맨몸으로 비를 맞는 건 위험한 일이었지만, 우비 없이도 버틸 수 있는 시간이 확연하게 늘어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정 지역에서 외신의 영향력이 약해진 덕에 참가자 및 구원자를 위한 시스템이 재가동됩니다.>
한동안 사용하지 못하던 시스템 기능이 되돌아왔다.
이제 랭킹을 불러오는 것도 가능해졌으며, 영역 내에서도 포탈 생성, 천리안 등의 권능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포탈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게 정말 다행이네.”
만에 하나 위험한 일이 닥치더라도 긴급 회피가 가능하게 되었으니, 조금 더 위험한 일에 몸을 던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자, 결정도 네 개 모았으니 안내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네 개의 웅덩이를 모두 처리하느라 다소 시간이 소요되고 말았다.
때문에 일행은 이찬열의 안내에 따라 보이지 않는 장벽을 서둘러 통과했다.
촉수 괴물이 여럿 보이기는 했지만, 놈들은 일행을 공격할 만한 여유가 없어 보였다.
빛에 닿으면 무력화되는 특성 탓에 쏟아지는 빛을 피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놈들은 빛이 닿지 않는 건물 안에 몸을 숨긴 채 시현 일행이 중심부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때문에 일행은 이렇다 할 방해 없이 수목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게 붉은 하늘의 원인이군요.”
수목원의 중심부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구덩이로부터 거대한 핏빛 기둥이 솟구치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여기 통로로 내려가면 지하로 갈 수 있어요.”
시현은 이찬열을 따라 작은 동굴 비슷한 장소로 들어갔다.
안쪽은 굉장히 어두웠기에 한동안 내버려 둔 손전등을 다시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습하고 덥네요…….”
습기 때문에 몸에 달라붙는 옷이 불쾌했는지, 김영운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가장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임주찬이었다.
“헉…… 허억…….”
그는 숨을 헐떡이며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긴장해 있었다.
등을 다독여 준다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았기에 시현은 굳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쭉 침묵이 유지됐다.
어둠 속에서도 이찬열은 침착하게 길을 안내했고,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붉은 하늘의 중심부에 도달한 시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넓은 공간.
바닥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피의 웅덩이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중심부에는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핏빛 기둥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거…… 단순히 기둥의 색이 붉은색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지근거리에서 기둥을 확인한 김영운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 기둥은 순수한 피로 구성되어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닥에 고인 피가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형태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웅덩이에 고여 있는 피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신비롭다기보다는 섬뜩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이상하네요.”
이찬열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방의 주인이 자리를 비우고 있는 거지?”
“방의 주인이라면…….”
“외신이요. 교단의 리더 이한울과 융합한, 그 혼종 자식이 여기에 있어야 하는데 어디로 가 버린 건지 모르겠네요. 어쩌면 봉인이 완전히 깨진 건 아닐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시현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두 번째 하늘이 열렸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죠?”
“…….”
김영운의 질문에 시현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지금의 상황이 혼란스러운 것은 시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참가자이기에, 가지고 있는 정보다 압도적으로 많기에.
그 혼란의 크기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외신의 봉인이 완전히 깨어나게 되면 하늘문이 열리고 신으로 추앙받는 존재 중 하나가 지상에 강림하게 된다.
첫 번째 외신의 봉인이 깨어났을 때, 지상에 이자프가 강림했다.
이자프와 외신은 현재 공주시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이한울과 융합한 외신의 봉인이 깨어났다면, 두 번째로 하늘이 열리고 신이 강림했어야 한다.
그러나 두 번째 강림 이벤트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외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마지막 조각을 먼저 확보하도록 하죠.”
아무런 단서도 없이 고민해 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외신과의 전투까지 상정해 둔 시현 입장에서는 나쁠 것 없는 상황이 아니던가.
시현은 걱정거리를 뒤로 미뤄두고 당장 가능한 일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마지막 조각은 웅덩이 안에 있겠군요.”
시현은 사전에 확보한 조각들을 꺼내 들었다.
예상한 대로 조각들은 웅덩이 안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문제는 누가 웅덩이 안으로 들어가느냐는 거다.
비를 맞아도 몸에 이상이 생기는데, 웅덩이 안으로 직접 들어가면 십중팔구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어쩔 수 없나.’
이제 와서 누군가의 등을 떠밀 수도 없는 노릇.
시현이 입수를 위해 겉옷을 벗으려던 찰나.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어차피 이전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적이 있거든요.”
뭐라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이찬열이 웅덩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