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쏟아지는 비와 어둠을 뚫고 한참을 걸었다.
그 결과, 시현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퉁.
“아악!”
가장 선두에서 걷던 김영운이 보이지 않는 벽에 성대하게 머리를 부딪쳤다.
“도착했네요.”
길 안내를 담당하던 이찬열이 그 모습을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시현은 앞으로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의 손바닥에 딱딱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분명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정면을 향해 쭉 뻗은 도로가 있을 뿐인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혹시나 싶어 검으로 공격을 해 봤지만 역시나였다.
“이런…… 강도만 보면 첫 번째 벽보다 몇 배는 더 단단한 거 같네요.”
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온 힘을 다해 공격한 오른손이 충격으로 인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하면 됩니까?”
부딪친 코를 매만지며 몸을 일으킨 김영운이 물었다.
이에 이찬열은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주변을 살폈다.
“아, 찾았다. 다들 이쪽으로 와 주세요.”
그가 안내한 곳에는 커다란 석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박쥐의 날개에 긴 팔, 날카로운 손톱, 파충류의 머리.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만화나 영화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가고일이 딱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쭈그리고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크기가 대략 10여 미터에 달한다.
“이거 혹시 살아서 움직이나요?”
시현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임주찬이 질문했다.
떨리는 목소리와 슬금슬금 뒷걸음치는 발길이 그가 느끼는 감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방독면 때문에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아마 제발 아니라고 대답하기를 바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찬열은 그의 간절함을 배신했다.
“네. 움직입니다.”
“역시나…….”
임주찬은 울상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찬열은 자신이 할 일을 이어나갔다.
“붉은 지역의 중심부에는 핏빛 기둥이 존재합니다. 그 기둥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져 있는데, 동서남북 네 방향에 이것과 동일한 모양의 석상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네 명인 거군요.”
시현은 어째서 이찬열이 머릿수 제한을 넷으로 정했는지를 간파해냈다.
첫 번째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하기 위해 중형 악마에 기생한 촉수 괴물로부터 핏빛의 결정을 손에 넣은 것처럼.
눈앞의 벽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이 석상을 부수고 무언가를 손에 넣어야 할 것이다.
“정답입니다. 이놈을 부수는데 성공하면 검은색 결정을 얻을 수 있는데 그게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하는데 필요한 열쇠입니다. 열쇠는 1회용이며, 석상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복구됩니다.”
이찬열이 시현의 막연한 추측에 확신을 더해 줬다.
시현은 곧장 무기를 꺼내들고 전투준비를 했다.
‘이찬열 씨가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상대라면, 어렵지 않은 상대라는 거겠지.’
물론 이찬열의 실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나연과 동수를 이룰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구원자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시현을 뛰어넘는 정도는 아니다.
이찬열이 가능한 것이 자신에게 불가능할 리가 없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찬열은 시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시현 씨가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지금 상태의 석상을 공격하면 당하는 건 도리어 시현 씨가 될 겁니다.”
“…….”
시현은 움직임을 멈췄다.
얼핏 기분이 나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시현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인가.
인도자 이찬열이다.
서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한 그가 시현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 줄지언정, 나쁜 길로 끌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시현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얌전히 그의 말을 따랐다.
“이 석상에게는 공격 자체가 통하지 않습니다. 무턱대고 공격을 가하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인지 이찬열은 무기를 들고 석상을 내리쳤다.
가볍지 않은 일격.
평범한 돌무더기였다면 형태도 남기지 못하고 으스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석상의 표면에 자줏빛의 원이 생겨나며 이찬열의 공격을 완전하게 막아 냈다.
그럴 거라고 예측하고 있던 이찬열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촤악!
자줏빛의 원에서부터 엄청난 예기를 가진 섬광이 튀어나와 그를 공격했다.
만약 그가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주 조금만 늦었어도 섬광은 그의 목을 베어 버렸을 것이다.
“……보셨다시피 가한 힘의 두 배에 달하는 위력으로 되갚아 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이찬열은 무슨 수로 석상을 부수고 결정을 획득했단 말인가.
분명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도자 이찬열은 그 길을 제시해 줄 것이고.
“현재 시간 오후 5시 57분.”
“……?”
“앞으로 정확히 3분 후 석상들이 움직일 겁니다. 그때는 석상을 지키는 방어능력이 작동하지 않으니 마음껏 공격하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3분 정도 기다리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다.
일행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얌전히 3분의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멍하니 1분 정도를 흘려보냈을 때.
문득 시현은 한 가지 의문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하나 이상한 점이 있네요.”
“뭔가요?”
“그냥 가만히 그 자리에 있으면 모든 공격이 통하지 않는데, 굳이 일정 시간마다 자리를 옮기는 이유가 뭘까요?”
“……그러게요?”
시현의 질문에 이찬열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의 권능인 인도자가 이끄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인도자가 이렇게 하라고 했으니 이게 정답이구나 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 이에 대한 의구심을 품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시현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확실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있으면, 적대하는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벽을 넘어가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지키고 있는 게 가능하지 않은가.
굳이 스스로 약점을 드러내는 데에는 무언가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찬열 씨, 이동하는 석상은 혼자서도 파괴하실 수 있으십니까?”
“네. 이동할 때의 석상은 그렇게 강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우르르르.
시현의 말이 끝을 맺기도 전에 정면으로부터 굉음이 들려왔다.
웅크리고 있던 거대한 석상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일행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거대한 석상인데 몸을 일으키고 나니 그 높이가 무려 15미터에 육박했다.
석상의 시선이 일행에게 향했다.
[끼아아아악!]
둔해 보이는 외형과 달리, 날카로운 괴성을 지른 석상은 날개를 활짝 펴며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시현은 갑자기 시작된 굉음 때문에 잠시 끊어진 말을 이어 붙였다.
“일단 저 덩치만 거대한 놈부터 빠르게 처치한 후, 놈이 앉아 있던 자리를 살펴보도록 하죠.”
시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찬열과 김영운.
두 남자가 경쟁이라도 하듯 달려 나갔다.
서로 무언가 대화를 나누거나 사전에 미리 합을 맞춰 본 것도 아니건만, 이찬열은 왼쪽으로, 김영운은 오른쪽으로 자연스럽게 방향을 나눴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석상의 양쪽 발목을 베었다.
위력은 비슷해 보였지만, 이찬열의 공격이 조금 더 깊게 들어갔다.
“……이건 좀 자존심 상하네.”
김영운의 미소가 뒤틀렸다.
예언자라 불리고 있지만, 그의 전투 능력은 결코 다른 구원자들에 비해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름 이찬열을 자신과 동급, 혹은 그 아래라 여기고 있던 김영운의 자존심에 상처가 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키아아악!]
공격을 당해 분노한 석상은 더욱 적극적으로 두 남자를 공격했다.
마구잡이로 손톱을 휘두르고, 기다란 꼬리를 채찍처럼 활용해 사각에서의 변칙적인 공격까지 가했다.
그러나 제대로 적중하는 공격은 단 하나도 없었다.
석상이니만큼 놈의 공격은 둔했고, 공격을 받는 두 사람은 민첩했다.
화려하게 공격을 회피한 이찬열은 끈질기게 다리를 공략했고, 김영운은 급소를 찾아 이곳저곳을 찔러댔다.
“와…… 저 두 사람 엄청 강하네요.”
시현의 보호를 받으며 전투를 지켜보던 임주찬이 크게 감동을 표현했다.
“그러게요.”
적당히 대꾸해 주고 있으려니, 어째서인지 가만히 있던 시현에게 석상의 어그로가 끌렸다.
보아하니 민첩하게 치고 빠지는 두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는 쌓여 있는데 속도의 차이 때문에 잡을 수가 없으니, 차곡차곡 쌓인 분노를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시현에게 풀겠다는 것이다.
[키아아아아!]
놈은 입을 쩍 벌리고 주둥아리를 내민 채 꼬리를 위협적으로 흔들며 다가왔다.
“으아아아악!”
시현의 옆에 있던 임주찬은 목청이 찢어지도록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에 반해 시현은 묵묵히 검을 뽑아 들었다.
촤악!
크게 휘둘러진 검이 석상을 베고 지나갔다.
하늘로 향해 있는 검에는 검은 기운과 불꽃, 그리고 강렬한 빛이 함께하고 있었다.
[…….]
석상은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바닥에 꼬꾸라졌다.
잘려 나간 채 하늘로 솟구친 머리가 시현의 바로 코앞에 떨어졌다.
아직 빛을 잃지 않은 붉은 눈동자가 원망을 담아 시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와…… 시현 씨가 강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은…… 그 정도면 대형도 혼자 잡으시겠어요. 아, 그러고 보니 대형에게 기생한 촉수 괴물도 혼자 잡으셨지. 5레벨 맞아요?”
시현이 진심으로 싸우는 모습을 처음 목격한 이찬열이 혀를 내둘렀다.
만약 손에 무기를 쥐고 있지 않았다면 물개 박수라도 칠 기세였다.
“……아니, 이거 좀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겨우 1레벨 차이인데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수가 있지? 아무리 아르하의 권능이 있다고 하지만, 뭔가 강해지려고 아등바등하던 제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네요.”
김영운 역시 말은 그렇게 해도 진심으로 시현의 강함에 감탄하고 있었다.
참가자가 아니기에 오로지 인류의 구원만을 목표로 삼고 있는 김영운이다.
그에게 있어 자신보다 강한 구원자가 있다면 기뻐할 일이지 불쾌해하거나 질투할 이유가 없었다.
임주찬의 경우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보내는 존경과 감탄의 시선에 머쓱해진 시현은 애써 화제를 돌렸다.
“이찬열 씨, 그 결정이란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 머리를 반으로 쪼개시면 됩니다.”
“그렇군요.”시현은 행여 결정까지 파괴해 버리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파괴된 석상의 머리를 반으로 쪼갰다.
이찬열이 말한 것처럼 석상의 머리에서 핏빛의 결정보다 조금 더 큰 흑색의 결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을 손에 들자, 아니나 다를까.
반지에서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아…….”
정신 오염으로부터 저항을 위해 이찬열이 차고 있는 목걸이에서도 빛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달리 정신 오염에 저항할 수 있는 보물을 갖지 못한 두 남자는 예외였다.
그들은 눈이 풀린 채 결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
김영운와 임주찬.
두 사람이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어도 시현은 상처 하나 없이 가볍게 제압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퍽! 퍼억! 빠각!
시현은 깔끔하게 세 번의 주먹질로 두 남자를 기절시켰다.
첫 번째는 임주찬을 기절시켰고, 두 번째 주먹질은 김영운의 외피를 깨부쉈으며, 세 번째는 그를 혼절시켰다.
그런 시현에게 이찬열의 시선이 향했다.
“…….”
“왜 그러십니까?”
“아니요. 그게…… 이 목걸이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리더, 고마워.”
이찬열의 중얼거림에는 숨길 수 없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