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
깊은 어둠 속에서 홀로 중얼거리던 남자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자신의 육신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의 육신은 현재 봉인되어 있는 상태다.
비록 그 봉인이 많이 약해졌다고 하지만, 완전히 봉인을 깨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런데 돌연 그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단축되었다.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나라고 알 도리가 있나. 오히려 이런 건 그쪽 분야가 아니던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하지만 추측은 가능하지. 어디선가 놈들이 인과율에 어긋나는 행위를 저질렀다. 그 반동이 나타난 것이고.]
두 개의 자아가 문답을 나누며 답을 도출해냈다.
남자는 웃었다.
[어리석군.]
정확한 원인을 확인하지는 못하지만, 그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이 정도면 움직여도 괜찮겠어.]
지금까지 쭉 남자는 허공에 누워 있었다.
가장 편한 자세이기도 했지만, 사실 붉은 기둥을 유지하느라 움직일 수 없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상당한 수준의 봉인이 단번에 풀렸고, 그 덕에 어렵지 않게 기둥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놈들은 인류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지 못한다. 놈들이 더러운 바퀴벌레와도 같은 인간들을 지키려 하는 것도 같은 이유지. 그렇기에 지금의 내게 놈들은 어떠한 위협도 되지 못한다. 내가 아직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인반마라 표현하는 게 옳겠군.]
남자는 웃었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듯이 흘린 웃음소리는 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조각은 두고 간다. 이것을 가진 채로는 벽을 넘을 수 없을 테니까.]
남자의 손에서 녹슨 쇳덩어리가 떨어졌다.
그것은 붉은 웅덩이에 잠겨 들었다.
남자는 땅을 박찼다.
삽시간에 주변 환경이 바뀌었다.
돌벽으로 사방이 꽉 막혀 있었는데, 어느덧 넓게 펼쳐진 하늘이 보였다.
붉은 하늘과 그로 인해 드리운 어둠은 남자에게 어떠한 장애도 되지 못했다.
그는 하늘을 날아 특정 구역에 도달했다.
그의 정면에는 갈라진 하늘이 존재했다.
그 너머로부터 숨길 수 없는 신성함이 뿜어져 나왔다.
[축제의 시작이다.]
남자는 갈라진 하늘 너머로 몸을 던져 넣었다.
신성함만이 흘러넘치던 공간에 피의 냄새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 * *
머리끝까지 화가 나기는 했으나, 시현은 화가 난다고 무작정 달려들고 보는 스타일이 아니다.
물론 본인이 상대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이자프.
구원자들에게 신이라 불리고 있는, 천사와 동일한 위계를 가진 초월자다.
화가 난다고 무작정 달려들었다가는 허망하리만치 쉽게 제압되고 말 것이다.
성공적인 복수를 위해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고,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
이를 위해 시현은 준비에 들어갔다.
그가 모습을 드러낸 장소는 일행들이 모여 있는 붉은 하늘의 경계 부근이었다.
“오빠, 오셨어요?”
“리더!”
일행들이 반갑게 시현을 맞이해 주었다.
갈라진 하늘 아래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 한시라도 빨리 썰을 풀어 주기만을 바라는 표정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 가득한 표정은 이내 굳어지고 말았다.
살기등등한 시현의 표정도 한 몫을 거들었으나, 가장 큰 이유는 함께 간 두 명의 여성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현 씨,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리더는…….”
“일이 생겨서 한소현 씨와 민서라 씨는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조금 위험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겁니다.”
시현의 말에 등대 측은 발칵 뒤집혔다.
등대에 소속된 구원자 중 한소현을 향한 충성심이 얕은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붉은 하늘이라는 위험 구역까지 따라올 정도면, 그들이 한소현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말해 봐야 입만 아플 정도.
그들은 한소현이 위험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하늘이 갈라진 장소로 뛰어가려했다.
만약 김영운이 아니었다면 실제로 이탈자가 대거 발생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단 진정하세요. 뭘 하던 이야기는 끝까지 듣고 나서 행동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합시다.”
급하게 일행을 다독인 김영운이 시현에게 시선을 줬다.
뭐라도 좋으니 이들을 설득할 자료를 내놓으라는 무언의 항의였다.
시현은 공주시에서 있던 일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인류에게 외신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악마 놈의 봉인이 깨졌으며, 그로 인해 신이 강림했다고.
강림한 신과 외신이 전투를 벌이느라 급하게 도망쳐 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그들의 정체가 사실은 신이 아니라, 그 밑에서 일하는 천사일 뿐이라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불필요하게 과한 정보는 혼란을 초래할 뿐이다.
“두 사람을 포함해 그곳에 있는 인간들을 반드시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아마 크게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 말뿐인 약속을 믿어도 되는 겁니까?”
“네. 약속이니까요. 저들은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약속은 지킬 겁니다.”
신이란 그런 존재다.
인과율, 약속.
사람에게는 별 거 아닌 제약에도 목숨을 저당 잡혀야 하는 그런 존재.
그렇기에 두 사람을 방치해 둔 채 이렇게 움직일 수 있던 것이다.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먼저 손에 넣어야 할 물건이 있습니다. 이찬열 씨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요.”
이찬열은 강하게 의지를 내비쳤다.
시현은 주머니에서 녹슨 쇳조각을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다.
“이것과 동일하게 생긴, 나머지 세 조각을 찾아야 합니다. 이찬열 씨의 권능으로 길을 인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찬열이 보인 반응은 시현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있었다.
“……어? 어째서 이걸 시현 씨가 갖고 계세요?”
“네?”
설마 질문이 되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시현은 당황해했다.
그런 시현에게 이찬열은 가방을 뒤적여 쇳조각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예상 못했는데.”
허를 찔리기는 했지만, 좋은 방향으로 허를 찔린 셈이었다.
시현의 입가엔 절로 미소가 번졌다.
첫 번째 조각을 찾는 게 가장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조각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시현에게 전혀 기대하지 않던 행운이 찾아왔다.
“그 조각…… 저희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김영운이 쇳조각을 내밀었다.
한소현이 가지고 있었지만, 공주시로 향하기 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김영운에게 맡겨 놓은 것이다.
순식간에 네 개의 조각 중 세 개가 손에 들어왔다.
시현은 세 개의 조각을 한 곳에 모았다.
마치 서로 공명하듯 격하게 진동하던 조각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조각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면 마지막 조각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시현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게 늘 행운만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랬다.
조각은 붉은 지역 안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 * *
“조각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아하니 나머지 조각은 붉은 지역의 최심부에 있을 것 같습니다.”
“최심부라니…… 여기가 중심 부분이 아니었습니까?”
막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한 시현은 이찬열의 말에 기함했다.
인원수에 맞춰 핏빛 결정을 손에 넣고, 정신 오염의 위기를 이겨내고 나서야 겨우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하지 않았던가.
당연히 이게 마지막 난관이라고 생각했건만.
이찬열의 말에 따르자면 더욱 깊숙한 곳에 보이지 않는 벽이 한 장 더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시현과 달리 주먹구구식으로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한 김영운의 경우, 질색하며 치를 떨었다.
“설마 그 짓을 또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김영운과 달리 임서림은 결단에 망설임이 없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할 거야.”
정신 오염에 저항을 갖기까지의 과정은 굉장히 고통스럽고 끔찍했다.
그러나 위기에 처해 있는 한소현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까짓 고통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임서림이었다.
스스로가 깊은 죄악감에 빠져 있는 권수용의 경우에는 묵묵히 하라면 말없이 따라오는 중이다.
“음…….”
잠시 걸음을 멈춘 이찬열이 일행을 살폈다.
이번 탐색에는 등대 측에서 세 명이 참가했다.
시현 일행의 경우, 시현 본인과 이나연, 그리고 진우혁이 참가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며, 기동력이 중요하기에 소수 정예로 인원을 모집한 것이다.
그러나 이찬열이 보기에는 그조차도 많은 듯했다.
“역시 인원을 더 줄이는 것이 나을 거 같습니다.”
“여기서 더 인원을 줄인다고요?”
“네. 제가 아는 방법으로 최심부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단 네 명뿐입니다.”
“…….”
시현은 침묵했다.
고작 네 명이라니. 최심부가 어느 정도로 위험한 장소인지 파악되지 않은 지금은 너무 적은 숫자다.
어쩌면 이찬열이 모르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
그 방법을 사용하면 이찬열이 말한 네 명보다 더 많은 수의 인원이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지금 시현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아르하나 이자프가 금방 무릎을 꿇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무한정하게 남겨진 두 사람을 지켜 주지는 못할 테니까.
“이찬열 씨는 길안내를 해야 하니 반드시 필요할 테고, 등대 쪽에서는 누가 가겠습니까?”
“제가…….”
“제가 가겠습니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하려는 임서림의 입을 틀어막고 김영운이 앞으로 나섰다.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김영운의 손을 거칠게 털어낸 임서림이 매섭게 그를 노려봤다.
“내가 간다고 했잖아.”
“네 권능은 천리안이잖아.”
“그게 뭐.”
“붉은 지역 안에서는 천리안을 사용할 수 없지? 그렇다는 건 그만큼 전투력에서 뒤떨어진다는 소리잖아.”
“…….”
임서림은 반박을 위해 입을 열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김영운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기 때문이다.
천리안을 사용하는 임서림의 전투 능력은 등대 내에서도 제법 높은 축에 속하는 편이다.
이런 식으로 정예 멤버를 뽑을 때 결코 빠지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권능을 사용할 수 없는 임서림은 같은 레벨대의 구원자 중에서도 하위권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만 김영운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다.
“그렇군요. 저희 쪽에서는 제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시현은 참가를 선언했다.
다른 이들에게 의견을 물을 필요도 없었다.
모두가 시현의 결정이 당연하다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만약 시현이 뒤로 뺐다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를 밀어줬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저요!”
기다렸다는 듯 임서림이 손을 들었다.
그러나 시현은 못 본 척을 했다.
“임주찬 씨를 데려가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엥? 저요?”
어째서 자신이 선택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임주찬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1레벨 구원자다.
이 안에서 임주찬보다 강한 구원자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약한 구원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시현의 입장을 생각해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임서림은 얼굴 가득 불만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김영운조차 시현의 결정에 의구심을 드러냈다.
“음…… 1레벨 구원자가 안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레벨을 떠나 지금 복장만 봐도 전투에 도움이 되실 것 같지는 않은데. 아, 뭐라 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평가입니다.”
그는 임주찬의 복장을 지적하며 말했다.
현재 임주찬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가 단 한 방울도 들어올 수 없게끔 방수 처리된 방호복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1레벨 구원자인 임주찬은 옷 사이로 스며든 빗방울 하나에도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방독면의 유리 부분에 하얗게 입김이 낄 정도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임주찬이 도움이 될 거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전투 도중 방호복에 상처라도 생기면, 그 즉시 임주찬은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시현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이한울과 외신이 뒤섞여 있다던, 최심부에서 이찬열 씨가 마주쳤다는 그 존재…… 교전은 최대한 피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임주찬 씨의 능력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죠?”
시현은 임주찬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임주찬은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어째서 자신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켜라.
만약 그때의 약속이 거짓말이라면 지금이라도 진실을 고해라.
시현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임주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알겠습니다. 저도 함께 갈게요.”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