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이유가 뭡니까?”
상대가 신이라 해서 시현은 주눅 들거나 하지 않았다.
똑바로 눈을 마주하고 자신에게 그런 지시를 내린 이유를 물었다.
만약 상대가 로아 렐레아나, 라디아턴트였다면, 건방지다며 으름장을 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는 시현의 태도가 어떻든 간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걸 말해 줄 수 있었으면 진즉 말해 줬지. 하지만 인과율 때문에 그게 안 된단 말이지. 모든 걸 얘기해 주기에는 지금 네 수준이 너무 낮아.]
“수준이 낮다니…….”
Re write가 시작된 이후 처음 들어보는 말이 시현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시현이 어떤 존재인가.
극초반을 제외하면 다른 참가자들보다 늘 하나에서 두 개 이상 높은 레벨을 유지해 온 자타 공인 최고 수준의 구원자 아니던가.
그렇기에 수준이 낮다는 말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수준 미달이지. 아직 5레벨이잖아. 물론 이한울 그 새끼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더러운 놈들의 봉인을 푼 게 원인이기는 하지만…… 그래, 말을 좀 바꾸지. 네 성장이 느린 게 아니야.]
스스로가 생각해 봐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는지, 남자는 먼 산을 바라보며 말을 바꿨다.
[설마 그런 생각을 하는 놈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내 잘못이지. 어쨌든 지금 네 레벨이 부족한 건 사실이야. 그러니까 해운대에 다녀와.]
“알겠습니다.”
시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알고 싶은 것, 궁금한 것은 산처럼 많았다.
그리고 눈앞의 신은 다소 입이 거칠지만, 시현을 향한 태도로 보건데 인간에게 상당히 호의적이다.
그런 그가 아무 것도 말을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신마저도 속박할 수 있는, 오히려 신이기에 더욱 얽매일 수밖에 없는 인과율이 원인일 것이다.
여기서 그를 붙잡고 있어 봐야 아무런 해답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괜히 시간을 버리느니 그의 말대로 해운대에 다녀오는 편이 낫다.
거리가 상당하기는 하지만 어차피 시현에게 거리는 그저 숫자에 불과한 것이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아, 그 전에 하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은 말해 줄 수 없겠지만, 일단 말해 봐.]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그 순간 남자는 굉장히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화냐?]
“……?”
[와, 잠깐. 이건 아니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네가 내 이름을 물어보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아, 혹시 말투 때문에 그런가? 하지만 그건 거절당하면 안 되니까 연기한 거고…… 그러니까 내 이름은…… 그게…… 아니, 적당히 해야지 이것도 안 돼?]
혼자 중얼거리다가 열을 내며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리는 남자.
신이 아니면 분노 조절 기능에 장애를 가진 남자를 상대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감정의 폭이 왔다 갔다 했다.
남자는 포기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이자프다. 일단은 그렇게 알고 있어.]
“……허.”
시현은 뭍에 건져진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서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생각나지 않았다.
이자프라니.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자프라니.
어떻게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있겠는가.
시현의 몸에 낙인을 찍은 당사자인데.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이자프라면 왜 제게…….”
[시간 없다.]
언제부터였을까.
이자프의 눈은 시현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불쾌함과 원한을 그러모아 담아 놓은 듯한 눈동자는 먼 곳의 하늘에 못 박혀 있었다.
자연스레 시현의 시선도 하늘로 향했다.
저 멀리.
하얀 날개를 가진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 거리가 멀어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이었으나, 그것의 속도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처음 봤을 때는 작은 점만 하던 게 잠깐 눈을 깜빡할 사이에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수준으로 가까워져 있었다.
더욱 가까워진 놈의 정체를 확인한 시현은 숨을 삼켰다.
단순히 놈의 외형이 끔찍했기 때문이 아니다.
몸을 옥죄는 압도적인 존재감.
그리고 심장에 차오르는 지독한 공포.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외신! 아직 깨어날 때가 아닌데 어떻게…….’
보아하니 일부 봉인이 풀린 게 아니라 완전히 해방된 듯했다.
시현은 오랜만에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강림 이벤트를 목격한 순간부터 어딘가에서 외신이 각성했다는 것을 짐작하고는 있었다.
그렇기에 충분히 각오 또한 해 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마주치니 몸이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시현이 원작의 구원자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빠르게 성장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부족하다.
외신과 싸우기에는 본인의 능력도, 주변 인물의 힘도 한참 부족하다.
“허억……!”
시현은 주저앉고 말았다.
흘러내린 식은땀이 온 몸을 적셨다.
몸이 평소보다 수십 배는 더 무겁게 느껴졌다.
시현을 억누르고 있는 것은 공포였다.
몸을 제대로 움직이는 것도, 전투에 임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지독한 공포.
바닥에 붙인 손에 장식한 반지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신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악영향을 걷어 내는 반지가 있는데도 이 정도라니.
다른 사람은 어느 정도로 영향을 받고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자프, 이 건방지고 오만한 놈! 겁도 없이 네놈이 이 땅에 발을 들이는구나!]
악마의 육신에 천사의 날개를 가진 놈은 이자프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에 이자프의 표정은 더욱 험악해졌다.
[건방진 게 누구더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도 시원찮을 놈이 감히 누구 이름을 함부로 불러?]
놈은 이자프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자프도 전투태세를 갖췄다.
천만 다행이도 제 힘의 일부만 던져 놓고 달아난 로아 렐레아와 달리, 이자프는 직접 몸을 움직일 의사가 있는 나름 훌륭한 신이었다.
[뭐 하고 있어. 빨리 이동하라니까.]
이자프의 시선이 아주 잠깐 시현에게 향했다.
그러나 시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상태에서도 포탈을 사용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민서라와 한소현.
두 사람을 놓고 달아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어떻게든 두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하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입술만 씹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이자프는 손 위에 흑색의 검 한 자루를 소환하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인간들 중 저 놈에 의해 죽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게 할 테니까.]
“……우리?”
[그래, 우리.]
마지막 대사는 이자프가 아니라 시현의 배후에서 들려왔다.
시현은 힘겹게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서 의외의 인물을 발견하고는 눈을 의심했다.
아르하.
인과율을 무시하고 오래전부터 지상에 강림해 있던 신이 그곳에 있었다.
2:1은 예정에 없었는지, 엄청난 기세로 이자프를 향해 달려들던 외신이 크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외신은 일반적인 신들과 비교해 한참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2:1이라 해도 패하지는 않을 터.
그렇기에 놈은 두 명의 신을 향해 달려드는데 주저가 없었다.
[우리가 저놈을 봉인하지는 못해. 힘도 부족할 뿐더러 인과율이 그것을 허락해 주지 않아.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단 한 사람도 죽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그러니 어서 다녀오렴.]
아르하는 말 안 듣는 아이를 타이르듯 강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런 근거도, 제약도 없는 말뿐인 약속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그들을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시현은 권능을 사용했다.
* * *
“허억!”
해운대에 도착한 시현은 숨을 토했다.
몸을 옥죄고 있는 위압감과 공포가 사라지니 막혀 있던 숨통이 트였다.
청량한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우는 소리가 시현의 마음을 조금은 달래 주었다.
시현은 몸을 일으켰다.
몸에 뭍은 모래가 떨어져 내렸다.
일단 급한 마음에 해운대로 포탈을 열며 정확한 좌표를 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해운대 어딘가에 떨어지겠거니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데, 그 장소가 하필이면 해수욕장이었던 모양이다.
관리하는 이 하나 없는 해수욕장이지만 찾아오는 이도 없어서 그런지 그 흔한 쓰레기 하나 없이 굉장히 깨끗했다.
“……일단 사람들을 보호해 주겠다고 했지만, 마냥 여유를 부려서는 안 되겠지.”
시현은 자신에게 약조한 두 신을 믿었다.
이자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르하의 경우 본인의 입으로 한 약조는 꼭 지키는 신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이 약속을 지키고자 해도 외신의 강함에 짓눌려 약속을 저버리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아르하가 강한 신이라고 하지만, 그래 봤자 동급의 신들 중 유별나게 강한 거지 외신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시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손 사이로 고운 모래 알갱이가 떨어져 내렸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야 하지?”
이자프는 시현에게 해운대로 가라고만 했지 그 이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다
인과율 때문에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는 눈치였다.
즉,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시현의 눈치에 달려있다는 소리다.
‘아무 이유도 없이 해운대로 가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해운대가 원작의 마지막 무대였으니 그와 연관이 있는 건가?”
어찌 보면 작품의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사실 그 외에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시현은 모래사장을 빠져나갔다.
길게 뻗은 도로를 지나, 과거에는 높은 빌딩이 가득하던, 이제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황량한 도심의 한복판에 설 때까지 그는 단 한 차례도 걸음을 망설이지 않았다.
“일단 도착은 했는데…… 여기서 뭘 하라는 거지?”
사람의 그림자는 불구하고,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는 황폐한 곳이다.
사냥감이 없다보니 현 먹이사슬의 정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악마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굳이 이 장소를 최후의 전장으로 삼은 이유도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 아니던가.
더 이상 망가질 것도 없고 잃어버릴 것도 없다.
그렇기에 주변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는 전장으로 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네.”
답답한 마음에 시현은 그저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음?”
기묘한 느낌이 몸을 훑었다.
마치 아주 얇은 물의 막을 통과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평범한 현상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시현의 반지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언가가 정신에 간섭하려다 실패했다는 뜻이다.
시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놀랍게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 것도 없던 장소에 무언가가 생겨 있었다.
자그마한 집이었다.
“……이런 게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는데.”
시현은 의아해하면서도 확인을 위해 집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가관이었다.
마치 아무런 지식도 없는 사람이 근처의 자재들을 이용해 만든 듯한, 엉성하기 짝이 없는, 그야말로 모양새만 겨우 만들어 놓은 집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조금만 힘을 주면 픽, 하고 쓰러질 것 같았다.
시현은 노크를 했다.
“실례합니다.”
반응은 없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으나 주인의 허락도 없이 무작정 들이닥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이대로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다른 장소를 돌아다녀 봐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던 시현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집이라 칭하기에도 민망한 것의 뒤편에 꽃이 피어 있었다.
한두 송이가 아니라 굉장히 넓은 규모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 꽃들 사이로 무언가가 보였다.
궁금증이 생겨 가까이 다가가 그 무언가를 확인한 시현은 경악하고 말았다.
내 소중한 친구이자 위대한 영웅이던 한예인. 여기에 잠들다.
그것의 정체는 무덤에 장식된 묘비였다.
“말도 안 돼…….”
글귀를 확인한 시현의 눈동자가 격하게 떨렸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