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오랜만입니다. 한소현 씨.”
시현과 한소현은 악수를 나눴다.
그러나 분위기가 예전 같지는 않았다.
시현이 랭킹 2위로 올라온 후부터 그녀는 확실하게 시현을 경계해야 할 경쟁자로 분류했다.
시현 역시 언젠가는 그녀를 뛰어넘을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일정 수준 이상으로 좋아질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는 경쟁이다…… 라고 말했는데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됐네.”
“그러게요. 우리 애들이랑 한소현 씨 일행이 같이 있다는 것은……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피차일반이지. 너는 우리 쪽 에이스를 보살펴 줬잖아. 치료까지 해 주고.”
한소현의 시선이 닿자 권수용은 흠칫 몸을 떨었다.
권수용은 사람을 죽였다.
비록 원인이 핏빛 결정에 있으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지만, 무고한 피해자를 위해서라도 한소현은 권수용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징계를 받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권수용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서로 빚은 없는 걸로 하죠.”
“그래.”
“…….”
“…….”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 흐르는 무겁고 어색한 분위기는 금세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염되었다.
서로 웃고 떠들던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말수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망할, 어색해 죽을 거 같네.’
시현은 지금의 상황이 굉장히 불편했다.
한시라도 빨리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예전에는 부담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건지.
아쉬운 마음에 작게 혀를 찬 그 순간이었다.
“어? 저게 뭐야?”
이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히 이곳에 모인 전원의 시선이 이나연을 따라 하늘로 향했다.
“어?”
“와…… 뭐지?”
“하늘이…… 갈라지고 있네?”
김영운의 표현이 가장 정답에 근접해 있었다.
그의 말대로 저 먼 곳의 하늘이 갈라지고 있었다.
갈라진 틈에서부터 빛이 쏟아지고 묘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어찌 보면 성스럽기까지 한 광경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소수에 해당하는 참가자들의 경우, 반응이 확연하게 달랐다.
“이게 대체 무슨…… 강림이라고?”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시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갈라지는 하늘.
들려오는 종소리.
쏟아지는 빛.
모든 것이 강림 이벤트가 시작되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강림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강림한 신은 인간을 멸시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편이다.
어떻게든 인류가 악마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무언가를 던져 주고는 한다.
그것이 바로 맹세였고.
하지만 신은 자신이 원한다 해서 지상에 강림할 수 없다.
인과율이라 불리는 법칙으로 인해 그들이 강림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그 조건이라 함은 바로 외신의 각성이다.
그것도 단순히 눈을 뜨거나 조금 꿈틀댈 수 있는 수준으로 깨어난 게 아니라, 본연의 힘을 완전히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완전무결한 각성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 땅 어딘가에 외신 하나가 완전히 각성을 이루었다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대게 신들은 외신과 직접 맞부딪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인과율로 인한 교환비율은 1:1인데 반해 외신이 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뭐가 이렇게 빨라? 첫 번째 강림은 한참 남았을 텐데…….”
예기치 못한 상황에 초조해진 한소현이 손톱을 씹었다.
“저게 원인이겠죠.”
시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천천히 영역을 넓히고 있는 붉은 하늘에 시선을 줬다.
저 중심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직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저것이 원인이 아니라면 뭐가 원인이겠는가.
“그래도 어느 정도 여유는 있을 줄 알았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겹쳐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빨리 움직일 걸 하는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지금은 후회나 반성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민서라의 다그침 덕에 두 사람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가장 먼저 강림하는 신이 누구였죠?”
“로아 렐레아.”
시현이 단 1초의 딜레이도 없이 즉답했다.
강림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꿰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 하필이면 로아 렐레아.”
민서라의 표정이 죽었다.
그도 그럴 게, 원작에서의 로아 렐레아는 지상에 강림하는 신 중 가장 인류에게 무관심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겁이 많아서 외신과 싸우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그렇기에 자신의 힘을 일부 담아 만들어 낸 맹세를 던져 놓고 도망쳐 버린 비열한 신이기도 했다.
“상황이 좋지 않으니 하다못해 라디아턴트라거나…… 그런 신이 강림했으면 좋았을 텐데. 적어도 라디아턴트는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잖아요.”
“이번에 강림한 신은 로아 렐레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네?”
영락없이 로아 렐레아의 강림 이벤트가 시작되리라 생각하고 있던 민서라는 시현의 반대 의견에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비단 민서라뿐만이 아니었다.
원작에서 가장 큰 이벤트이니만큼 한소현과 진우혁도 강림 이벤트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 역시 첫 번째 강림에 등장할 신은 로아 렐레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시현의 생각은 달랐다.
“원작은 이미 뒤틀렸습니다. 어떤 신이 강림할지는 아무도 몰라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민서라의 질문에 시현은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고 꺼내 놓았다.
“제게 로아 렐레아의 맹세가 있으니까요. 이미 우리가 아는 인과는 무너졌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미 지상에는 아르하가 강림 이벤트 없이 강림한 상태이며,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던 발푸르기스의 강림 이벤트까지 있었다.
인과는 뒤틀렸다.
그렇다면 원작과 달리 다른 신이 강림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아, 제발 로아 렐레아만 아니면 좋겠어요. 그놈은 지금의 상황을 타파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만약 로아 렐레아가 들었다면 거품을 물고 싸우자며 달려들었을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네 명의 구원자들은 신의 강림을 기다렸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쏟아지는 빛이 눈부실 정도로 강렬해졌을 때.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로아 렐레아는 아니야.’
시현은 가장 먼저 안도했다.
예상을 깨고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로아 렐레아가 강림했다면, 꽤나 암담했을 것이다.
그러나 강림한 신은 로아 렐레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한 번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제가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붉은 하늘 아래에서는 여러 가지 능력에 제한이 있었다.
먼저 참가자를 위한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고, 공간 및 시간 계열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붉은 하늘을 벗어난 지금은 그런 제한이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원한다면 포탈을 열어 수 초 만에 강림이 이루어진 장소로 다녀오는 게 가능하다.
“나도 데려가.”
“저도요!”
한소현과 민서라가 적극적으로 의사 표명을 해 왔다.
둘 다 원작에서 글로만 본 강림 이벤트를 자신의 두 눈으로 목격하고 싶다는 욕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같은 참가자인 진우혁의 경우, 호기심 이상으로 두려움이 컸는지 얌전했다.
“알겠습니다.”
조금 정신력의 소모가 커질 뿐, 딱히 힘든 일도 아니었기에 시현은 두 사람을 데리고 포탈을 열었다.
강림 이벤트가 발생한 지역은 황폐화 되어 버린 공주시의 한복판이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으로 인해 주변 지역은 제대로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강력한 신성으로 인해 주변에 악마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를 대신해 인근에 숨어 살던 생존자들이 나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오오…….”
“신이시여. 저희를 구원하소서.”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시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활짝 열린 하늘로부터 빛의 계단이 지상까지 이어졌으며, 남자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든 생각은 ‘아, 내려오기까지 더럽게 오래 걸리겠네’였다.
지금 속도로는 최소한 두세 시간은 걸릴 것 같았다.
“음…… 밥이라도 먹고 올까요?”
같은 생각을 했는지 민서라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요즘 매일 전투 식량만 먹었으니까 병원으로 돌아가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오면 시간이 딱 맞을 거 같은데.”
그녀의 제안에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생각이네요. 한소현 씨는 어떻습니까?”
“호의는 고맙게 받을게.”
한소현도 딱히 두 사람의 의견에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만큼 신의 강림은 느긋하게 이루어졌다.
그게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위엄을 지키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괜한 시간 낭비를 피하기 위해 막 포탈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에이, 씨발.]
근엄하고 신비로운 목소리의 욕설이 들려왔다.
“……?”
저렴한 욕설에 당황한 것은 비단 시현만이 아니었다.
공간 이동을 준비하던 두 여성도, 성스러운 강림의 현장에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아 기도하던 생존자들도.
모두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놈의 허례허식에 얼마나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거야? 몇 시간 동안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며 계단 내려가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나. 진짜 쓸모없는 새끼들. 외신한테 물려서 싹 다 뒤졌으면 좋겠네.]
남자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으나, 그의 음성은 지상에 모인 모든 인간들의 귀에 똑똑히 파고들었다.
남자는 제 성질머리를 이기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그러자 그의 앞으로 쭉 뻗어 있던 빛의 길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남자는 만족한 듯 웃었다.
[이제 좀 낫네.]
시현은 그 얼굴이 굉장히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지? 분명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얼굴 같은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곳은 Re write라는 이름의 소설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세계이고, 저 남자는 이 세계를 내려다보는 수많은 신 중 한 명이다.
당연히 면식이 없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낯이 익었다.
그러는 사이, 남자는 지상에 안착했다.
한 계단씩 내려올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말이다.
검은색 일통의 정장에 남자치고는 다소 긴 머리카락.
그는 마찬가지로 흑색의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어느덧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적당한 거리에서 원을 만든 채 말이다.
그게 불쾌했는지 남자는 표정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돌아가라.]
그러자 사람들은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채 인근 건물 안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춰 버렸다.
민서라와 한소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어?”
“뭐, 뭐야. 몸이 멋대로…….”
두 사람 역시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듯 옆에 있던 건물로 빨려 들어갔다.
쭉 뻗은 도로에 남아 있는 이는 여전히 자신의 넥타이를 만져 대는 남자와 시현뿐이었다.
시현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왜 나만 예외로 둔 거지?’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도로 위를 깔끔하게 청소한 건 눈앞의 남자가 행한 일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남자는 시현만큼은 예외로 뒀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남자는 시현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입을 열었다.
[…….]
하지만 목소리가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뭡니까?”
시현의 대꾸에 남자는 팍 인상을 썼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
이번에도 역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위쪽으로 길게 토해 낸 한숨에 남자의 앞머리가 살랑거렸다.
[이런 씨발. 이 거지같은 인과율. 이게 다 이한울 그 멍청한 놈 때문이야. 그 인간이 다 된 밥에 재만 뿌리지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귀찮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이를 갈던 남자는 시현에게 시선을 줬다.
[어쩔 수 없지. 인과율 때문에 내 입으로 설명하기에는 그른 것 같으니까, 지금 당장 해운대로 가라. 거기에 가면 네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거다.]
“해운대라면…….”
시현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단순히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해수욕장이 있는 장소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참가자들에게 해운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해운대는 원작에서 마지막 전쟁의 무대가 되는 곳이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