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지금의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지? 무의미한 시간 낭비일 뿐.]
깊은 어둠 속.
살그머니 눈을 뜬 남자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이 넓은 공간 안에 남자의 질문에 답해 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자는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대답이 돌아왔다.
대답은 다른 누구도 아님 남자 본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는 완벽해야 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약점이 된다.]
남자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정신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약점은 없애야 한다. 이미 조각이 놈들의 손에 들어간 이상 늦었다.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다행이도 그것의 성능은 극히 제한적이니. 지금 각성을 미뤄가며 하고 있는 일은 그게 원인인가? 정답. 이것이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 줄 한 수가 될 것이다.]
딱딱한 말투로 혼자 문답을 계속하는 와중에도 남자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의 손이 허공에서 춤을 출 때마다 하늘 위로 솟구치는 붉은 기둥에 무언가가 섞여들었다.
인간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고차원의 무언가는 붉은 지역을 벗어나 구름 위에 몸을 숨긴 채 어디론가 향했다.
아름다운 백사장이 펼쳐진 어느 바닷가에 도착한 순간, 무언가는 급격히 고도를 낮췄다.
그러곤 물속으로 떨어졌다.
남자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놈의 패배가 머지않았다.]
* * *
“흐아아암.”
이재아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오늘도 평화롭네.”
그녀는 작게 파도치는 바다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쉽게도 1인 근무 체제의 특성상 그녀의 중얼거림에 대답해 주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1차 바리케이드 때문에 악마들은 이 근처에 접근도 못 하는데, 리더는 대체 뭘 경계하라고 하는지 모르겠네. 안전한 근무지이기는 하지만 심심하단 말이야.”
끝을 모르는 지루함에 견디지 못한 그녀는 다시 한번 하품을 했다.
찔끔 눈물이 나왔다.
소매로 대충 눈물을 슥 비벼 닦은 그녀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줬다.
겨울이라지만 사람은커녕 발자국 하나조차 찾아볼 수 없는 모래사장은 아름다웠으나, 외로움이 느껴졌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근무시간은 아직 네 시간 정도나 남아 있었다.
“하아암.”
터져 나온 세 번째 하품.
결국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해서는 안 될 망언을 내뱉고 말았다.
“이쯤 되면 무슨 사건이라도 하나 터졌으면 좋겠네.”
아무런 생각 없이 던진 한 마디.
이에 화답하듯 하늘로부터 무언가가 떨어졌다.
마치 유성처럼 엄청난 속도로 내려온 무언가는 그녀가 지켜보고 있던 바다에 낙하했다.
촤아아악!
해수면을 때리는 강한 충격에 바닷물이 밀려나며 커다란 파도가 모래사장을 덮쳤다.
지루함에 반쯤 감겨있던 이재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뭐, 뭐야. 유성이라도 떨어진 건가?”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근무 도중 발생한 이벤트에 그녀의 눈에서 졸음기가 싹 달아났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긴장감이다.
뭐라도 이벤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진짜 사건이 터지기를 바라던 건 아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평화가 제일 아니겠는가.
‘평범한 유성은 아닌 거 같았는데…… 일단 연락은 해야겠지?’
그녀는 곧장 본진에 무전을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혼자만 거닐던 백사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복장은 중구난방이었으나 좌측 어깨에는 하나같이 등대 소속의 구원자임을 상징하는 엠블럼이 박혀 있었다.
“뭐야, 사건 터졌다고 해서 와 봤는데. 뭐 아무렇지도 않네?”
“그냥 진짜 운석이 떨어진 거 아니야? 천문학적인 확률이기는 하지만,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
모래사장에 모인 구원자들은 각자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중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이재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리더에게 연락을 해 봤니?”
“아까부터 계속 시도는 해 보고 있는 데요…….”
대답은 공손했으나 그녀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무언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연락을 안 받아요. 그쪽에도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흐음…… 연락이 안 된다니. 걱정이구만.”
“이제 어쩌죠?”
그녀는 발만 동동 굴렀다.
뭐라도 좋으니 사건이 있으면 좋겠다고 바란 사람 치고 그녀는 변화에 취약했다.
리더에게 연락을 취해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지시를 받아야 하는데 연락조차 되지 않는 상황.
결국 이 지역의 책임자인 그녀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일단 바다에 떨어진 게 뭔지 확인부터 해 보는 좋겠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결정은 내렸지만, 썩 자신이 없어 보이는 이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인은 고개를 끄덕여 그녀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그녀의 지시에 곧장 두 명의 구원자가 수중 장비를 착용하고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아마 별거 아닐 거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이재아는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았다.
무언가 변화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과거의 어리석은 자신을 저주하고 멍청하다고 욕하며 말이다.
그러나 이재아의 기대는 배신당하고 말았다.
바다로 들어간 두 남자가 돌아왔다.
엄청난 속도로 헤엄쳐 뭍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한 그들은 수중 장비를 대충 벗어 버리고는 질주했다.
그들의 표정은 명백하게 겁에 질려 있었다.
“뭐야? 왜 그래요?”
“무슨 일인데 그래?”
두 남자의 복귀만 기다리던 구원자들은 당황해서 그들을 붙잡고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비켜! 막지 마!”
“도망가! 도망가야 한다고!”
그들은 자신을 붙잡는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마치 사신에게 쫓기고 있는 것처럼 그 기세가 워낙 살벌해서 다른 구원자들은 두 사람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저래?”
“도망가야 한다니…… 악마라도 있는 건가?”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바다로 향했다.
바다에서 이변이 발생하고 있었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만들어지며 바다가 거칠어졌다.
소용돌이의 직경은 대충 봐도 수십여 미터에 이르렀다.
그 중심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알인가?”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의 말처럼 그것은 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의 겉 부분을 감싸고 있는 것은 단단한 껍질이 아닌, 희고 고운 깃털이었다.
마치 천사가 여러 장의 날개를 이용해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생김새다.
“되게 예쁘다.”
이재아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날개를 보고 있자면, 아름답다는 느낌이 뇌리를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아까 그 두 사람은 뭘 보고 도망친 거지?”
바다 한복판에 나타난 새하얀 날개의 알이라니.
확실히 비정상적인 광경이기는 하다.
그러나 저렇게 공포에 질려서 도망을 칠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그 두 사람은 저 날개 속에 감춰져 있는 무언가를 보고 도망쳤을 수도 있겠군.”
노인이 그럴싸한 추측을 내놓았다.
“전투준비!”
모래사장에 모인 구원자 중 이재아 다음으로 직급이 높은 구원자가 소리쳤다.
날개 알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따져 보았을 때, 악마일 가능성이 높다.
다행이도 크기를 보아하니 대형까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중형 이하라면 설사 돌연변이라 한들 여기 있는 인원만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등대는 그런 집단이니까.
그러나 이는 심각하게 잘못된 판단이었다.
스르륵.
날개가 서서히 펼쳐지며 소중한 보물처럼 꽁꽁 싸매고 있는 안쪽이 모습을 드러냈다.
틈 사이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붉은 눈동자였다.
“흐억!”
가장 선두에 서 있던 구원자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곤 그 자리에 주저앉아 거품을 물며 그대로 졸도해 버리고 말았다.
“어어? 얘 갑자기 왜 이래?”
근처에 있던 구원자가 기절한 남자를 돕기 위해 다가갔다.
그러나.
“으아아아악!”
그 역시 갑자기 눈을 까뒤집고 비명을 지르며 벌벌 떨기 시작했다.
바지 사이와 아래쪽 모래사장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남자는 뒤로 넘어지며 경련을 일으켰다.
이재아는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위험해! 당장 도망치거라!”
노인은 이재아의 등을 떠밀었다.
그래 놓고 본인은 쓰러진 이들을 구하기 위해 바닷가를 향해 달렸다.
해변은 아비규환이 되어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거나 경련을 일으키는 자들이 속출했다.
멀쩡한 사람들은 당황해하거나, 쓰러진 이들을 돕거나, 일단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도망쳤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크허억!”
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있는 곳을 강하게 붙잡은 채 쓰러져서 더 이상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으, 으아아…….”
이재아는 달아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 이재아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만한 자들이여.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마치 하이톤의 목소리를 가진 남성과 로우톤을 가진 여성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하게 말을 쏟아 내고 있는 듯했다.
그 기묘한 음성에 이재아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아…….”
이재아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의 날개는 완전히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썩어 문드러진 시체였다.
붉은 눈에 여섯 개의 팔을 가지고 있으며, 목이 보통 사람들보다 네 배는 길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지저분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마치 악마의 외형을 가진 무언가에 천사의 날개를 달아 놓은 듯한, 조화롭지 않은 생김새를 가진 그것과 눈이 마주친 순간.
이재아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공포를 느꼈다.
저항할 수 없는 공포에 이재아는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잃었다.
* * *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네.”
“네? 이게 별거 아니었다고요?”
시현의 중얼거림을 주워들은 이찬열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상대는 대형 악마에게 기생한 촉수 괴물이다.
비록 대형 악마 특유의 경이로운 신체 능력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촉수의 능력은 숙주의 강함에 비례해 강해진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형 악마에 기생한 촉수 괴물이 사용하는 촉수의 위력은 상당했다.
어지간한 구원자라면 스치기만 해도 목숨을 잃을 정도.
그런 적을 두고 별거 아니라 언급하는 시현을 보고 있자니, 이제는 누가 괴물인지 의심이 됐다.
시현은 검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 내고는 대형 악마의 사체 위에서 뛰어내렸다.
“돌아가죠. 다른 사람들이 무사히 빠져나갔는지 걱정되네요.”
인원수에 맞춰 핏빛 결정을 모으고 사전에 익숙해질 시간을 제공하기는 했지만, 반지의 주인인 시현과 너무 오래 떨어져있으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붉은 지역 내에 존재하는 촉수 괴물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무사히 빠져나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빠져나가지 못한 채 고전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시현은 빠르게 일행의 뒤를 쫓았다.
다행이도 시현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시현이 일행과 다시 만난 장소는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하고서도 한참을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장소였다.
“오빠!”
저 멀리.
푸른 하늘 아래에서 이나연이 손을 흔들며 시현을 반겨 주었다.
그녀의 옆에는 익숙한 얼굴들 외에도 반가운 얼굴들이 추가로 존재했다.
“오랜만이네.”
한소현.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를 해 왔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