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예언자 김영운.
그는 자신이 본 미래에 등장한 남자가 대전에서 발생한 붉은 하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열쇠라고 언급했다.
그 남자의 얼굴과 눈앞에 있는 이찬열의 얼굴은 완벽하게 일치했다.
즉, 대전을 구할 열쇠는 이찬열이라는 소리다.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인데.’
시현으로서는 서로 검을 겨누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인도자 이찬열은 중요한 인물이다.
가능하다면 밑으로 영입하는 것이 좋고, 그게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해 둬야 한다.
그러나 첫 단추부터가 꼬여 버렸다.
‘그래도 아직 돌이킬 수 없는 정도는 아니야.’
자신을 응시하는 이찬열의 눈에 강한 경계심은 존재하되, 원망과 증오까지는 깃들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현은 검을 거뒀다.
“……?”
마치 자신을 아는 듯 행동하던 시현이 검까지 거두니 이찬열로써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리면서도 시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유추하기 위해 용을 썼다.
“일단 장소를 옮기죠.”
시현의 제안에도 이찬열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밟고 있는 대지에 뿌리를 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미동조차 없는 이찬열을 자극하기 위해 시현은 새로운 미끼를 던졌다.
“어째서 제가 당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
굉장히 궁금하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즉, 자신의 호기심보다 뒤에 누워서 아직까지도 꿈틀거리고 있는 촉수 괴물의 숙주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는 것은 곧 협상의 재료가 된다는 소리이다.
“한 번 촉수 괴물의 숙주가 된 사람을 원 상태로 되돌리는 방법은 없습니다. 심장도, 뇌도 먹힌 사자를 부활시키는 방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물론 예외는 존재한다.
시간 조작을 사용하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한소현이 가진 회복이라면 심장이 파괴되는 것과 동시에 회복을 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지금의 상황에서 효과를 볼 수 있는 권능은 아니다.
“…….”
검을 쥔 이찬열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시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시현은 일부러 그의 희망을 꺾어 놓는 이야기를 꺼냈다.
원래 좋은 말 후에 나쁜 말을 하는 것보다는, 나쁜 말 후에 좋은 말을 하는 편이 더 강한 인상을 남기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원하신다면 적어도 시도 정도는 해 볼 수 있습니다. 정신 오염을 제거하는 정화, 상처를 낫게 하는 회복, 그리고 라디아턴트의 권능으로 상태 이상을 제거해 볼 수도 있고요. 정 안 된다면 붉은 하늘을 걷어 낼 때까지 감금해 두는 것도 방법이겠죠.”
우호적인 시현의 접근에 날을 세우고 있던 이찬열의 기세도 다소 수그러들었다.
그는 머뭇거리며 뒤를 확인했다.
팔다리가 다 잘려 나가고 촉수가 모두 끊어진 상황에서도 이찬열을 공격하기 위해 꿈틀거리는 촉수 괴물의 숙주.
가장 존경하고 친애하는 리더 정아윤을.
“……방금 당신이 언급한 방법을 사용하면 리더를 구할 수 있는 겁니까?”
“가능성은 현저하게 낮습니다. 무엇 하나 확인된 방법이 없으니까요.”
사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끔은 진실을 숨길 줄도 알아야 한다.
절망스럽기만 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 이찬열이 어떤 비관적인 선택을 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 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고민 끝에 이찬열은 고개를 숙였다.
“이제 원하는 것을 말씀해 주시죠.”
여전히 이찬열의 눈빛에서 경계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움을 주는 것은 고맙지만, 어째서 시현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인지 아직 파악하지 못한 까닭이다.
시현은 슬쩍 주변을 살폈다.
머지않은 곳에서 또 다른 촉수 괴물이 접근해 오고 있는 게 보였다.
이찬열을 구워삶기에 이 장소는 그리 적합하지 않았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일단 자리를 옮기실까요?”
얼굴 가득 미소를 그린 시현의 말에 이찬열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 *
시현이 찾은 택배 차량은 숙주가 되어 버린 정아윤을 옮기는데 아주 최적화되어 있었다.
생존자들을 붉은 지역 바깥까지 옮기는데 벙커 역할을 해 줄 짐칸이 지금은 정아윤을 가둘 감옥 역할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엔진이 망가졌기에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차를 미는 방식으로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니, 상당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병원의 창고에 쌓여 있던 전투식량으로 간단하게 배를 채운 시현은 곧장 이찬열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윤시현이라고 합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이찬열입니다.”
처음에는 간단한 자기소개부터 시작했다.
이찬열의 소개에는 다소 날카로운 가시가 붙어 있었지만 말이다.
첫 만남에서 시현이 소개하지도 않은 이름을 언급했기 때문인지, 그의 경계심으로 이루어진 벽은 상당히 두꺼웠다.
먼저 그것을 해결해야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 같았다.
“이찬열 씨, 만약 적중률 100%의 예언을 하는 구원자가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예언이요? 혹시 등대의 김영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는 이름입니까?”
“그럼요. 아니, 애초에 모르는 게 이상하죠. 아무리 세상이 요지경이 되고 소식의 전달이 굉장히 느려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지역 간 정보가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니니까요. 제 경우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구원자에 대한 소식은 늘 업데이트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찬열은 조금 들떠 보였다.
예언이라는 분야에 흥미가 있는 건지 김영운이라는 인간 자체에 흥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으나, 조금 전보다 시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얼마 전 김영운 씨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러고는 대전에 발생한 사건에 대해 협력을 요청하더군요. 붉은 하늘을 걷어 내지 못한다면 인류는 완전히 멸종할지도 모른다고요…….”
“그, 그렇군요.”
이찬열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까지 이찬열이 붉은 하늘 아래를 누비고 다닌 이유는 어디까지나 동료들의 복수를 하기 위함이었다.
설마하니 붉은 하늘이 그 정도 규모로 위험할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을 터.
굉장히 당황하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그런데 예언이랑 제 이름을 알고 계시는 게 무슨 상관이 있죠?”
“그의 예언에서 당신이 등장했습니다.”
“……네? 제가요?”
“네. 듣자하니 대전에서 붉은 하늘을 걷어 내기 위해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라고 하던데요.”
“……진짜?”
“사실 어떻게 해야 당신을 만날 수 있을지 쭉 고민이었습니다만, 이렇게 만나게 돼서 다행이네요.”
시현은 웃었다.
그에게 최대한 자신이 우호적이고 무해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도록.
고민 끝에 이찬열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 말은 시현 씨의 목적이 붉은 하늘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봐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은 게 아니라, 그게 맞습니다. 저 말고도 등대의 한소현 씨도 다른 장소에서 붉은 영역을 공략 중입니다.”
“등대의 한소현! 정말 그 한소현 님이 대전에 와 계시다고요?”
이찬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찬열의 눈에서 조금 전까지 자리하고 있던 경계심은 눈 녹듯 사라져 있었다.
이를 대신한 것은 강한 동경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신중함을 담아내던 모습과는 동떨어진 수다스러운 모습이 과연 동일인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굉장히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럼요. 그 분은 저처럼 이름만 구원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인류를 구원할 분이라고 생각해요. 언젠가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우리 리더는 그걸 꽤 싫어했지만요.”
정아윤의 이름이 나오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기 넘치던 그의 표정이 금방 어두워졌다.
하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딱히 한소현 님이 아니더라도 전국 각지에서 이름을 날리는 구원자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강원도 23사단의 이현중, 인천연합의 정은수, 아크로틱의 진이안……. 지금은 망했지만 교단의 이한울도 사실 가장 정상에 가까운 구원자이긴 했죠. 그리고 세력은 작지만 개인의 무력으로 정상을 꼽으라면 누가 뭐라 해도 호텔의 윤시현이…… 윤시현…… 윤시현?”
이찬열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멍하니 눈만 깜빡거리던 이찬열이 겨우 입을 열었다.
“본인?”
“본인.”
“……오.”
그 순간을 기점으로 이찬열에게서 느껴지는 모든 적개심과 경계심은 사라졌다.
* * *
당연한 말이지만 촉수 괴물의 숙주가 되어 버린 정아윤에게는 정화의 권능도, 치유의 권능도, 라디아턴트의 권능도 통하지 않았다.
치유의 권능의 경우, 부러진 팔다리와 끊어진 촉수를 복구시키는 바람에 오히려 진땀을 흘렸을 정도다.
하나씩 방법이 사라질 때마다 이찬열의 표정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은 이찬열은 눈물을 흘렸다.
이제 남은 건 깨어난 외신을 봉인하고 붉은 하늘을 거둬 낸 후 지켜보는 방법뿐이다.
이찬열은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으나, 시현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었다.
붉은 하늘이 걷히고 어둠이 가득하던 대전에 빛이 쏟아지게 되면, 모든 촉수 괴물이 사망한다.
그렇다고 촉수 괴물의 숙주가 되어 있던 자들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다.
이미 뇌와 심장이 파 먹혀 죽은 이들이 무슨 수로 살아 돌아온단 말인가.
그러나 시현은 굳이 그 사실을 이찬열에게 전하지 않았다.
말해 준다 한들 믿어 줄 것 같지도 않았고, 괜한 절망감을 심어 줘서 이찬열의 전투력을 떨어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앞으로 있을 싸움에서 이찬열은 중요한 인도자 역할을 해 줄 테니까.
“시현 씨, 이쪽은 준비 끝났어요.”
생존자들과 함께 이곳을 빠져나갈 준비를 마친 민서라가 시현을 호출했다.
시현은 아직까지도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이찬열에게 시선을 줬다.
“저희도 일단 밖으로 나가도록 하죠. 계속 안쪽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잠깐의 휴식과 보급이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리더는 어떻게 하죠?”
이찬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밖으로 데리고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현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두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생존자들이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게 아니더라도 빛 아래로 데리고 나가면 촉수 괴물은 사망합니다. 당연하지만 숙주가 살아 돌아오지도 않고요.”
“그렇다면 여기에 두고 갈 수밖에 없겠네요.”
이찬열은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다른 촉수 괴물들이 그녀를 공격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시현의 추가적인 확언이 있고 나서야 이찬열은 몸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향한 시현은 입구 앞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택배용 트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짐칸은 촉수 괴물의 공격을 몇 번 정도는 버틸 수 있게끔 보강되어 있었으며, 엔진 역시 멀쩡한 것으로 교체되었다.
“호석아, 수고 많았다.”
“에이, 뭘 이정도 가지고. 어려운 일도 아니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환경이 열악하고 이렇다 할 도구도 없는 상황이었다.
정비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무지한 시현이었으나, 신호석이 해낸 일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다음에 어떤 방법으로든 상을 줘야겠다고 다짐하며, 시현은 차량에 올랐다.
운전석이나 조수석이 아닌, 짐칸의 위로 말이다.
“자, 다들 각자 위치로.”
시현의 지시가 떨어지자, 전원이 사전에 지시받은 대로 자리를 잡았다.
운전은 임주찬의 몫이었다.
짐칸에는 생존자들이 들어갔다.
나머지 인원은 호위하듯 차량의 양옆에 섰다.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권수용이 은근슬쩍 대열에 합류하며 말했다.
권수용은 제법 실력이 좋은 구원자다.
그의 도움을 받으면 붉은 지역을 보다 쉽게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권수용 씨의 자리는 저쪽입니다.”
시현이 가리키는 곳은 택배 차량의 짐칸이다.
시현의 권능으로 인해 잘려 나간 두 팔은 어느 정도 회복된 상황이었으나,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몸 상태가 불량한 권수용을 괜히 최전방에 세웠다가 죽기라도 하면, 한소현에게 빚을 지운다는 계획이 물거품 되어 버린다.
“……알겠습니다.”
자신이 고작 짐덩어리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권수용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시현을 귀찮게 하지 않고 얌전히 짐칸에 올랐다.
짐칸의 문이 완전하게 닫히는 것을 확인한 시현이 운전석 문을 두드렸다.
“그러면 출발하겠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임주찬이 시동을 걸며 소리쳤다.
차량이 이동하기 시작하고 민서라가 외부로부터의 진입을 막기 위해 세워 놓은 바리케이드를 치웠다.
차량이 지상으로 향하기 시작하자, 시현을 포함한 일행 전원이 후드를 뒤집어썼다.
머지않아 차가운 빗줄기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