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인도자는 이찬열이 늘 최상의 결과를 맞이할 수 있도록 그에게 길을 제시해 주었다.
처음 몇 번은 확실하지 않은 정체불명의 감각을 불신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다르다.
몇 번이고 결과를 내며 이찬열을 실망시키지 않은 인도자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인도자를 믿었다.
믿고 인도자가 제시하는 길을 따라 달렸다.
그런데 어째서 그곳에 그녀가 있단 말인가.
정아윤.
붉은 비를 맞고 괴물이 되어 버린, 이찬열의 은인이자 리더인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너 때문에! 오빠랑 내가 힘들게 구한 차가 못 써먹게 돼 버렸잖아!”
날카롭고 살벌한 여성의 외침.
처음 보는 젊은 여성이 괴물이 되어 버린 정아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니, 과연 그걸 전투라 불러도 될까 의심이 들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일방적인 폭력이라 표현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정아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촉수를 우악스럽게 잡아 뜯는 모습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팔다리를 부러뜨려 놓고 실컷 정아윤을 괴롭힌 여성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머리를 날려 버리려했다.
“…….”
그 순간 이찬열은 저도 모르게 행동했다.
정아윤은 죽었다.
숨이 끊어지는 것을 자신이 직접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 이후 정아윤은 끔찍한 촉수 괴물이 되었다.
지금까지 붉은 지역에서 수도 없이 많은 촉수 괴물을 만났다.
촉수 괴물을 원래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한 시도를 안 해 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이미 심장과 뇌를 촉수 괴물에게 먹히고 온 몸이 안에서부터 썩어 버린 숙주들은 조종당하는 시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저건 정아윤이 아니야. 그저 괴물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몸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살벌하기 짝이 없는 성격을 가진 여자와 정면으로 검을 맞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전투의 여파 때문인지 그녀로부터 발해지는 살기에 몸이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그를 옥죄어 오던 살기는 금세 사라졌다.
여성이 살기를 거둔 게 아니었다.
이찬열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게 널 지켜 주는 날이 올 거야. 아, 이건 네가 가진 전투력에 비해 상태 이상 내성이 워낙 낮아서 주는 거니까. 늘 목에 걸고 다녀. 안 그러면 팀에서 퇴출시켜 버릴 거야.”
그렇게 말하며 힘들게 구한 보물을 자신의 목에 걸어 주던 정아윤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인도자조차 모르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 포기하기에는 이르지.’
그는 마음을 고쳐 먹었다.
“죄송하지만 뒤에 있는 여성은 제가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물러나 주셨으면 합니다.”
“사람?”
그에 여성은 조소했다.
“내가 봤을 때 사람은 없는데? 거기 있는 건 그저 악마와 다를 바 없는 괴물일 뿐이야. 가만 방치해 두면 또 다른 희생자를 낳는 괴물.”
여성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물론 이찬열 역시 흔들리지 않았다.
인도자가 자신을 이곳으로 인도해 정아윤과 만나게 했다는 것은 분명 무언가 의미가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으며 검을 맞대고 있는 상황.
먼저 손을 쓴 것이 누구인지는 이찬열조차 알 수 없었다.
삽시간에 수차례 공방이 오갔다.
육탄전은 호각이다.
이찬열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고 판단한 여성은 구원자의 특권인 권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검에 강한 바람을 휘감는 건가…… 심플하지만 강하네.’
검을 맞대기만 해도 팔이 부러질 정도로 여성의 검을 휘감은 폭풍의 세기는 강력했다.
그러나 이찬열은 당황하지 않았다.
뒤로 물러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으며 검을 휘두른다.
모든 것은 인도자가 안내해 주고 있었다.
까앙!
검과 검이 맞닿았다.
이찬열은 팔이 부러지지도, 바람에 찢겨 나가지도 않았다.
그의 검은 정확하게 폭풍의 빈틈을 파고들어 있었다.
“……!”
여성은 크게 당황해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자신의 권능이 막힐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게 분명했다.
이찬열은 그녀의 검을 밀어냄과 동시에 돌려 차기로 그녀의 복부를 걷어찼다.
여성은 표정을 구기며 뒤로 한참이나 밀려났다.
외피 때문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지만, 여성은 자신의 공격이 막힌데다가 한 데 얻어맞기까지 한 까닭에 상당히 화가 쌓인 모양이었다.
“이게 진짜……!”
여성이 정면을 향해 손을 뻗는다.
인도자는 긴급 회피를 지시했고, 이찬열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던졌다.
콰아아아!
여성의 손끝에서 시작된 폭풍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이찬열이 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미친…… 단순히 무기 강화 계열이 아니라 사출형이었어? 게다가 저 위력…… 어떻게 되먹은 거야.”
저 정도 위력을 내는 권능이 존재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이찬열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이 상대하는 게 구원자인지 대형 악마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러나 큰 기술인만큼 소모도 명백하다.
티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다소 거칠어진 호흡과 땀방울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몇 번만 피하면 이길 수 있어.’
그의 권능인 인도자는 늘 이찬열에게 길을 제시해 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인도자는 그에게 승리로 향하는 길을 제시해 줄 것이다.
그러나.
“구원자?”
제 3자가 난입해 왔다.
여성과 비슷한 디자인의 외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와 한 패인 게 분명했다.
‘젠장…… 저 여자 하나만 해도 벅찬데 지원이라고?’
이찬열은 본능적으로 인도자를 사용했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인도자라면 해결책을 제시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자로부터 반응이 없었다.
분명 정신력은 사용됐는데 어디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그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전에도 한 번 이런 경험이 있었다.
‘내가 허무맹랑하고 불가능한 주문을 했을 때 인도자는 침묵해. 즉 지금 내 힘으로는 저 남자를 이길 수 없다는 뜻이겠지.’
즉 무력으로는 저 남자가 이찬열보다 한 수 위라는 말이 된다.
“…….”
식은땀이 흘렀다.
이찬열이 누구인가.
무려 4레벨의 구원자다.
지금까지 떠돌이 생활을 하며 수많은 구원자들을 만나봤지만, 단 한 번도 자기보다 강한 자는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모든 구원자 중 가장 레벨이 높은 건 아닐까 싶었지만.
역시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정면으로는 이길 수 없어. 그렇다면 정아윤을 데리고 달아날 수 있는 방법은?’
그는 조금 질문을 바꿔봤다.
A라는 질문에 인도자가 침묵하더라도 질문을 A-1정도로 살짝 고친다면 반응하는 경우가 몇 번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인도자는 반응이 없었다.
‘달아나는 것도 안 된다는 건가? 그렇다고 정아윤을 놓고 갈 수는 없고…… 그렇다면…….’
남녀가 대화를 나누는 짧은 사이에 이찬열은 몇 번이고 인도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대답이 돌아오는 경우는 없었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다가왔다.
이찬열은 눈을 질끈 감았다.
* * *
“오빠!”
이나연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궁지에 몰린 쥐처럼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고만 있던 남자가 시현을 향해 돌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제법 매섭고 날카로운 공격이다.
방심하고 있었다면 충분히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할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시현은 전혀 방심하지 않고 있었다.
이나연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계속해서 남자를 향해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바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콰앙!
검과 검의 격돌.
담겨 있는 힘이 상당하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시현의 아래였다.
‘단순히 무력으로는 나연이와 동급. 아마 저 빛나는 목걸이가 상태 이상을 막아 주는 거 같은데…….’
어디서 이런 강자가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현의 아래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일단은 제압하고 정체와 목적을 캐묻기 위해, 시현은 본격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그의 검에 흑색의 기운이 맺혔다.
죽이는 것이 아닌 제압이 목적이기 때문에 불꽃까지 두르지는 않았다.
“크윽!”
시현이 처형의 권능을 사용한 후부터 싸움은 크게 기울었다.
남자의 표정에 다급함이 맺혔다.
그러나 우위를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시현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강하네.’
구원자의 레벨이라면 시현 쪽이 높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싸우는 기술을 알고 있었다.
이전에 검의 군주 박화영이 동레벨의 구원자 세 명을 상대로도 우위를 점하던 것처럼, 눈앞의 남자 역시 단순히 기술만으로 레벨 차이를 어느 정도 극복한 것이다.
기술이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시현에게는 이렇다 할 스승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기술을 배우는 것은 포기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과 만날 때면 괜히 부러운 마음이 들고는 했다.
‘이대로는 상당히 시간이 걸리겠어. 치유의 권능을 사용하는 수밖에.’
시현이 선택한 전략은 뼈를 내주고 살을 취하는 것이었다.
멍청한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치유의 권능을 가진 시현이라면 큰 손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전략이었다.
더군다나 처형의 권능이라면 아주 작은 상처도 크게 부풀릴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되면 살을 취하는 척하며 뼈를 취하는 것도 노려볼 수 있다.
시현은 일부러 빈틈을 보였다.
그리고 남자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텅 빈 왼팔을 노리고 매섭게 검이 들어왔다.
시현은 당황하지 않고 기회를 노렸다.
그런데.
“……어?”
남자는 무언가에 크게 당황한 듯 검을 회수하더니 뒤로 빠졌다.
마치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이상한 점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시현이 일부러 보인 빈틈은 결코 찌르지 않으면서, 실수로 빈틈을 보이면 귀신같이 찌르고 들어온다.
‘이게 뭐야? 마치 실시간으로 미래를 보고 있는 듯한…… 아니지, 그랬다면 아예 공격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거야. 지금처럼 공격을 하려다 화들짝 놀라서 허겁지겁 빠지는 듯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 테고.’
시현은 남자와 거리를 벌였다.
지금 상태로 계속해서 검을 주고받아 봐야 제대로 된 유효타를 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분명 저런 식으로 싸우는 사람이 있었어.’
얼마 전 녹슨 쇳덩어리 때문에 원작을 살펴봤기에 확실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시현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찬열.”
“……!”
남자는 크게 놀랐다.
어째서 시현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인지 당황하는 눈치였다.
비록 대답은 없었지만, 그의 눈빛과 행동이 충분한 대답이 되어 주었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이럴 수가 있나? 여기서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그가 이찬열이라 생각하니 모든 것이 이해됐다.
지혜의 군주 이찬열.
인도자라는 이름의 권능을 가진 그는 모든 구원자들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인물이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마지막 전쟁에서 주인공 정훈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 최선의 결말을 이끌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이찬열은 후드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 덕에 시현은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그의 얼굴이 김영운의 세 번째 예언에서 본 남자의 얼굴과 완벽하게 일치했기 때문이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