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시현은 한참이나 말도 없이 쇳조각만 만지작거렸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정리하는데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한울이 굳이 여기까지 와서 볼품없는 쇳조각에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더군다나 시현은 못 봤지만, 다른 이들의 말을 빌리면 공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허공에서 갑자기 생겨났다고 했다.
그런 물건이 평범한 물건일 리가 없다.
보잘 것 없고 하찮은 겉보기와 달리 무언가 성능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원작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게 엊그제였는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원작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시현의 기억에는 이런 물건에 대한 정보는 남아 있지 않았다.
원작에 등장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스쳐 지나가듯 짧게 등장했지만, 여러 이유로 시현이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쳤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시현은 민서라와 진우혁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머리 하나가 모자라다면, 머리 세 개를 쓰면 되는 일이다.
“뭔가 기억하고 계신 것 있습니까?”
일말의 희망을 갖고 던진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아니요.”
“전혀 모르겠어요. 죄송합니다, 리더.”
슬픈 일이지만 머리 세 개로도 부족했다.
결국 시현에게 남은 수단은 하나뿐이었다.
“원작…… 다시 한번 훑어보죠. 그 이한울이 아무런 정보도 없이 행동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아마 원작 어딘가에 관련된 정보가 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시현의 목소리와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두 사람이라 해서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흐아……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탄식 소리가 방 안에 흘러넘쳤다.
Re write의 원작은 상당히 방대하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도 모든 내용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중요 부분만 간추린 요약본이라면 수 시간 내로 확인할 수 있지만, 요약본에 담긴 내용은 신용할 수 없을 정도로 빈 부분이 많다.
다시 말해 원본을 확인해야 한다는 소리다.
하지만 징그러울 정도로 방대한 분량에, 역사서를 연상케 하는 딱딱한 묘사.
거기에 몇 번이고 반복해 읽은 통에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을 알고 있다 보니, 신선한 맛이 없어 읽다보면 어느새 깜빡깜빡 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니면 무아지경으로 생각 없이 페이지만 넘기고 있는 자신을 자각하게 되거나.
어찌되었건 힘든 싸움이 될 거라는 걸 알기에, 세 사람은 여지없이 한숨을 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서로 힘내죠.”
민서라의 격려를 신호탄삼아 세 사람은 첫 페이지를 열었다.
<박한은 평범한 남자였다.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벌써부터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 * *
“리더!”
“……헛!”
같은 시각.
졸음과 싸우고 있는 이는 비단 시현뿐만이 아니었다.
우렁찬 외침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든 한소현은 소매로 입가를 훔쳤다.
소매를 흥건하게 적신 침이 그녀의 얼굴을 붉어지게 만들었다.
“안 잤어.”
그녀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하나부터 열까지 그녀를 지켜보고 있으며, 리더라 해서 봐주는 일이 없는 김영운에게 통할 변명은 아니었다.
“졸면 깨워 달라고 한 건 리더였잖아요.”
“……응, 미안.”
입이 열 개라도 사과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한껏 시무룩해진 채 스마트 폰에 시선을 떨궜다.
쏟아지는 졸음과 필사적으로 싸우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대체 이게 뭐라고…….”
짜증 섞인 한숨을 토한 김영운은 자신의 손에 들린 정체불명의 쇳조각을 바라봤다.
한소현을 필두로 한 등대의 구원자들은 얼마 전 보이지 않는 벽을 무사히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과연 그 과정까지 무사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어찌되었건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한 등대의 구원자들을 반겨 준 것은 더 깊은 어둠과 더 강렬하게 쏟아지는 붉은 비였다.
급속도로 컨디션이 안 좋아진 구원자들은 확인한 한소현은 비를 피할 곳을 찾았다.
다행이도 건물은 비어 있었기에, 안전한 구역을 사수하기 위해 악마와 싸우거나 기존의 생존자들과 마찰을 벌이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렇게 작은 불을 피우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차가워진 몸을 덥히던 그 때.
허공에서 돌연 쇳조각이 나타났다.
아무런 예고나 전조 현상도 없이 갑자기.
한소현과 김영운을 포함한, 구원자 전원은 전이를 의심했다.
처음에는 시현이 무언가 소식을 전하기 위해 포탈을 열어 쇳조각을 보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
김영운이 알고 있는 구원자 중 공간 이동계열 권능을 사용하는 이는 시현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봐도 그게 불가능한 일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현 위치에 대한 정보를 서로 주고받은 것도 아닌데, 시현이 어떻게 알고 물건을 보냈겠는가.
설사 시현이 한소현 일행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해도 이상하다.
그가 아는 시현은 본인이 직접 와서 이야기를 하면 했지, 이런 식으로 의미심장한 물건 하나를 던져두고 갈 인물이 아니다.
한소현 역시 같은 생각을 했고, 그녀는 이 쇳조각에 대해 알아보겠다 발언을 한 뒤.
쭉 지금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스마트 폰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순간적으로 골아떨어지고, 그것을 김영운이 깨우는 것의 반복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한소현은 소리를 들었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바쁘니 네가 나가 봐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영운은 방 밖으로 나갔다.
우비를 눌러쓴 채 비에 흠뻑 젖어 있는 남자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어지간하면 리더를 방해하지 말라고 했잖아.”
“찾았습니다.”
“찾다니…… 뭘?”
“권수용의 흔적이요.”
“…….”
김영운은 말없이 뒤를 돌아봤다.
상당히 집중하고 있는지 한소현은 두 사람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만약 들었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권수용에 대한 정보부터 손에 넣고자 했을 것이다.
김영운은 남자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엄청난 기세로 붉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무리 한소현의 귀가 밝다 해도 빗소리는 두 사람의 대화를 숨겨 줄 것이다.
“어떻게 됐어?”
“일단 살아 있는 거 같습니다. 보아하니 촉수 괴물들도 권수용을 동료로 생각하는 모양인지라…… 아니, 그걸 살아 있다고 봐도 괜찮은가 싶기는 하지만.”
“……후우.”
김영운은 깊게 숨을 토했다.
끊은 담배 생각이 절실하게 났다.
권수용은 세력이 만들어진 초창기부터 함께한 인물이다.
그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믿기 어렵지만 요지경이 되어 버린 대전에도 어떻게든 살아 있는 사람은 있더군요. 그런데…….”
“죽였어?”
“네.”
남자가 가져다 준 정보는 최악이었다.
김영운은 권수용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생포해서 시현에게 정화를 의뢰할 생각이었다.
정화가 통할지 안 통할지는 의문이었지만, 일단 시도는 해 봐야하지 않겠는가.
잘린 팔이야 한소현의 권능을 사용하면 얼마든지 복구가 가능하다.
그러나 그가 무고한 시민을 해쳤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하지만, 한소현은 결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용서하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뭐가 된단 말인가.
“잘해도 추방……이겠지.”
“어쩔 수 없었으니까. 그 정도로 끝낼까 생각 중이야.”
“…….”
배후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이 김영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서슬 퍼런 눈을 하고 있는 한소현이 보인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은 채 김영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째서 이 중요한 사실을 자신에게 비밀로 했느냐는 무언의 시위다.
“왜 여기에 계신 거예요? 알아볼 건 다 알아보신 거예요?”
“응.”
고개를 끄덕인 한소현은 손을 내밀었다.
김영운이 보관하고 있는 쇳덩어리를 넘겨달라는 뜻이다.
김영운은 순순히 쇳덩어리를 넘겨주었다.
겉보기에는 녹슬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처럼 생겼건만, 한소현은 그게 희대의 보물이라도 되는 양 소중하게 간직했다.
“움직이자.”
지시를 내린 그녀는 김영운의 옆에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줬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김영운은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 * *
“찾았다!”
축포를 쏘아 올린 주인공은 민서라였다.
미지근한 물을 마시며 졸음과 싸우던 시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근만근 무겁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사실상 반쯤 졸고 있던 진우혁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정말입니까?”
“그럼 거짓말이겠어요? 후후, 왠지 후반부에 나올 거 같아서 23장부터 확인해 봤는데 그게 정답이었네요.”
상기된 얼굴을 한 그녀는 복권이라도 당첨된 사람마냥 기뻐했다.
“시현 씨가 가지고 계신 쇳조각의 정체는 검이에요.”
“……네?”
시현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들고 있던 쇳조각에 시선을 줬다.
어딜 어떻게 봐도 검으로는 보이지 않는 외형이 아니던가.
저걸로는 작은 들짐승도 죽이기 힘들 것이다.
다행이도 민서라의 이야기는 끝이 아니었다.
“물론 조각 하나만으로 검이 되지는 않아요. 같은 조각 네 개가 한 자리에 모이면 검으로 돌아간다고 해요. 원래는 검의 형태로 존재하는데 비축한 에너지의 양이 부족해지면 그런 모양이 된다고 하네요.”
“비축한 에너지요?”
“네. 악마를 베면 에너지가 쌓이는데 인간을 베면 에너지가 극심하게 소모되고요. 그 외에도 일정량의 에너지를 모으면 회심의 한 방을 사용할 수 있는데…….”
“있는데?”
두 남자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민서라의 말끝을 따라 읊었다.
그게 재미있는지 민서라는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악동처럼 웃어댔다.
“참, 이 검의 이름이 뭔지 알아요?”
“……모르죠.”
갑작스레 말을 돌리는 민서라에게 두 남자는 불만을 품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녀가 심술이라도 부리면 원하는 내용을 듣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얌전히 기다리자, 민서라도 더 이상 장난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신을 죽이는 자.”
“……거 되게 거창한 이름이네요.”
전혀 짚이는 바가 없던 진우혁은 무구의 이름을 가지고 조소했다.
반면 시현은 가만히 생각에 잠겨 들었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민서라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시현은 그 이름을 떠올리는데 성공했다.
“지혜의 군주!”
“맞아요. 원작에선 지혜의 군주가 그것을 사용해 외신을 죽이려 했어요. 불가피하게 인간을 죽이는 바람에 네 조각으로 흩어진 후, 다시 모으는데 실패하기는 했지만요.”
쇳조각은 어째서 바로 떠올리지 못한 건지 의아스러울 만큼 중요한 보물의 부품이었다.
물론 원작에선 전혀 활약하지 못했기에 스쳐 지나가듯 짧게 묘사된 게 원인이기는 했다.
아무리 대단한 성능을 가지고 있으면 뭐 한단 말인가.
등장할 기회 자체가 없었는데.
“어쨌든 이걸 모으면 그 신을 죽인다는 거창한 이름의 무기를 얻을 수 있다 이거죠?”
진우혁의 말에 민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혜의 군주가 확신을 갖고 사용하려던 신을 죽이는 검.
이것만 있으면 승리의 가능성이 대폭 상승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그런데 나머지 세 조각은 어디에서 구해야 합니까?”
당연한 질문이었다.
필요한 조각은 총 네 개.
그러나 시현이 가지고 있는 조각은 한 개 뿐이다.
나머지 세 개를 손에 넣지 못하면 이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쇳덩어리에 불과하다.
원작에서 그런 것처럼 역사에 가까스로 이름 한 줄 남기는 게 전부일 터다.
“방법이 있기는 한데…… 이게 참 까다롭네요.”
원작에서 글귀를 발견한 이후 처음으로 민서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