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대강 알아차린 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가 토해 낸 결정은 중형 악마에 기생한 촉수 괴물을 처치하면 얻을 수 있는 물건이다.
처음 결정을 손에 넣었을 때 시현은 견딜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스스로가 왜 그랬는지 이해하지도 못한 채 결정을 삼키려 했다.
‘만약 아르하의 반지가 없었다면 누구 하나는 결정을 집어삼켰을 거야.’
그 결과 등대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을 잃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남자는 운이 좋았다.
이성을 잃고 헤매던 와중 절묘하게 시현의 눈에 들었으니까.
“윤……시현?”
서서히 이성이 되돌아오는지 그는 기침을 하면서도 시현을 알아봤다.
성남에서 그토록 엄청난 존재감을 뽐냈기에 등대의 한소현과 시현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을 거다.
“어떻게 된 겁니까?”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머릿속으로 그려지기는 했으나, 말 그대로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확신을 얻기 위해 시현은 질문을 던졌다.
“등대의 권수용입니다. 전에 성남에서 만난 적 있는데……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물론 기억합니다.”
사실 권수용이 자기소개를 하기 전까지 전혀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주제에, 시현은 뻔뻔하게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다시피 저희 등대도 나름대로 대전에서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크윽!”
권수용이 갑작스레 신음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제야 권수용이 심각한 수준의 부상을 입고 있음을 깨달은 시현이 치유의 권능을 걸어 주었다.
권수용 역시 4레벨 구원자인지라 이 정도 상처로 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후우…… 그런데 중형 악마에 기생한 촉수 놈을 퇴치했을 때, 핏빛의 결정이 나타났습니다. 그걸 본 일행 전원이 충동적으로 그것을 손에 넣고자 행동했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제가 그것을 입에 넣었습니다.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군요.”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결정을 삼킨 후의 일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시현 씨께서 도와주신 거 같은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시현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표했다.
“감사는 여기 진우혁 씨에게 해 주세요.”
“진우혁 씨도 감사드립니다.”
그는 진우혁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아직 정신적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진우혁은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시현 씨, 어떻게 멀쩡한 상태로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하신 겁니까?”
시현과 한소현이 이번 대전 사건에서 랭킹을 걸고 경쟁을 하고 있음을 알 리가 없는 권수용이 정보를 요청했다.
등대는 시현에게 많은 도움을 줬고, 또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
당연히 이 정도 정보는 주고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소현과의 경쟁을 생각하면 정보를 넘기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다.
만약 거절한다 해도 한소현은 그게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하나 한소현을 제외한 다른 등대의 인원들은 시현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그의 선택에 크게 실망할 것이고, 등대 내에서 시현의 평판도 함께 떨어질 것이다.
비록 경쟁관계에 있지만 등대와 관계가 나빠져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애초에 정보가 넘어간다 한들 등대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현은 고민 끝에 정보를 넘기기로 결정했다.
“이 반지 때문입니다.”
“반지요?”
“네.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어떤 여자가 대전에서 꼭 필요할 거라며 준 반지입니다. 이 반지가 있으면 보다시피 결정에서 발하는 정신 오염을 막을 수 있죠.”
시현이 가지고 다니던 결정을 꺼내 손 위에서 굴리며 말했다.
권수용은 크게 아쉬워했다.
“그렇군요. 구할 방법만 알면 리더에게 큰 도움이 됐을 텐데……. 그보다 리더와 다른 사람들이 걱정이군요.”
반지가 있어 정신 오염을 완벽하게 막을 수 있는 시현 일행과 달리 등대의 구원자들은 결정에서 발하는 정신 오염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권수용은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님에도 그들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반지가 없는 한소현 일행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시현도 호기심이 생겼다.
* * *
“저게 되네?”
김영운은 어처구니없어 하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스스로는 해제할 수 없는 구속구로 입을 봉하고, 중형 악마에 기생한 촉수 괴물을 죽여 결정을 얻는다.
그리고 파도처럼 덮쳐 오는 충동을 의지로 이겨 낸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근성론을 펼치는 한소현을 보며 김영운은 미쳤다고 생각했다.
회복의 권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반대로 한소현은 단순해지는 면이 있었다.
남들은 골백번을 더 죽었을 부상을 입더라도 권능으로 단번에 회복해 버리니 무슨 일이 생기면 해결을 위해 머리를 굴리기보다 몸으로 부딪치는 것을 선호하게 된 결과였다.
지금도 그랬다.
무언가 단서가 주어졌으면 그걸 가지고 머리를 굴려 해결책을 찾거나, 안 되면 다른 단서를 추가적으로 입수해야 한다.
그게 정석이다.
그러나 한소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족한 단서를 가지고 몸을 갈아 넣어 정답을 찾아내고야 마는 단순 무식한 수단을 선택했다.
제일 짜증나는 것은 그 단순 무식한 방법이 통했다는 것이다.
“으으으읍!”
구속구에 입이 막힌 한소현이 뭐라 웅얼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핏빛의 결정이 들려 있었다.
결정에서 발해지는 정신 오염을 한소현은 버티지 못했다.
그러나 구속구 때문에 그녀는 충동대로 행동하지 못했고, 5분 동안 구속구와 씨름하다가 결국 충동을 떨쳐 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리더!”
한소현에게 달려가려는 임서림을 김영운이 붙잡았다.
“리더는 정신 오염을 극복했지만, 우리는 아니야. 너무 가까이에 가면 리더가 가지고 있는 결정에 오염될 거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뭐 어때요. 제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리더에게 이기지는 못할 텐데.”
“그러니까 그 말은 네가 두 번째 실험체가 되겠다는 건가?”
“이미 리더가 증명을 마쳤으니 실험이 아니라…… 음, 백신을 투약한다고 표현하는 게 어때요?”
임서림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소현에게 다가갔다.
예상대로 일정 거리에 다가서자 임서림은 정신 줄을 놓고 한소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임서림은 이렇다 할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한소현에게 제압당했다.
제정신으로 있을 때도 한소현에게 상대가 되지 않던 임서림이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한소현을 이길 확률은 사실상 없다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5분 후.
임서림 역시 결정이 발하는 정신 오염에 내성을 지니게 되었다.
“진짜 돌아버리겠네. 언제부터 우리 등대가 이렇게 단순 무식한 집단이 되어 버린 거지?”
그 모습을 하나부터 열까지 지켜보던 김영운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곧 자신의 차례가 올 거라는 걸 알았기에 그의 표정은 한없이 썩어 있었다.
“그냥 무전 못 들은 척하고 시현 씨 옆에 얌전히 붙어 있을 걸. 적어도 그쪽은 이렇게 무식한 수단은 사용하지 않을 거 아니야.”
“다 들려.”
“들리라고 한 말이에요.”
한소현을 향해 한 마디를 쏘아붙인 김영운은 얌전히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부디 정신 오염에 내성을 갖는 과정이 괴롭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말이다.
* * *
수많은 촉수 괴물과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어둠.
머리통을 부숴 버릴 기세로 쏟아지는 거센 비까지.
붉은 지대의 중심부는 바깥 부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곳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단 1초도 살아남을 수 없는 현세에 강림한 지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다.
이찬열.
그는 오늘도 가족이나 다름없던 동료들의 복수를 위해 붉은 지역의 중심부를 망자처럼 헤매고 있었다.
물론 며칠 동안 아주 헛수고만 한 것은 아니었다.
“드디어…….”
이찬열은 희열에 젖어 들었다.
쭉 뻗으면 자신의 손조차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어둠 탓에 요 며칠 동안 몇 번이고 길을 잃었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늘이 도운 건지 이찬열은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붉은 지역의 중심부.
모든 사건이 시작되었으리라 예상되는 그곳에 말이다.
그는 구덩이 앞에 섰다.
마치 운석이 지표를 뚫고 지구의 핵까지 파고들며 생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깊은 구덩이에서는 붉은 기둥이 하늘을 향해 솟아나 있었다.
“이건…… 무언가 구조물인 줄 알았는데 피잖아?”
엄청난 기세로 솟구치는 기둥에서 간헐적으로 핏방울이 튀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농도 짙은 혈액이 근처에만 있어도 이찬열의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붉은 하늘의 원인은 이 피의 기둥인 거 같은데…… 저 아래로 내려가 봐야 하나? 하지만 그냥 뛰어내리면 멀쩡하지는 못할 텐데.”
이찬열의 4레벨 구원자다.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영웅들처럼 보통의 사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하고 기적적인 육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는 구덩이에 뛰어들어서 멀쩡하게 착지할 자신은 없었다.
주변을 살피던 이찬열은 작은 구멍 하나를 추가로 발견할 수 있었다.
지끈.
“으윽…….”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두통에 이찬열은 비틀거리며 머리를 짚었다.
하마터면 발을 헛디뎌 구덩이로 떨어질 뻔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저쪽이 맞구나.”
이찬열의 권능은 인도자.
원하는 것, 해야 하는 것, 정답이 있는 곳 따위로 나아가게 해 주는 특별한 권능이다.
지금까지 그는 인도자 덕에 많은 혜택을 받았다.
위험은 회피하면서 남들보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많은 보물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그는 자신의 권능을 믿었다.
“그 때 내가 주유소에 가지만 않았어도 모두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후회를 하며, 그는 구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구멍 안은 굉장히 좁고 습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허리를 쭉 펴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넓어졌다.
입구 부근은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처럼 울퉁불퉁하고 불규칙적인 형태였지만, 안쪽은 인공적으로 닦아 놓은 길 마냥 반듯했다.
복도의 끝에는 계단이 존재했다.
끝없이 원을 그리며 지하로 내려가게끔 만들어져 있는 계단.
이찬열은 손전등에 의존한 채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권능이 이 길이 맞노라고 강한 확신을 주고 있었다.
“…….”
동료들을 잃은 이후 부쩍 혼잣말이 많아진 이찬열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불길한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심심찮게 썩어 가는 시체와 마주할 수 있었다.
시체들은 대부분 신체 어딘가가 잘려나가 있었다.
시체 썩는 냄새 때문에 코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찬열은 꿋꿋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아포칼립스 이후 이보다 더 끔찍한 광경을 몇 번이고 목격하지 않았던가.
혐오감은 남아 있지만, 예전처럼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쏟는 꼴사나운 행동을 취할 정도는 아니었다.
계단의 가장 아래까지 내려오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찬열은 정면의 어설픈 나무문을 열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길게 뻗은 복도.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또 하나의 문이다.
사실 문이라기보다는 나무판자 하나를 붙여 놓은 것 같은 계단 쪽 문과 달리, 대리석을 깎아 만든 듯한 문에는 기묘한 문양과 난생 처음 보는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권능이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저 너머에 복수해야 할 대상이 있다고.
마치 보이지 않는 사슬처럼 몸을 옥죄고 있는 강한 기운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분노에 몸을 맡긴 이찬열은 복도를 달리다시피 하며 문을 밀어젖혔다.
“……흡!”
그 너머에서 무언가를 목격한 이찬열은 숨을 삼켰다.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넓은 공간.
한 사람이 있었다.
과연 그를 사람이라 표현해도 좋을지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공간의 중심부에 누워 있었다.
몸은 지상으로부터 약 3미터 가량 떠 있었으며, 벽면에서 뻗어진 붉고 끈적이는 무언가가 남자의 몸이 떨어지지 않게끔 붙들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하얀색이며 피부는 검정색, 눈동자는 붉으며 몸 전체에 붉은 핏줄 같은 것이 맥동하고 있었다.
그것만 해도 기괴한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남자의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것이다.
뚫린 구멍으로부터 방사형으로 뻗어진 피가 하늘로 뻗어지며 기둥을 만들었고, 아래로는 거대한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렇기에 보다 적극적으로 붉은 영역을 넓혀야 한다. 나쁜 생각은 아니다만 우리는 궁지에 몰려 있다. 우리가 사용할 패와 수단은 한정되어 있어. 조금이라도 승산이 높은 방법을 선택해야 해. 하지만 그것의 봉인을 깨뜨리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지 못한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네 역할이다.]
남자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혼잣말인데 혼잣말이 아닌 듯한 기묘한 중얼거림.
목소리도 묘하게 고저차가 있어 마치 두 개의 자아가 서로 문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가만히 남자를 응시하던 이찬열은 경악하고 말았다.
“……이한울?”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최강의 세력을 손꼽으라면 늘 빠지지 않던 교단의 리더이기도 할뿐더러 과거에 이한울이 직접 이찬열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온갖 미사여구와 달콤한 미끼, 협박까지 서슴지 않으며 이찬열을 영입하려던 그 때문에 떠돌이 생활까지 하게 되지 않았던가.
그의 이름과 얼굴은 이찬열의 뇌리에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런 이한울이 어째서 이런 곳에서, 저런 몰골로 있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아니, 이한울이 맞는지조차 의심이 들었다.
[……쥐새끼가 기어 들어왔군.]
남자의 눈동자가 이찬열에게 향했다.
하나의 눈동자 속에 다섯 개의 눈동자가 추가로 담겨 있는 듯한 기묘한 생김새에, 이찬열은 또 다시 두통을 느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