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임주찬은 자세를 바꿨다.
납작 엎드려 바닥에 귀를 대고 온 감각을 집중했다.
그러자 들려오는 것은 괴물 쥐의 시끄러운 소리 사이에 섞여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말도 안 돼…….’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전에 붉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 후 더 이상 밖을 돌아다닐 수 없게 되었다.
비를 맞은 사람은 어김없이 목숨을 잃고 촉수 괴물이 되었다.
가장 먼저 희생된 이는 늘 주변을 순찰하던 구원자들이었다.
모두를 위해 기꺼이 재능을 기부하던 고마운 사람들부터 죽어나가고, 그로 인해 경각심을 갖게 된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곧 식량이 바닥을 드러냈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쓰거나.
각자의 방법으로 비를 막아 내며, 나는 괜찮을 거라며 검증되지 않은 희망에 매달렸다.
그리고 모두가 죽었다.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저 붉은 비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게 공평한 죽음을 선사했다.
끝까지 방에 남은 10여 명의 사람들만이 가까스로 숨만 붙이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분명 건물에 있는 사람은 우리뿐인데 대체 어떻게, 어디로 들어온 거야?’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하나 분명한 것은, 지금 기회를 놓친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임주찬은 몸을 일으켰다.
“……?”
“뭐야, 쟤 왜 저래?”
에너지를 아끼겠답시고 하루 종일 누워만 있던 임주찬의 기상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비록 권능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가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상태에서 임주찬은 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외부와 내부를 완벽하게 단절시키고 있는 문의 잠금장치를 하나씩 해제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람들의 얼굴에 공포가 깃들었다.
“미, 미쳤나 봐!”
“임주찬이 미쳤다! 제기랄, 죽으려면 혼자 곱게 뒤질 것이지 무슨 짓이야!”
밖은 위험하다.
붉은 비에 잠식된 촉수 괴물과 그들을 피해 달아난 괴물 쥐가 굶주림에 지쳐 동족상잔까지 서슴지 않고 있는 상황.
만약 저 문이 열린다면 꼼짝없이 괴물 쥐의 먹이가 되고 말 것이라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몸을 던져 임주찬을 말렸다.
아무리 구원자라지만 이제 겨우 1레벨 구원자일 뿐인 임주찬이 여러 사람의 힘을 버텨 낼 수는 없었다.
서서히 그의 몸이 문에서부터 멀어졌다.
“밖에 괴물 쥐가 득실거리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사람 목소리가 들렸어요!”
다급한 임주찬의 외침에 사람들의 팔에서 잠깐 힘이 빠졌다.
그 틈을 노려 임주찬은 다시 문으로 달라붙었다.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어요.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의 목소리였어요. 분명해요. 잘못 들은 게 아니라고요!”
“사람 목소리라니…… 하지만 밖은…….”
한 남자가 나무판자로 막아 놓은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창 너머에서는 여전히 붉은색의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젠장, 말려!”
결국 임주찬의 말을 믿지 못한 사람들은 그를 뜯어말리려 했다.
그러나 그 잠깐 사이에 임주찬은 이미 문의 잠금장치를 모두 해제한 후였다.
그는 두꺼운 철문을 열어젖혔다.
“……어?”
문 너머에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괴물 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주찬이 기대하던 광경과도 거리가 멀었다.
문 너머에 사람이 존재하기는 했다.
그러나 두 팔이 잘려 나갔으며, 눈은 붉게 찢어지고,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사람이었다.
복도의 벽을 응시하고 있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남자는 웃었고, 임주찬은 비명을 질렀다.
* * *
“으아아아아악!”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괴물 쥐와의 전투에 집중하고 있던 시현은 당황한 나머지 괴물 쥐에게 팔꿈치를 물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게 여기 있는 구원자들은 하나같이 4레벨의 구원자들이다.
어지간한 세력에서는 무력만으로도 리더의 자리에 추대받을 수도 있는 뛰어난 인재들인 셈이다.
그런 자들이 고작 괴물 쥐 따위에게 당해 비명을 지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크게 당황했고, 그 결과 빈틈을 보이고 만 것이다.
물론 괴물 쥐가 물어뜯는다 한들 시현에게 피해를 입히지는 못한다.
팔꿈치를 물어뜯은 괴물 쥐를 대충 털어 낸 시현이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위험에 처한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압도적인 무력으로 괴물 쥐를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설치류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박여래뿐이다.
“박여래 씨. 방금 비명 지르셨습니까?”
“아니요! 애초에 남자 목소리였잖아요.”
“너무 놀라서 목소리가 굵게 나왔을 수도 있죠.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아니라…….”
“사, 살려 줘어어어!”
또 다시 비명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확실히 어디에서 들려왔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2층이었다.
“생존자……! 여긴 맡길게.”
일행에게 괴물 쥐의 퇴치를 떠넘긴 시현은 곧장 2층으로 달렸다.
생존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시현의 다리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계단을 뛰어올라 2층에 도착한 시현의 눈에 보인 것은 길게 뻗은 복도.
그리고 서로 힘 싸움을 하고 있는 두 남자였다.
그런데 그림이 이상했다.
아래에 깔린 사람은 공포에 질려 있었으며, 위에서 그를 찍어 누르고 있는 남자는 팔이 없었다.
그럼에도 엄청난 힘을 발휘하며 아래에 깔린 남자의 목을 물어뜯으려 이를 들이밀고 있었다.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명백한 상황.
빠르게 거리를 좁힌 시현은 주저 없이 가해자의 목을 치려했다.
그 순간 가해자가 고개를 돌렸다.
“……!”
시현은 다급하게 검의 방향을 틀었다.
가해자의 목을 노리고 나아가던 검은 그의 두피를 아주 살짝 도려내며 벽에 처박혔다.
“와 씨, 뭐야?!”
그 대신 가해자의 복부를 강하게 걷어차 아래에 깔려 있던 남자를 구출했다.
“아아아아!”
시현에게 걷어차여 갈비뼈 몇 대가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는 남자와 시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벽에 박힌 검을 뽑아낸 시현은 그것을 검집으로 회수했다.
그러고는 검집 째로 휘둘러 가해자의 다리 두 개를 완전히 박살냈다.
엄청난 고통이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가해자는 그저 시현을 향해 몸을 뒤틀며 기어올 뿐이었다.
“주, 죽여요! 뭐 하고 있는 거예요!”
피해 남성이 비명을 질렀으나 시현은 그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가해 남성의 얼굴이 굉장히 익숙했기 때문이다.
“누구더라? 분명 성남에서 본 얼굴인데…….”
그냥 스쳐 지나가면서 본 얼굴이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귀찮은 일을 만드느니 바로 목을 치고 말지.
그러나 시현이 남자의 목을 치지 않은 이유는 하나.
기억 속에서 남자가 등대 소속의 구원자인 유서인과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눈앞의 남자는 등대 소속의 구원자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간부급.
도움을 준다면 등대와 한소현에게 어느 정도 빚을 지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상태가 왜 이러는 거지? 암만 봐도 정상은 아닌데…… 그렇다고 또 하수인은 아닌 것 같고…….”
“으아아아아!”
시현이 고민하고 있는 사이 방 안에 있던 생존자 중 하나가 몽키스패너를 들고 달려왔다.
그러곤 남자의 머리를 향해 있는 힘껏 내리쳤다.
시현이 망설이고 있으니 자신이 저 위험한 존재를 직접 처치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시현은 생존자의 공격을 손등으로 쳐냈다.
“제가 아는 사람입니다. 공격은 멈춰 주시죠.”
“웃기지 마! 저 놈 때문에 주찬이가 죽을 뻔했는데 공격을 멈추라고? 네가 무슨 권리로!”
며칠을 굶어 삐쩍 마른 것 치고 생존자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시현은 방 내부를 살폈다.
처음 습격을 당한 남자를 포함해 대략 10명 안팎이었다.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는 숫자다.
“이 남자는 제가 확실하게 관리할 겁니다. 저는 서울에 있는 세력인 병원의 리더이자 5레벨 구원자입니다.”
“5, 5레벨…….”
시현의 간략한 자기소개에 생존자들은 크게 놀란 듯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구원자 중 가장 레벨이 높은 이는 고작 2레벨이었다.
2레벨만 해도 인간답지 않은 무력으로 인해 모두의 선망과 존경을 샀는데, 5레벨이라니.
그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던 것이다.
망설이는 그들을 시현은 한 번 더 다그쳤다.
“그래도 불만이시라면 넘겨드리겠습니다. 단, 그 경우 저희 쪽에서는 당신들에게 일절 도움을 드리지 않을 겁니다.”
“…….”
시현의 말에 분노로 타오르던 사람들이 급속도로 얌전해졌다.
바꿔 말하자면 저 광인처럼 보이는 팔 잘린 남자만 넘겨준다면 지원해 주겠다는 약속을 한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빌딩의 생존자들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반면 시현은 죽음의 비나 다름없는 붉은 비를 뚫고, 대전을 돌아다니는 비상식적인 강자들이다.
시현의 도움을 받으면 살아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생존자들은 희망으로 차올랐다.
“물! 물 좀 주세요. 벌써 며칠 째 물 한 모금도 못 마셨어요!”
“배가 너무 고파요. 제발…….”
“선생님, 하라는 건 뭐든 다 할 게요. 저희 애 좀 살려 주세요!”
시현을 절망 속에 피어난 한 송이의 구원, 혹은 메시아 정도로 생각하는지 생존자들이 달려들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이미 임주찬을 공격하려 한 팔 잘린 남자에 대한 것은 그들의 뇌리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당장의 분노보다 축척된 목마름과 굶주림의 해결.
그것이 가장 급한 용건이었으니까.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와…… 이런 곳에도 생존자가 남아 있었구나. 틀림없이 다 죽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괴물 쥐의 토벌을 끝마치고 뒤따라 올라온 일행들은 예상치 못한 광경에 놀란 눈치였다.
그러나 하나같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일행은 오랜 시간 굶주린 이들을 위해 기꺼이 식량과 식수가 든 가방을 내려놓았다.
원한다면 언제든 보급할 수 있는 물자가 이들에게는 생명수나 다름없었으니까.
“일단 생존자들의 숨은 붙여 놓았으니…….”
게걸스럽게 보급품을 탐닉하는 생존자들을 뒤로한 시현은 팔 잘린 남자를 데리고 1층으로 향했다.
이런 상태임에도 공포는 아는 건지 그는 압도적 강자인 시현을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생각해 봐도 왜 이런 꼴이 된 건지 도통 모르겠네. 촉수 괴물에 당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아직 숨이 붙어 있고…… 무엇보다 왜 여기에 혼자 있는 거야? 설마 등대의 구원자 전원이 전멸한 건 아니겠지?”
“제가 한 번 해 볼까요?”
자신의 힘이 필요할 거라 생각하고 시현을 뒤따라 내려온 진우혁이 말했다.
진우혁의 능력은 정화.
어쩌면 그의 능력이 이 남자에게 통할 수도 있다.
“부탁드립니다.”
시현의 요청에 진우혁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정화의 권능은 사용자에게 정신적으로 강한 충격을 동반하기에 늘 행동 전에 마음가짐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진우혁은 남자에게 정화의 권능을 사용했다.
“으아아아아!”
“끄어어어어!”
두 남자가 동시다발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먼저 비명을 그친 진우혁의 경우 탈진해서 축 늘어졌다.
그리고 정화의 권능을 뒤집어 쓴 남자는 고통스러워하더니 무언가를 토해 냈다.
“우웨에에엑!”
시큼한 냄새가 나는 위액과 함께 그가 토해 낸 것은 무언가의 고깃덩어리.
그리고 핏빛의 결정이었다.
시현이 가진 반지에서 강한 빛이 쏟아졌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