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시현은 코트에 달린 모자를 눌러쓰고 몇 걸음을 더 앞으로 내디뎠다.
“대충 이슬비 정도인가?”
시현은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오므린 손 위로 한참이 지나서야 작게 빗물이 고였다.
“생각보다 빗줄기가 강하지는 않네요.”
뒤따라 들어온 이나연이 말했다.
머리가 긴 그녀는 행여 모자 밖으로 머리카락이 빠져나오지 않게끔 머리를 잘 정돈한 상태였다.
“아마 중심부로 갈수록 빗줄기는 강해질 겁니다.”
“역시 그렇겠죠?”
두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으허어억.”
배후에서 맥 빠지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바닥에 힘없이 쓰러져 있는 신호석이 보였다.
모자는 쓰지 않고 있었다.
“……뭐하냐?”
어처구니가 없었던 시현은 그를 인근의 건물 내부로 끌고 갔다.
미리 준비해 온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대충 닦고, 모자를 씌워 주고 나니 신호석이 면목 없다는 듯 멋쩍게 웃었다.
“그게 말이죠. 비를 맞으면 몸에서 힘이 빠진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어느 정도인가 한번 확인해 보고 싶어서.”
“그걸 왜 자기 몸으로 실험해 보는 거야?”
“사실 앞에서 형이 너무 멀쩡하게 걸어가시기에, 진짜로 이 비가 위험한 건가 싶어서…….”
“에휴.”
한숨을 푹 내쉰 시현은 신호석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비를 맞는 순간 효과가 시작되듯 회복도 빠르다는 것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던 신호석은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자, 여기 실험 정신 투철한 놈이 몸소 보여 줬듯이, 모자를 벗으면 1분 내로 전투 불능 상태가 되니 어디를 가든 모자는 꼭 착용해 주세요.”
반면교사의 힘은 확실했다.
일행은 시시각각 모자가 벗겨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행동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서서히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뭔가 촉수 괴물들이 막 들이닥쳐서 하나도 정신없고 그럴 거 같았는데, 생각보다 조용하네요.”
“그러게요. 너무 조용해서 불안할 정도입니다.”
민서라의 말에 시현은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붉은 지역이 위험한 것은 비단 붉은 비뿐만이 아니다.
붉은 비를 맞고 목숨을 잃은 후, 촉수들의 숙주가 되어 버린 생명체들.
흔히 말하는 촉수 괴물들이 들끓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제법 오랜 시간 붉은 지역을 걸었는데, 단 한 번도 촉수 괴물과 마주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촉수 괴물이 생겨나지 않을 정도로 대전에 생물체가 적던 건가?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퍽!
“……어?”
머리에 무언가가 부딪치고 나서야 시현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시현의 눈앞에는 그저 쭉 뻗은 도로만 있을 뿐, 그의 진행을 방해할 만한 무언가는 없었으니까.
“억!”
“아악!”
주변에서 짧은 비명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당황한 표정으로 이마를 문지르고 있는 일행들이 보였다.
그들 역시 시현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거……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거 같은데요?”
빨개진 코를 손으로 감춘 민서라가 손을 뻗고 있었다.
시현도 그녀를 따라 정면으로 손을 뻗었다.
딱딱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보이지 않는 벽이라…….”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던 놈이다.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결국 몸으로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겠네.”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아무것도 모른 채 온갖 위험에 뛰어들던 원작의 주인공, 정훈처럼.
이제는 시현도 정보 없이 위험에 뛰어들 차례가 된 것이다.
다행이도 시현의 곁에는 함께 머리를 굴려 줄 사람들이 있었다.
“시현 씨, 벽 너머가 조금 더 어두운 것 같지 않아요? 지금 저희가 있는 장소보다 빗줄기도 강한 것 같고.”
민서라의 말에 시현은 보다 주의 깊게 벽 너머를 살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벽 너머는 빗줄기도 강했고, 어둠도 깊었다.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 불빛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벽 너머는 불빛 없이 돌아다니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둠이 깊었다.
“심층부로 가기 위해서는 이 벽을 처리해야 할 것 같네요. 일단 적당한 곳에 휴식처를 마련하고 그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죠.”
“좋아요. 하지만 그 전에 손님맞이부터 해야 할 것 같아요.”
민서라는 무기를 꺼내 들었다.
얼마 전, 천수민에게 부탁해 개량을 마친 건틀렛.
지금은 가죽 장갑에 금속조각을 붙여 놓은 수준으로 경량화되어 있었다.
비단 민서라 뿐만이 아니다.
일행 전원이 무장을 했다.
저벅, 저벅.
어둠 너머로부터 빗소리와 섞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사람이었다.
중년의 남성이었으며, 상의를 탈의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무언가를 먹지 못한 것처럼 배는 홀쭉하고, 갈비뼈와 피부가 착 달라붙어 있었다.
걷는 폼 또한 몹시 이상했다.
허리를 크게 뒤로 젖히고 팔을 늘어뜨린 채 쩍 벌린 입은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시현은 흑색의 검을 꺼냈다.
“이거 아무래도…….”
시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목부터 배까지가 반으로 쩍 갈라졌다.
마치 짐승의 이빨처럼 드러난 갈비뼈 사이에 인간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장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끔찍한 촉수였다.
“함정에 빠진 것 같네요.”
시현은 촉수를 베어 버렸다.
예전처럼 도중에 막히거나 하는 일 없이 촉수는 너무도 쉽게 잘렸다.
사실 남산 타워에서 처음 촉수 괴물과 맞닥뜨렸을 때와 비교한다면, 시현은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
애초에 성장할 시간이나 기회조차 없었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현의 공격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그 이유는 하나.
무기가 보다 강해졌기 때문이다.
시현은 촉수를 베어 버리는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끊임없이 휘둘러지는 촉수를 하나하나 베어 내며 나아간 결과.
숙주가 시현의 사정거리 내에 들어왔다.
촤악!
휘둘러진 검에 남자의 목이 잘려 나갔다.
단면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사체.
촉수 때문에 부패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몸속의 피는 촉수의 영양분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몸과 머리가 분리되었음에도 촉수는 기세를 잃지 않았다.
당연히 이럴 거라 예상했기에 시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본체의 위치가 머리가 아니라면 심장이겠군.”
있는 힘껏 내지른 검이 남자의 심장을 찔렀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굉장히 단단한 무언가를 관통하는 느낌이 검을 잡고 있는 손에 전해졌다.
제대로 급소를 찔렀다는 반증이다.
검을 뽑아내자 촉수는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검에는 끈적이는 적색의 액체가 잔뜩 묻어 있었다.
“보셨다시피 급소는 심장, 아니면 머리에 있습니다. 제대로 급소를 관통하거나 육체와 분리시켜 놓지 않으면 죽지 않으니까 조심해 주세요.”
“네!”
“자, 그러면…….”
“……?”
“살아서 봅시다.”
일행은 시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의문이 해결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또 다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문제는 이 발소리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동시다발적으로 사방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거……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죽을 수도 있겠는데?”
상황의 심각성을 가장 먼저 인지한 민서라가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른 땀방울이 바닥에 떨어져 핏물에 섞여 드는 것과 동시에 어둠 속으로부터 수백, 수천 가닥의 촉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 * *
“으아아악!”
김영운은 비명을 질렀다.
“시끄러움! 호들갑 노노! 꼴불견.”
미간을 찡그린 유서인이 그런 김영운을 조롱했다.
“이 미친년아! 오른팔이 으스러졌는데 어떻게 비명을 안 질러!”
자신을 조롱하는 유서인에게 시원하게 욕설을 토해 낸 김영운은 왼손을 이용, 자신의 오른팔을 감싸고 있는 촉수를 잘라 버렸다.
완전히 망가진 오른손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으허어어억!”
바로 옆에서 유서인의 비명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오른쪽 다리가 촉수에 의해 부러져 있었다.
김영운은 울면서 웃었다.
“으하하! 호들갑이니 뭐니 하더니 꼴좋다. 흐어엉…….”
“시끄러…… 아파 죽겠네…….”
고통에 흐느끼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니들 뭐하냐? 여기서 그냥 죽을래? 특히 유서인, 계속 분란을 조장하면 가만 안 둔다고 전에도 이야기한 거 같은데?”
그 모습에 어이가 없던 권수용이 개입하고 나서야 두 사람의 싸움은 끝이 났다.
또한 두 사람을 괴롭히던 촉수 괴물은 권수용에 의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고통 또한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 됐다.”
언제 부러졌냐는 듯 깔끔하게 회복된 오른팔을 확인한 김영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적진 한복판에 파고들어 전투를 벌이는 한소현을 확인했다.
한소현은 강하다.
하지만 그 강함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방어를 포기한, 무식하기까지 한 공격의 연속.
그 앞에서 촉수 괴물들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물론 한소현이라고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팔이 날아가고, 다리가 부러지고, 내장이 쏟아지며, 심지어 머리가 으깨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한 번 몸에 걸어 놓은 회복의 권능은 그녀의 정신력이 완전히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결코 끊이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늘 목에 걸고 있는 그 물건이 파괴되지 않는 한, 정신력이 바닥나는 일도 없을 테고.
결코 죽지 않는 구원자.
그게 바로 한소현이다.
“여기는 대충 정리됐어.”
그 많던 촉수 괴물이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전부 정리되어 있었다.
“누가 괴물인지 모르겠네.”
“뭐라고?”
“아니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리더.”
무심코 본심을 흘린 김영운이 시선을 피하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애초에 한소현은 그런 사소한 일을 마음에 담아 두는 사람이 아니다.
“그나저나 이 벽, 어떻게 해야 넘어갈 수 있는 거지?”
한소현은 정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앙!
분명 허공을 때린 것 같았는데 굉음이 울리며 한소현의 팔이 으스러졌다.
기형적으로 뒤틀린 팔은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회복되었다.
몇 번을 봐도 무시무시한 권능이다.
‘아니, 진짜 무서운 건 저렇게 제 몸을 혹사시키고도 아무렇지 않은 리더의 정신력이겠지.’
“김영운.”
“네, 리더.”
“네 생각은 어때?”
한소현의 질문에 김영운은 생각에 잠겼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벽.
여기를 통과하지 않으면 붉은 지대의 중심부에 도달할 수 없다.
혹시 뚫려 있는 길이 있을까 싶어 벽을 타고 쭉 이동해 봤지만, 통로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무언가 다른 장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언에서 봤던 남자. 그 사람에게 힌트가 있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네가 그 남자를 본 장소는 중심부였다면서.”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결국 그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이 벽을 통과해야 한다는 건데…… 그래도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이야?”
“그 남자가 중심부에 있다는 것은, 분명 이 벽을 넘어갈 방법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사실 이건 게임이 아니잖아요? 출구가 없는 미로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죠. 하지만 우리가 빠진 미궁에는 출구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그러게.”
한소현은 살짝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금방 무표정으로 되돌아 온 한소현은 일행을 추슬러 이동을 개시했다.
보나마나 아무 목적지 없이 무작정 떠돌아다니는 게 분명했다.
한없이 유약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뭔가 일이 생기면 일단 몸으로 부딪쳐 보는 게 한소현이라는 인간이니까.
하지만 그녀야 망가지지 않는다 해도 그녀를 따르는 이들은 힘에 벅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중재를 하는 게 김영운의 역할이다.
“리더, 일단 오늘은 쉬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면 윤시현에게 뒤쳐져.”
“하지만 다들 지쳤어요. 시간도 늦었고요. 일단 캠프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한 후, 내일 다시 행동하도록 하죠. 게다가 혹시 모르죠. 시간에 따라 변화가 생기는 기믹일지도.”
“음…… 알겠어.”
한소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구원자들은 한소현의 눈을 피해 김영운의 어깨를 두드리거나 엄지를 치켜세웠다.
캠프로 돌아가며 김영운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적색의 하늘 아래에서 헤매고 있을 시현 일행을 떠올렸다.
“누가 먼저 안으로 진입하게 될지. 조금 궁금하기는 하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