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이건 저희 소속 장인이 만든 우비입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코트처럼 생겼지만, 방수 능력이 굉장히 우수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붉은 비 아래에서도 끄떡없을 겁니다.”
“어차피 4레벨 이상의 구원자에게 붉은 비는 효과가 없다면서요. 굳이 우비를 써야 할 이유가 있나요?”
민서라의 질문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질문이었다.
참가자인 그녀가 우비를 쓰는 이유를 모를 리가 없으니까.
배려라면 일종의 배려인 셈이다.
“아까 말했듯 4레벨 구원자는 비에 맞는다 해서 당장 죽거나 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영향이 극도로 적을 뿐이지 피해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 그러면 저 정답 틀린 거네요? 아∼ 아쉽다. 아무래도 이 옷은 다른 사람에게 줘야겠네.”
신호석은 황급히 코트를 벗으려 했다.
그러나 시현에게 두 팔을 제압당하고 지퍼가 목까지 채워진 그는 눈물을 흘리며 토끼 코트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먼저 몸에 하나둘 이상이 생기기 시작할 겁니다. 머리가 어지럽거나, 근육통이 느껴지거나. 구원자가 되고 난 후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단 잔병치레들이요. 심한 경우에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시현의 말이 계속될수록 방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모두가 집중해서 시현의 말을 경청했고, 시현이 잠시 말을 멈추면 침 넘어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섬뜩한 침묵이 깔렸다.
“몸에서 보내는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비를 맞으면, 먼저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권능을 사용할 수 없게 되거나, 구원자의 신체 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되거나. 그 다음에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네?”
시현의 무책임한 말에 일행의 표정이 허탈해졌다.
그러나 시현은 진지했다.
“정보가 없으니까요. 보통은 그 지경이 되기 전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비를 피합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권능을 사용할 수 없고, 신체 능력마저 잃어버린 사람이 저 촉수 괴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 거 같습니까?”
“…….”
그제야 사람들은 깨달았다.
어째서 붉은 비에 대한 정보가 적은지를 말이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뇌하는 일행을 보며 시현은 웃었다.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진 마세요.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수민이를 시켜서 이 코트를 만들게끔 한 거니까요. 머릿수를 맞췄을 뿐만 아니라, 만일의 사태를 위한 예비품까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시현은 준비한 코트를 일행들에게 나눠 주었다.
천수민이 일행의 신체 수치를 맞춰서 제작한 덕에 코트가 크거나 작아서 못 입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착용감 좋네. 겉보기엔 되게 무거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볍기도 하고.”
“디자인도…… 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코트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애초에 천수민이 제 몸을 혹사시키며 만든 작품을 비난할 정도로 못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 빗물이 새어 들어가지 않도록 지퍼는 확실하게 닫아 주시고요. 모자도 모두 써 주세요.”
“모자는 왜요? 대전에 들어갈 때 쓰면 되는 거 아닌가요? 머리 눌리는데.”
평소 헤어스타일에 신경을 많이 쓰는 박여래가 말했다.
“그거야…….”
시현은 박여래의 모자를 씌워 주고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지금 당장 출발할 거거든요.”
“……에?”
순간적으로 시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그녀가 멍한 소리를 뱉었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확 바뀌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병원의 회의실 안에 있었는데, 눈을 감았다 뜨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빌딩의 숲.
고개를 조금만 올리면 보이는 붉은 하늘.
그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붉은 달이었으며, 하늘 아래에는 끊임없이 붉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자, 도착했습니다.”
“……어? 에?”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린 박여래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 * *
“드디어 도착! 차, 너무 답답함! 돌아갈 때는 공간 이동 같은 거로 가고 싶음!”
차 문을 열고 뛰쳐 나온 유서인이 소리쳤다.
비글마냥 엄청난 활동력을 자랑하는 유서인에게 몇 시간동안 이동하는 차 안에 갇혀 있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던 것이다.
“철없어.”
뒤따라 차에서 내린 임서림이 그녀의 행동을 질책했다.
늘 감고 다니던 눈의 오른쪽만 살짝 뜨고는 지그시 유서인을 노려보면서 말이다.
“그래서 네가 뭐 보태 준 거 있음?”
“리더는 어쩌자고 저런 애를 끼고도는지 모르겠네. 나였으면 일찌감치 버렸을 텐데. 사람이 너무 좋아도 탈이야.”
상대하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눈을 감아 버리는 임서림.
“저년은 내가 뭐만 하면 시비네. 야, 붙을래?”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진정시킨 이는 늘 두 사람의 사이에 껴서 고생만 하는 권수용이었다.
“두 사람 모두 침착해. 요즘 우리 리더는 기분이 몹시 좋지 않으니까. 그러다 맞으면 너네만 손해야.”
“…….”
“…….”
다소 과격한 방법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행동하던 두 사람은 한소현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한소현의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운전대를 잡고 있는 한소현의 표정은 권수용의 말대로 그리 좋지 않았다.
그녀는 무언가 고민하고 있는 것인지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자, 리더는 고뇌가 많아 보이니 우리끼리 먼저 움직이자. 일단은 베이스캠프를 만들어야겠지? 저기 사거리 부근에 만들면 딱 좋겠네.”
“거기에 만들면 큰일 나는 거 아님? 빨간 하늘이 계속해서 영역을 넓히고 있는데. 사거리 부근에 만들면 반나절도 안 지나서 빨간 비가 쏟아질 거임.”
“회의 시간에 쳐 졸기나 하니 뭘 알 리가 없지. 수호나무 결계를 괜히 가져왔으려고?”
“…….”
또 다시 싸움을 걸어오는 임서림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유서인이었으나, 그녀는 애써 참았다.
괜한 싸움을 일으켜 한소현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임서림의 말대로 회의 시간에 조느라 못 들은 게 사실이기도 했고.
“그러면 캠프 먼저 만들겠음!”
“그래. 서인이가 캠프 쪽을 지휘해 줘. 서림이는 저쪽 조가 캠프를 만드는 동안 촉수 놈들에게 습격당할 수도 있으니 인근의 탐색 및 방어를 부탁할게.”
“네.”
비록 견원지간인 두 사람이지만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서로를 향한 원망이 깊은 것은 아니다.
임서림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할 것이다.
설사 그게 끔찍이도 싫어하는 유서인을 지키는 행위일지라도.
사전에 준비를 철저하게 했기에 캠프의 설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편의상 캠프라고 칭하는 것뿐이지 모닥불 피워 놓고 바비큐를 구워 먹는 그런 캠프를 뜻하는 게 아니다.
쉴 곳을 마련하고, 그 주변에 목책이나 모래주머니 따위로 호를 만들고, 어디에서 적이 들이닥쳐도 대응할 수 있는 임시 방어 시설을 구축하는 것.
마지막에는 수호나무 결계로 방어를 강화하는 모든 과정 자체를 두고 등대에서는 캠프라 칭하고는 한다.
[크아아아아!]
콰앙!
멀리서 악마의 괴성과 동시에 폭발음이 들려왔다.
캠프의 구축을 방해하려는 악마가 등장했고, 수비 병력이 거기에 대해 대처하는 소리다.
권수용은 굉음이 들려온 방향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만큼 임서림을 포함한 등대의 구원자들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한 일은 홀로 차 안에서 고민하고 있는 한소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약 10분 정도가 더 지나고 나서야 한소현은 차에서 내렸다.
“어떻게 됐어?”
“보다시피 캠프를 설치하고 있습니다. 수호나무 결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여러 개를 가져왔으니, 붉은 비가 내리는 영역 내에서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캠프가 완성 되는대로 진입조를 편성하자. 4레벨 구원자를 위주로 하고 캠핑카 한 대에 3레벨 구원자로 구성된 보급조도 마련하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리더.”
“그리고…….”
한소현은 조금 망설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어 절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한소현이 입을 열었다.
“김영운을 불러야겠어.”
“……알겠습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에 권수용은 쓴웃음을 지었다.
* * *
시현은 멤버들 전원을 데리고 대전으로 전이를 마쳤다.
머리 위에 펼쳐진 것은 푸른 하늘인데, 전방으로 100미터 정도만 시선을 옮기면 붉은 하늘이 펼쳐져 있다.
붉은 하늘은 지금 이 순간에도 꾸준히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와…… 사진으로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이거 상당히 기괴한 광경이네요.”
신호석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비단 신호석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모인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그저 심각한 얼굴로 붉은색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부터 저희가 할 일은 이변의 원인이 있으리라 유추되는 영역의 중심부로 향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으니, 마음 단단히 먹어 주세요.”
“으아…… 심장 터질 거 같아.”
정은수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인천연합이라는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세력의 총책임자로 있지만, 그는 여전히 담력이 작았다.
그러나 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줄 여유는 없었다.
일행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시현에게는 또 하나의 목적이 있다.
바로 김영운이 예언에서 본 정체불명의 남성을 찾는 것.
천리안의 사용이 가능했다면 어느 정도 여유롭게 행동했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저 붉은 하늘 아래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즉, 무조건 발로 뛰어야 하는 상황.
1분 1초가 아깝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출발하겠습니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시현 씨. 문제가 생겼습니다.”
호기롭게 출발을 선언함과 동시에 제동이 걸려왔다.
김영운이었다.
돌아보니 무전기를 손에 든 채로 굉장히 난감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저희 리더에게 연락이 왔는데. 그 내용이 참…….”
“무슨 일이십니까?”
김영운은 예언을 통해 미래를 확인했다.
어쩌면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소수의 인류마저 끝장내 버릴 수 있는 최악의 미래.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 시현과 손을 잡았다.
당연히 한소현의 허락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랬던가.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고.
“복귀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사실입니까? 한소현 씨도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알고 계실 텐데요.”
오히려 도우러 오면 도우러 왔지, 김영운을 빼내려 하지는 않을 거라는 게 시현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김영운의 발언은 시현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 주었다.
“등대의 병력이 대전에 도착해 있습니다. 그리고 리더께서 전해 달라고 하셨는데…… 경쟁. 그거면 알아들으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
경쟁.
그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민서라, 그리고 진우혁 역시 표정이 굳었다.
참가자이기에 한소현이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랭킹을 위해 더 이상의 협력은 삼가겠다는 뜻이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이는 시현에게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예언자인 김영운은 여러 방면에서 도움이 된다.
더군다나 그의 예언은 권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인의 특성.
전투 방면에서도 도움이 되는 인재 아니던가.
그가 빠져나간 구멍은 상당히 크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시현에게는 그를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결국 그를 보내 주는 게 시현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제가 먼저 협력을 요청 드렸는데,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우리 리더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경쟁이라니……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힘을 합치는 게 좋을 텐데 말이죠.”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김영운은 답지 않게 자신의 리더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나연을 비롯한 구원자들도 그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침묵을 유지하는 이는 세 명의 참가자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한울처럼 극단적인 방법을 쓰는 게 아니라 공평한 경쟁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시현은 그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누가 이번 사태를 해결할지 경쟁하게 되겠군요.”
“다음에 꼭 다시 찾아뵙고 설명 드리겠습니다.”
머리를 크게 숙인 김영운은 한소현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희도 이동하겠습니다.”
여기에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시현은 곧장 붉은 영역을 향해 이동을 개시했다.
강한 전투력과 예언이라는 특수한 능력을 가진 구원자의 이탈에 일행의 사기가 다소 저하된 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멘탈이 흔들릴 사람들이었다면, 애초에 4레벨까지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약 5분 정도를 걷고 나니 붉은 하늘과 푸른 하늘의 경계 아래 도달할 수 있었다.
“와…… 신기하다.”
그곳에는 이나연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릴 만큼 신비로운 광경이 연출되어 있었다.
붉은 하늘 아래는 한밤중처럼 어두웠고, 밝은 하늘 아래는 빛이 가득했다.
마치 낮과 밤을 반으로 딱 잘라 놓은 것 같았다.
“먼저 들어간다.”
시현이 가장 선두에서 붉은 영역으로 진입했다.
툭.
기다렸다는 듯 머리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