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기존에 호텔에서 기르던 수호나무는 호텔의 붕괴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를 감췄다.
그동안 수호나무에서 나는 열매로부터 얻은 이익을 생각하면, 굉장히 뼈아픈 손실이었다.
그러나 막상 시현이 손해를 본 것은 없었다.
이한울 역시 교단을 위해 수호나무의 육성을 시도했고, 성공적으로 나무를 키워 냈다.
시현은 이한울의 땀과 노력이 담긴 수호나무를 기꺼이 이용해 먹었고 말이다.
파아앗!
빛과 함께 수호나무 결계가 병원 주변을 감쌌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맹세의 주인인 시현을 잡아 죽이기 위해 달려들던 악마들은 강력한 결계에 밀려나고 말았다.
[크아아아!]
[캬아아악!]
놈들은 난폭하게 결계를 두드렸지만, 단단한 수호결계에는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겨우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으어어…….”
“물…… 따뜻한 물…….”
“잠…… 졸려…….”
비틀거리며 복도를 걷는 사람들을 응시하던 천수민이 입을 열었다.
“병원 안에 좀비들이 돌아다녀요.”
“그러게.”
굉장히 적절한 비유라 생각하며 시현은 작게 웃었다.
눈 밑이 퀭해진 상태로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비틀거리는 모습이 지금 수호결계를 두드리고 있는 좀비와 굉장히 흡사했다.
“웃기냐.”
누군가가 시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다 죽어가는 몰골의 강소하였다.
“응.”
얼굴 가득 미소를 지은 시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하지만 그 짧고 성의 없는 한마디는 그렇지 않아도 활활 타오르던 강소하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됐다.
“이 깊은 빡침을 어떻게 너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 다 함께 고민해 봤는데, 역시 주먹만큼 적당한 게 없더라. 죽어라!”
강소하는 시현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조금의 가감도 하지 않은 전력을 다해서.
보통의 사람이라면 허리를 숙인 채 꺽꺽거리며 고통을 호소했을 것이다.
어쩌면 내장이 죄다 상해 심각한 중태를 입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러나 시현은 달랐다.
마치 ‘지금 뭐 했어?’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강소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강소하는 뒷목을 잡았다.
“그나저나 네가 여기에 왔다는 것은 달성자가 있다는 소리야?”
시현이 장난기를 싹 빼고 물었다.
그러자 강소하도 진지하게 답을 했다.
“그래. 나하고 민서라, 그리고 이나연까지. 세 사람이 조금 전에 4레벨에 도달했어. 진우혁이랑 인천연합에서 온 두 사람도 내일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오늘 4레벨 찍은 인원이 경험치를 몰아줬거든.”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슬슬 끝을 내야겠네.”
강소하에게 휴식을 지시한 시현은 병원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요 며칠 구원자들은 몰려드는 악마들을 상대로 고군분투했다.
그 덕에 악마들의 수가 굉장히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 봐야 아직 반 이상이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목표 달성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굳이 불필요하게 시간을 길게 끌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마침 내일이면 아르하의 권능도 사용할 수 있게 되니까…… 그걸 사용하면 되겠네.”
벌써부터 내일이 기다려졌다.
* * *
오늘도 어김없이 날이 밝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기온도 따스해서 간만에 두꺼운 외투를 벗어도 될 것 같은 그런 날씨였다.
그러나 막 잠에서 깨어난 구원자 및 생존자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젠장…….”
“빌어먹을, 해는 대체 왜 뜨는 거야? 눈치도 더럽게 없네.”
좋게 말해 불만이 가득해 보였고, 나쁘게 말해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요 며칠 해가 뜨면 나가서 악마와 싸우고, 해가 지면 휴식을 취하는 그런 힘든 일과가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원인이야 어찌되었건 이미 터진 일이다.
밖에 있는 악마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병원 내에 감금되어 있어야 하니 고생하더라도 놈들을 몰아내는 수밖에.
구원자들은 꼬박 열 시간을 내리 잤음에도 풀리지 않은 피로에 괴로워하면서도 밖으로 나왔다.
“모두들 좋은 아침입니다.”
“…….”
병원의 정문 앞.
얼굴 가득 화사한 미소를 지은 채 서 있는 시현을 보며 구원자 전원이 생각했다.
저 인간을 때려죽이고 싶다고.
민서라나 강소하의 경우 이미 주먹까지 말아 쥐고 있었다.
그 살기등등한 시선을 느낀 시현은 괜히 뜸들이지 않고 곧장 본론을 꺼내 들었다.
“다른 게 아니고 오늘로써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그 순간, 생존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가.
상당히 얄미운 짓을 저질러 주기는 했지만 일단은 세력의 리더다.
동시에 자타공인 최강의 구원자다.
시현이 전투에 참가한다는 것은 곧 이 길었던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모두가 시현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대하고 있었다.
시현은 기꺼이 그들이 기뻐할 만한 대답을 해 주었다.
“가서 쓸어버리죠.”
“와아아아!”
함성이 울려 퍼지며 병원을 보호하고 있는 수호결계가 사라졌다.
동시에 시현의 손에서 빛이 터져나갔다.
아르하의 권능에 등록되어 있는 라디아턴트의 권능을 사용한 것이다.
<이능에 대한 저항 능력이 강화됩니다. 권능의 위력이 증가합니다.>
라디아턴트의 권능은 이능, 즉 권능을 이용한 공격과 방어에 특화되어 있는 권능이다.
어디가지나 버프 계열이기 때문에 시현처럼 특수한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개인전에서는 별 가치가 없는 권능이다.
그러나 단체전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첫 타자는 늘 그랬듯 선두에 서는 것을 좋아하는 이나연이었다.
“폭풍.”
먼저 적의 수를 대폭 줄이고 시작하기 위해 가차 없이 폭풍을 사용한 이나연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어라? 어어?”
지금까지 사용했던 것보다 폭풍의 규모, 위력.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성능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당황한 것은 비단 이나연뿐만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 계속된 전투에서 꾸준히 이나연의 폭풍이 사용되는 것을 목격한 구원자 전원이 크게 당황해했다.
“뭐야, 이나연 씨가 어제보다 더 강해진 거 같은데?”
“그러니까. 지금까지처럼 생각하고 근처에서 알짱거리다간 같이 휩쓸리겠는데.”
그들은 이나연이 보여 준 위용에 혀를 내두르며 눈앞까지 들이닥친 악마에게 권능을 사용했다.
그러곤 비명을 질렀다.
“와악! 이거 뭐야!”
자신이 사용한 권능이 맞나 싶을 정도로 위력이 증폭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그마한 불을 피워 악마에게 던질 생각이었는데, 머리통만한 화염구가 튀어나와 저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전장 곳곳에서 속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황하는 것도 잠시.
이 모든 게 시현이 얻은 새로운 권능의 효과라는 것을 알아차린 구원자들은 보다 힘을 내서 악마들을 밀어붙였다.
악마들이 흘린 피는 강이 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고스란히 강소하의 힘이 되었다.
“역시 나는 단체전이 취향이라니까.”
강소하의 머리 위에 생겨난 피의 구슬로부터 엄청난 수의 사슬이 돋아났다.
사슬은 거대한 검이 되어 악마 무리를 단번에 쓸어버렸다.
한 번에 대량의 피가 소모되기는 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만큼 또 피가 흐를 테니까.
두 사람만큼 시각적으로 뛰어난 효과는 보이지 못할지언정, 나머지 인원의 활약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민서라는 이전보다 덩치가 배는 커진 빛의 요정을 부리며 중형을 위주로 악마들을 사냥했다.
비전투 계열의 권능을 가진 진우혁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여기 오고 나서부터 쭉 생각했는데, 시현 씨 아래에 있는 구원자들은 다른 세력에 비해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지 않아요?”
시위를 당기며 내뱉은 정은수의 말에 박여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어요.”
박여래는 강한 구원자다.
그녀가 리더로 있는 크라이시스에서는 대적할 이를 찾아볼 수 없는 강자였고, 인천 연합에서도 당당하게 최강자의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그런 박여래조차 여기에 온 이후에는 감히 최강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윤시현을 필두로 이나연, 민서라, 강소하.
그녀보다 강한 구원자는 차고도 넘쳤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던 자존심은 곤두박질쳤고, 그녀는 겸손이라는 단어를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자존심이 완전히 구겨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일단은 내가 용병인데, 뭐라도 보여 줘야겠지?”
박여래의 손끝에서 피어난 불덩어리는 점점 크기를 부풀렸다.
시현의 권능 덕분에 평소보다 더욱 커진 불덩어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모두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느낀 박여래는 보다 화려한 쇼를 보여 주기 위해 준비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백색의 불꽃이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박여래의 불꽃과 비교하면 귀여운 주순에 불과했지만, 문제는 그 수가 족히 1천에 가깝다는 것이다.
하늘 높이 솟구친 천 개의 불덩어리는 지상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오오오!”
“역시 리더!”
사람들의 시선은 금새 백색의 불꽃으로 꽂혀 들었다.
더 이상 박여래의 쇼를 봐 주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개자식.”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는 박여래의 등을 정은수가 조심스레 토닥여 주었다.
* * *
“후우…….”
시현은 길게 숨을 토했다.
아무리 시현이라도 무려 천 개나 되는 불꽃을 만들어 내고 멀쩡할 리가 없었다.
상당량의 정신력이 한 순간에 빠져나갔기 때문에 살짝 어지러움까지 느껴졌다.
그래도 대량의 정신력을 때려 박은 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잘 타네.”
병원을 둘러싸고 있던 악마들은 말 그대로 불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는 악마들을 보고 있자니,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그토록 많던 악마가 고작 권능 한 방에 반 이상이 나가떨어졌다.
나머지 반도 화염에 의해 상당한 부상을 입은 상태.
그것들은 다른 구원자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사실상 배부르게 먹으라고 밥상을 차려 준 셈이다.
“리더…….”
자신이 차려 준 밥상을 잘 씹어 먹는 구원자들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으려니, 배후에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수민이었다.
“너…… 설마 밤새운 거야?”
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붉은 비를 차단해 줄 코트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눈 딱 감고 미성년자인 천수민을 혹사시키고 있는 것이고.
하지만 휴식 시간과 밤에 잠을 잘 시간까지 안 준 것은 아니었다.
기계조차 중간중간 휴식을 제공해야 하지 않은가.
하물며 그보다 약한 사람에게 휴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실제로 그러는 편이 더 효율적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다른 건 몰라도 먹을 것과 휴식 시간은 확실하게 보증해 줬건만, 보아하니 제 휴식 시간마저 스스로 걷어차 버리며 작업에 매진한 모양이다.
한숨이 나왔다.
“너 그러면 키 안 큰다.”
“저는 잘 생겨서 조금 키가 작아도 괜찮아요.”
“푸핫! 내가 다음에 네 방에 거울 달아 줄게.”
“뭐요! 내가 어때서!”
“적어도 장래가 기대되는 얼굴은 아니지.”
“에이씨, 이거나 받아요.”
시현의 장난에 토라진 천수민이 들고 있던 상자를 던졌다.
기세가 제법 매섭기는 했지만, 시현은 한 손으로 가볍게 받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코트는 어제 마무리한 거 아니었어? 이건 뭐야?”
호기심이 동한 시현은 그 자리에서 상자를 개봉했다.
상자 안에는 멋들어진 검 한 자루가 자리하고 있었다.
흑색의 검신에 붉은 선이 몇 개인가 그어져 있다.
그 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어 투박하다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 단아한 매력이 느껴지기도 했다.
기존에 시현이 사용하던 핏빛 칼날보다 얇지만, 길이는 조금 더 길다.
무게감은 상당한 편이었지만, 사용하는데 불편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그야말로 시현의 취향에 딱 맞춘 검이었다.
“이걸 벌써 완성했어? 아니, 어떻게?”
시현은 적잖이 당황했다.
사실 검의 제작을 의뢰한 것은 상당히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천수민은 정확하게 언제쯤 검을 완성시킬 수 있을 거라는 확답을 내놓지 못했다.
시현이 검을 만들어 달라며 내놓은 재료가 당시의 천수민으로서는 다룰 수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대형 악마인 히드라의 드롭 아이템.
고작 2레벨 구원자였던 천수민이 다루기에는 너무 난이도가 높은 물건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천수민은 기어코 히드라의 드롭 아이템을 이용한 검을 완성해 내고 만 것이다.
시현의 눈이 동그랗게 변한 게 마음에 들었는지 천수민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제가 사실 좀 똑똑하잖아요. 다 방법이 있죠.”
“진실은?”
“……사실 서라 누나가 경험치 몰아줬어요.”
그렇게 말하며 천수민은 검의 정보가 담겨있으리라 추측되는 종이를 내밀었다.
시현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받아들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