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으아아아악!”
병원 전체가 떠나가도록 우렁찬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는 한 번에서 그치지 않고 여러 차례,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캬아아아악!]
악마 군단의 선두에 선 것은 리퍼였다.
중형 중에서는 가장 수도 많고 뛰어난 방어력까지 가진 리퍼는 선두에서 적들의 공격을 받아 내는데 안성맞춤인 악마였다.
생존자들은 사력을 다해 방아쇠를 당겼다.
원거리 공격 수단을 가진 구원자들은 아끼지 않고 권능을 퍼부었다.
그러나 리퍼의 진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콰앙!
리퍼가 담벼락을 들이받았다.
튼튼하게 만들어진 담벼락이기에 당장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보아하니 몇 차례 더 충격을 받으면 그대로 허물어질 것 같았다.
물론 구원자들이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촤르르륵!
피의 사슬이 솟아나 리퍼를 속박했다.
당황한 리퍼가 발버둥 치는 사이, 민서라의 주먹이 리퍼의 미간에 꽂혔다.
외피가 깨진 리퍼의 등 뒤에서 강소하가 심장을 노리고 창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리퍼가 몸을 트는 바람에 창은 심장이 아닌 폐를 관통했다.
공격이 빗나간 강소하를 노리고 리퍼의 꼬리가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망할, 역시 몸 쓰는 건 내 취향에 안 맞아.”“그렇다고 맞고만 있으려고요?”
진우혁이 나타나 리퍼의 꼬리를 막아 냈다.
그 틈을 노려 민서라가 다시 한번 리퍼의 미간에 공격을 명중시켰다.
콰앙!
주먹이 리퍼의 미간에 닿는 것과 동시에 폭발이 발생했다.
머리가 새까맣게 타버린 리퍼는 그대로 넘어져 버렸다.
“앗 뜨거!”
민서라는 황급히 건틀렛을 벗어 던지고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허공에 손을 흔들어 댔다.
“이거 생각한 것보다 열이 심하네. 개량을 하던가 해야지, 아니면 못 써먹겠어.”
결국 교단의 창고에서 확보한 아이템을 코트 주머니에 욱여넣은 민서라는 맨손으로 전투를 계속했다.
강소하, 민서라, 진우혁.
세 사람이 번갈아 가며 공격을 퍼붓자 리퍼는 물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대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마지막 일격은 강소하의 것이었다.
리퍼의 목구멍 깊숙이 찔러 넣은 창은 뇌까지 꿰뚫었다.
축 늘어진 리퍼를 보며 진우혁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가 힘을 합치니까 중형 중에서 강한 축에 속하는 리퍼도 금방이네요. 보아하니 저쪽도 하나를 끝장낸 것 같고.”
진우혁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막 리퍼 하나를 사정없이 도륙 낸 쌍둥이가 있었다.
콰아아아!
굉음이 울리며 그들의 지척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폭풍이 지나갔다.
폭풍이 지나간 장소에 남아 있는 것은 대량의 핏물과 뼈와 내장, 그리고 소수의 중형 악마뿐이었다.
“진짜 괴물이네. 윤시현이랑은 다른 의미에서의 괴물이야.”
담장 위를 뛰어다니며 적재적소의 장소에 폭풍을 때려 박는 이나연을 보며, 진우혁은 혀를 내둘렀다.
1:1에도 강하고 다수와의 싸움에서도 강하다니.
만약 이나연이 자신의 적이었다면 어떨지 생각해 보니,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지금처럼만 하면 금방 청소할 수 있겠죠?”
“음…….”
희망 가득한 진우혁의의 발언에 민서라는 침음을 삼키며 주변을 살폈다.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중형 하나를 처치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전장에는 많은 중형 악마가 남아 있다.
이나연의 폭풍으로 일정 공간을 허허벌판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그것도 잠시.
바퀴벌레마냥 어디선가 튀어나온 악마들이 그 자리를 금방 채워 버렸다.
“금방?”
민서라는 조소했다.
보아하니 금방이 아니라 며칠 동안 날을 꼬박 새워도 전부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교단이 세워 놓은 방어 시설이 워낙 튼튼해 달라붙는 중형만 잘 처리해 준다면 뚫릴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아…… 지금쯤 윤시현 그 인간은 혼자 마음 편하게 쉬고 있겠지. 생각하니까 화나네. 그런데 더 화나는 게 뭔지 알아?”
강소하는 이를 갈았다.
“그 인간 말대로 경험치는 기가 막히게 잘 모인다는 거야. 힘들어 죽겠는데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아서 더 화가 나.”
민서라는 그의 의견에 격하게 공감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당하는 게 우리만 있는 건 아니란 거지.”
강소하는 웃었다.
깐족거림에 가까운 미소를 짓고 있는 강소하의 시선이 향한 곳은 하늘이었다.
비행형 악마가 지배하고 있는 하늘.
그 사이를 빠른 속도로 헤집으며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호텔이 붕괴할 당시 물자 이송을 위해 인천에 가 있던 헬기가 복귀한 것이다.
[캬아아아악!]
악마들은 요란한 소음을 내는 헬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소형화시킨 수호나무 결계의 보호를 받고 있는 헬기는 아무런 피해 없이 유유자적 병원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프로펠러가 멈추고 헬기에서 운전자인 신호석을 제외하고도 두 사람이 더 내렸다.
“와…… 살면서 이렇게 많은 수의 악마를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아.”
“미쳤어, 진짜 미친 거 같아. 설마 이게 윤시현이 말한 그 훈련인지 뭔지는 아니겠지?”
인천시청의 리더이자 인천연합의 관리자 정은수.
그리고 인천연합에 속한 세력 중 하나인 크라이시스의 리더이자, 현 시점에서 인천연합 최강의 구원자인 박여래였다.
그들은 질색하며 애써 현실을 부정하려 했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온 민서라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인천연합에서 오신 두 분, 지옥에 온 걸 환영해요.”
두 사람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 * *
같은 시각.
강소하의 말대로 시현은 푹신한 침대에 드러누운 채,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심심하다.”
“심심하면 나가서 좀 도와주지 그래요? 보니까 엄청 고생하고들 계신 거 같던데.”
천수민의 말에 시현은 큰 감동을 느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인 줄 알고, 타인이 어찌되던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천수민이건만.
사람이 아주 제대로 달라졌다.
“수민이 많이 컸네, 다른 사람 걱정도 할 줄 알고.”
“저는 원래 착하고 예뻤어요. 잠시 엇나갔을 뿐이지.”
지지 않고 한 마디를 쏘아붙인 천수민은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가죽을 잘라 내고 이어 붙이고 바느질까지.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동안 천수민의 실력이 어느 정도로 상승했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기막힌 재능을 선보이는 천수민의 손에서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가죽 한 장이었지만, 그것이 점점 형태를 띠어 갈수록 천수민이 무엇을 만드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모자가 달린 롱코트였다.
“어때요? 거의 완성 직전인데. 혹시 디자인이나 그런 부분에서 불만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다 좋은데 하나 궁금한 점이 있어.”
“뭔데요?”
“왜 핑크야?”
천수민이 만들고 있는 그것은 보고만 있어도 부담감이 느껴질 정도로 사랑스러운 분홍빛이었다.
천수민은 왜 이걸 문제 삼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취향인데요? 존중해 주시죠.”
“물론 존중하지. 그런데 그걸 입는 건 네가 아니거든. 응, 검정으로 바꿔 줘.”
“……쳇, 하여간 예술의 예도 모른다니까.”
입술을 비죽 내밀고 투덜거리면서도 천수민은 시현의 주문에 맞춰 코트의 색상을 변경시켰다.
부담스러운 핑크에서 무난한 블랙으로.
주문자의 요구에 맞춰 색을 변경시킨 천수민은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첫 번째 장비가 완성되었다.
“됐다!”
기쁨의 환성을 지른 천수민은 흑색으로 물들인 코트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시현에게 의기양양한 눈빛을 보낸다.
“잘했어. 역시 너밖에 없다니까.”
“그쵸? 제가 최고죠?”
천수민이 원하는 칭찬을 건넨 시현은 코트를 받아들었다.
재질이 그렇게 두꺼운 건 아니지만 질기고 튼튼하다.
촉감은 다소 거칠지만 안쪽에는 면을 덧대 착용감에는 문제가 없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고작 몇 시간 만에 급히 만들어낸 것 치고는 굉장히 훌륭한 물건이다.
그러나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성능은?”
“여기요.”
시현이 옷을 구경하는 사이, 성능이 적힌 종이가 완성되어 있었다.
천수민에게 종이를 건네받은 시현은 그것을 눈에 담았다.
<천수민 표 비옷.>
제작자 천수민이 만든 비옷.
뛰어난 방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뿔고래의 가죽이 소량 함유되어 있어 겉보기와 달리 질기고 튼튼하다.
특히 타격에 강한 내성을 가지며 피격시 물리 대미지의 일부를 옷이 흡수해 준다.
“성능도 훌륭하네.”
오히려 기대 이상이었다.
시현이 주문한 것은 붉은 비 아래에서도 버틸 수 있도록 방수성이 뛰어난 비옷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수민은 시현이 가져다 준 뿔고래의 가죽을 이용.
추가 옵션까지 붙여 버렸다.
앞으로 자주 상대하게 될 촉수 놈들이 타격과 조이기를 주로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저 운이 좋았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렇죠? 장난 아니죠?”
점점 천수민의 콧대가 높아지는 것 같아 조금 걱정이기는 했지만, 장인이 조금 거만한 것 정도는 문제되지 않는다.
“그래, 네가 최고다.”
“이게 바로 천수민 클래스죠.”
“그러니까 앞으로 남은 여섯 벌과 한 자루. 잘 부탁한다.”
“…….”
시현의 말에 한참 으스대던 천수민의 낯빛이 새까맣게 죽었다.
제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후부터 천수민은 스스로가 장인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한 땀 한 땀에 늘 정성을 다했고 최선을 쏟아부었다.
그러다 보니 물건 하나를 만드는데 드는 노력이나 시간, 그에 따른 피로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도 그랬다.
당장이라도 쓰러져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저기…… 아무리 생각해도 하루에 한 벌밖에 못 만들 거 같은데……. 힘들어요.”
아직 사춘기 소년답게 천수민은 우는 소리를 했다.
그러나 시현은 천수민의 어리광을 받아 주지 않았다.
물론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지금은 눈을 꼭 감고 어린 천수민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있어. 수민이 네가 제 시간 안에 물량 공급에 실패한다면, 그만큼 인원을 빼고 갈 수밖에 없고. 전원이 무사히 귀환할 확률은 크게 줄어들어. 이번 작전의 승패는 너에게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러니까 부탁 좀 하자.”
“……우씨.”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어리광을 부릴 정도로 천수민의 정신이 마냥 어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알겠어요. 그러면 조금만 쉬다가 다시 작업을 시작할게요.”
고개를 끄덕인 천수민은 아주 짧은 휴식을 보낸 후 다음 아이템의 제작에 착수했다.
* * *
언젠가 리더인 정아윤이 한 말이 있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
악마들에게 가족을 잃고 좌절하여 살아갈 의욕마저 잃어버렸던 이찬열에게 정아윤은 말했다.
“네가 가진 능력은 특별해. 언젠가 이 땅에서 악마들을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줄 거야.”
사실 위로라고는 쥐뿔도 안 되는 말이었다.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네 능력이 특별하네 어쩌네 해 봤자, 어떠한 감흥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정아윤은 끈질겼다.
계속해서 이찬열에게 달라붙었고, 그를 설득하려 했으며, 그를 구했다.
그렇기에 지금의 이찬열이 있을 수 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아윤을 존경하고 늘 특별하게 생각했다.
그런 정아윤이 이제는 없다.
붉은 비 때문에 악마보다 더한 끔찍한 무언가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분명 원인이 되는 무언가가 있을 거야.’
머리를 덮고 있는 후드를 더욱 깊숙하게 눌러 쓴 이찬열은 오늘도 어김없이 붉은 비의 원인을 찾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쏟아지는 붉은 비가 이찬열을 두드렸다.
방수성이 좋은 후드를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빗물을 차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바람도 강한 편이었기에 빗물의 일부가 얼굴에 튀었다.
“왜 난 괜찮은 거지?”
그는 홀로 외롭게 중얼거렸다.
지금까지의 정보에 따르면 극히 소량이라도 빗물이 피부에 닿으면 촉수 괴물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이찬열의 경우, 빗물이 피부에 닿아도 목숨을 잃거나 촉수 괴물로 변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빗물을 맞는 정도에 따라 컨디션이 나빠지는 정도였다.
그렇기에 부담 없이 붉은 비가 쏟아지는 대전의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붉은 하늘은 울퉁불퉁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원을 그리며 영역을 넓히고 있어. 그렇다면 이 원의 중심부에 붉은 하늘의 원인이 있을 거야.’
나름 합리적으로 계산을 마친 이찬열은 원의 중심부로 향했다.
원의 중심부에는 수목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게…… 뭐야?”
수목원에 도착한 이찬열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뭐라 표현하면 좋을지 모를 만큼 경악스러운 광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뻥 뚫린 구멍에서 빠져나온 수백, 수천 가닥의 촉수가 공중에 떠 있는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심장이었다.
쿵. 쿵.
그것이 박동할 때마다 작은 파동이 발생할 정도였다.
쿵. 쿵.
그 박자에 맞춰 이찬열의 심장도 함께 뛰는 듯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