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대개 전투를 벌일 때 있어 머릿수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인해전술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가끔 많은 머릿수가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가 존재하는데, 이번이 딱 그랬다.
때문에 시현은 최소한의 인원으로 정예를 꾸렸다.
“겨우 이 정도로 괜찮을까요? 하다못해 호석이나 쌍둥이까지는 데려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데.”
명단을 확인한 이나연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고작해야 다섯 명.
시현, 이나연, 민서라, 강소하, 진우혁.
이상이 시현이 꼽은 인원의 전부였다.
“명단에 적힌 사람들은 4레벨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야. 만약 준비하는 동안 4레벨에 달성하지 못하면 그 사람도 명단에서 제외할 생각이고.”
“오.”
옆에서 듣고 있던 강소하가 눈을 빛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지만, 시현은 굳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강소하가 싫다 해도 그의 레벨을 올릴 계획이 머릿속에 다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수를 줄이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하니까 수를 줄이는 거지.”
일정 수준 이상의 기술을 요하는 어떤 일을 할 때, 기술이 있는 사람이 아무리 모여 봤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존의 기술자에게 방해가 될 뿐이지.
같은 이치로 그 위험천만한 장소에서 제 몸을 지키는 것조차 벅찬 구원자들은 그저 방해만 될 뿐이다.
“인천연합에도 도움을 요청할 거라서 생각보다 수가 모자라다는 느낌은 없을 거야. 더군다나 전용 장비까지 만들어야 하니까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불리해져.”
붉은 하늘에서 내리는 붉은 비.
아무리 고레벨 구원자라 해도 비에 맞으면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그렇기에 비를 피할 수 있는 전용 장비를 만들어야 하는데, 제작자는 굉장히 귀한 인재다.
시현이 알고 있는 제작자는 천수민 한 사람 뿐.
아무리 천수민이 노력한다 한들 며칠 사이에 구원자 전원이 사용할 수 있는 장비를 만들어 내는 건 불가능하다.
“음…….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에 교단이 숨겨 놓은 창고 하나를 발견했는데, 거기에 장비들이 가득하더라고요. 혹시 거기에 있는 물건 중 대전에서 쓸 수 있는 것도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든 대전에 데려갈 인원을 늘리고 싶었는지, 이나연이 제안을 해 왔다.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었지만, 교단의 창고라면 도움이 되는 물건이 있을지도 모른다.
“가 보자.”
시현은 곧장 그녀의 안내를 받아 창고로 향했다.
VIP를 위한 병실을 개조해 만든 창고 안에는 이나연의 말대로 다양한 장비들이 즐비했다.
“총기는 기본이고, 근접 무기에 방어구까지……. 대체 얼마나 긁어모은 거야?”
시현은 혀를 내둘렀다.
이 세상에서 구원자를 위한 장비를 구하는 방법은 총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드롭 아이템을 이용해 제작자에게 의뢰를 하는 것.
두 번째는 제단을 이용해 상점에서 구매를 하는 방법.
세 번째는 악마의 둥지를 공략해 보상을 얻는 방법.
아마 여기에 있는 장비들은 악마의 둥지를 공략해 얻은 장비들일 것이다.
“천리안을 이용해 충분히 공략 가능한 둥지들을 살펴보고, 레벨 서포터를 이용해 둥지를 공략한 거 같은데…….”
시현은 웃었다.
그리 값어치가 없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중에는 시현조차 탐이 날 만한 물건도 섞여 있었다.
“나연아, 아까 내가 준 명단에 적혀 있는 사람들을 불러와 줘.”
“네.”
귀찮은 심부름에도 이나연은 싫은 표정 하나 없이 전 인원을 불러 모았다.
전원이 소집되기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나연이에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계신 분들은 다음 주에 저와 함께 대전으로 가게 되실 겁니다. 아마 이번 작전에 성공하면 이 땅에서 악마를 상당 부분 몰아낼 수 있을 겁니다. 실패하면 그 반대가 되겠지만……. 죄송하지만 거부권은 없습니다.”
시현의 말에 강소하와 진우혁은 울상이 되었다.
그러나 딱히 반발은 하지 않았다.
강소하의 경우 성공 시 이 땅에서 악마를 몰아낼 수 있다는 말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그의 궁극적 목표는 이 땅에서 악마를 완전히 몰아내 걱정 없이 게으름을 부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반대로 진우혁의 경우 악마와 싸우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인간이다.
그렇기에 싫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그래도 악마를 향한 두려움 이상으로 자신을 구해 주고, 후한 대접을 해 주는 시현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더 컸기에 그는 불만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를 위해서 먼저 무장 수준을 끌어올려야 합니다. 겉에 입을 방어구는 현재 천수민에게 의뢰해 놓은 상태이니 여러분은 여기에 있는 물건 중 손에 맞는 무기를 고르시면 됩니다.”
사실 시현의 밑에 있는 구원자들의 장비 수준은 제 능력에 맞지 않게 상당히 빈약한 수준이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천리안과 레벨 서포터를 이용해 극한까지 이익을 취하는 교단이 바로 인근 지역에 있었기에 악마의 둥지를 발견하는 것도, 토큰을 벌어먹을 건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지할 곳은 드롭 아이템뿐인데, 그마저도 확률이 극악인지라 효율적인 수단은 못됐다.
아마 제대로 된 장비를 맞추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오……. 저는 검은 다 똑같은 검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네요.”
특히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시작된 이후 줄곧 상점에서 파는 최하급 무기만 써 왔던 이나연은 지대한 호기심을 보였다.
그녀를 포함한 일행이 적절한 무기를 고르기 위해 창고 안을 돌아다니는 동안 시현도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지금 사용하는 무기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 모르지 않은가.
더 괜찮은 물건이 있을지도.
장비들에는 친절하게 설명서까지 붙어 있었다.
나중에 본인들이 사용하려고 붙여 놓은 것이겠지만, 결과는 시현에게만 좋은 일을 해 준 꼴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이건 싸구려고. 이건…… 괜찮기는 한데 핏빛 칼날 정도는 아니네. 이건 또 뭐야. 총기에 축복까지 담겨 있네?”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던 시현의 눈에 제법 괜찮은 것이 발견되었다.
‘길이는 적당한데 무게는…… 나쁘지 않네.’
생김새도 실전에서 쓰기에 딱 좋은 검이었다.
그러나 구원자를 위한 장비는 쓰기 쉬운 것 이상으로 성능을 따져 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현이 손에 든 검은 굉장히 마음에 드는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흡수의 검>
단단한 재질을 가지고 있으며 보기보다 무겁다.
공격을 받아 낼 때 가해지는 충격의 일정량을 저장해 두었다가 한 번에 되돌려 줄 수 있다.
어떤 재질로 만들어져 있고, 그 원리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제작 능력을 갖춰야만 한다.
적의 공격력을 이용해 강력한 한 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무기.
구원자라면 누구라도 탐을 냈을 것이다.
설명서의 하단에는 자그마한 글씨로 추가 사항이 기록되어 있었다.
<사브르만 고집하는 박화영은 사용을 거부. 원거리 공격을 주로 사용하는 천소해에게는 아까운 물건. 하지만 달리 검을 사용하는 고레벨 구원자가 부족. 차후 검을 쓰는 3레벨 구원자 확보 시 지급.>
보아하니 교단 내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성능의 무기인 듯싶었다.
아쉽게도 주인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지.
검을 도로 칼집에 집어넣은 시현은 어떤 물건을 고를까 신중하게 고민하는 이나연을 호출했다.
“나연아, 이거 한 번 써 볼래?”
“쓸게요.”
조금 전까지 보여 주었던 신중함은 대체 어디로 가 버린 건지.
이나연은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시현이 내미는 검을 사용하겠노라 선언했다.
“……아니, 휘둘러나 보고 결정해. 설명도 좀 읽어 보고.”
“알겠어요.”
그제야 이나연은 설명을 읽어 보고, 넓은 곳으로 가서 검을 몇 번 휘둘러보았다.
그러고는 활짝 웃는다.
“어느 정도까지 공격을 흡수하고, 어느 정도 위력으로 되돌려 주는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써는 굉장히 마음에 들어요.”
빈말이 아니었는지 그녀는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게감이나 길이, 손에 착 감기는 느낌 따위가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나는 됐어.”
강소하는 손사래를 치며 창고에서 나갔다.
애초에 강소하가 적극적으로 근접전을 하는 구원자도 아니었을뿐더러, 그에게는 애지중지하는 창이 있었으니까.
민서라는 손을 완벽하게 감싸는 건틀렛 하나를 골랐다.
“일단 성능은 가장 마음에 드네요. 문제되는 건 디자인이랑 무게인데…… 이쪽은 나중에 수민이한테 고쳐 달라고 하면 되겠죠.”
마지막으로 진우혁은 저격수들이나 사용할 법한 저격 소총을 가져왔다.
총기에 축복이라는 굉장히 드문 조합을 가지고 있었기에 시현이 눈여겨본 물건이었다.
“저는 근접전에 그리 자신이 없어서요. 이거라면 그래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알겠습니다.”
시현은 흔쾌히 그의 선택을 허락했다.
악마를 상대로 총기는 그리 효율적이지 못한 장비이다.
그러나 진우혁을 대전에 데려가는 이유가 그의 무력보다는 권능을 우선시한 선택이었기에 그의 전투력이 부족하다 해도 문제는 없었다.
“그러면 남은 것은 다른 구원자들에게 지급하기로 하고. 이제 4레벨을 목표로 달릴 차례네.”
“그러고 보니 어떤 식으로 경험치를 확보하실 건가요? 3레벨에서 4레벨이 되기까지 필요한 경험치는 보통이 아닐 텐데.”
호기심을 느낀 민서라가 질문을 던졌다.
시현은 대답 대신 가방에 애지중지 보관하고 있던 무언가를 꺼내 보여 줬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구슬.
라디아턴트의 맹세였다.
지금 이 타이밍에 구슬을 꺼내 보여 준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민서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반대로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제정신이에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만한 것이 없더라고요.”
그런 민서라의 속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시현은 놀리기라도 하듯 마냥 웃고만 있었다.
“이 근방에 괜찮은 악마의 둥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서울에 있는 대형 악마는 전부 토벌했지. 그렇다고 멀리까지 갈 수도 없으니 이것밖에 더 있나요. 더군다나 병원은 방어 설비도 잘 갖춰져 있잖아요.”
“그렇다고 맹세를 본진에서 사용한다고요?”
민서라는 굉장히 초조한 상태였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자신이 어느새 시현의 멱살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시현의 결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여러분은 경험치를 먹어서 레벨을 올릴 수 있고, 저는 라디아턴트의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있고. 일석이조 아닌가요?”
“그건 너무 시현 씨 입장에서만 생각한 거 아니에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아닌 거 같아요.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보시면…….”
빠직.
“야!”
결국 폭발한 민서라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라디아턴트의 축복이 깃듭니다.>
<신체 및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부정적 요소들을 제거합니다. 저주, 이능에 영구적으로 미미한 저항력을 갖게 됩니다.>
<강한 축복으로 인해 향후 7일 동안 습득하는 경험치의 양이 증가합니다. 해당 기간 동안 외피의 강도가 상승합니다.>
그날.
병원에 거주하고 있던 모든 구원자들을 눈앞에 해당 메시지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마냥 좋아라 하던 구원자들이었으나, 그들 중 일부가 이전 성남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성남에서는 비슷한 내용의 메시지가 나타난 이후 이그드라실이 등장하지 않았던가.
구원자들은 공포에 떨었다.
단 한 명.
시현을 제외하고 말이다.
<라디아턴트가 가진 힘의 일부를 확보했습니다. 영구적으로 습득하는 경험치의 양이 증가합니다.>
<라디아턴트의 힘은 저항과 강화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이능에 대한 저항 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수준 낮은 이능은 신체 및 정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자신 및 타인의 공격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아르하의 권능을 이용해 모방할 수 있는 권능의 개수가 한 칸 증가합니다. 해당 칸은 라디아턴트의 권능으로 고정됩니다.>
<라디아턴트의 권능을 사용할 때 정신력을 소모하지 않습니다.>
<라디아턴트의 축복을 받은 구원자들을 강제할 수 있습니다. 단 본인보다 레벨이 낮은 경우에 한합니다.>
* * *
서울에 존재하는 대형 악마는 총 셋이다.
히드라.
콜로서스.
아르베니아.
현재 세 마리의 악마들은 전부 토벌당한 상황.
때문에 시현이 인근의 악마를 도발하는 라디아턴트의 맹세를 사용했음에도 대형 악마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대형 악마가 없는 만큼 이전에는 겁을 먹고 등장하지 않았던 중형, 소형, 초소형 악마들이 모여들었다.
“와…… 진짜 징그럽게 많네.”
병원의 옥상에서 망원경으로 주변을 살피던 신호석이 중얼거렸다.
병원의 주변에 쌓아 놓은 바리케이드와 담장 너머에는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악마들이 모여 있었다.
놈들은 자신을 자극한 라디아턴트의 주인을 공격하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두드렸다.
중형, 소형, 종의 구분 없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병원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 따로 없었다.
적들은 비단 지상으로만 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보면 하늘에도 날개 달린 놈들이 가득했으며, 아마 땅 밑에도 몇몇 놈들이 땅굴을 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호석을 비롯한 구원자 전원은 근심 걱정 하나 없었다.
“악마들이 아무리 많아봤자 무섭지도 않다.”
“그러니까. 우리 리더는 5레벨 구원자이자, 두 개의 권능을 가진 최강의 구원자니까!”
구원자들은 리더인 시현을 향해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신호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교단의 에이스로서 시현과 가까운 곳에서 싸운 경험이 많기에 그가 어느 정도로 강한지 남들보다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시현이 지금의 상황을 해결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신호석을 비롯한 구원자들의 기대는 뒤늦게 등장한 강소하로 인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윤시현은 이번 전쟁에 참가 안 해.”
“……뭐요?”
구원자들 사이에서 더 이상 웃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