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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175화 (175/225)

[175화]

시현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땅을 박찼다.

그러곤 이나연의 발목을 휘감은 촉수를 내리쳤다.

놀랍게도 시현의 일격에 촉수는 끊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급한 마음에 힘을 일부밖에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믿기 어려운 결과였다.

다만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것인지 잡고 있던 이나연의 발목을 놓아주었다.

“괜찮아?”

“으아아…… 안 괜찮은 거 같아요.”

이나연은 바닥에 쓰러진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이나연의 외피를 깨뜨리고 발목을 으스러뜨린 것이다.

고통 때문에 땀을 흘리면서도 혹시 시현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이나연은 최선을 다해 비명을 아꼈다.

시현은 어둠 속을 노려봤다.

스멀스멀 붉은 촉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현은 놈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미치겠네. 왜 벌써 저것들이 모습을 드러낸 거야?’

시기가 맞지 않는다.

원작에서 놈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마지막 전쟁의 바로 직전이었다.

그 때문에 촉수들은 최후의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자 정도로 취급됐었다.

즉 지금 이런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도 좋을 놈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뭐가 어떻게 잘못된 거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하나밖에 없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금방 답이 나왔다.

이한울.

그 인간이 저지른 짓이 분명했다.

이설아의 Re write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은 덕에 이한울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설아가 죽은 충격으로 자포자기라도 한 건가?’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일단 저것부터 어떻게 해야겠네.”

수많은 촉수 중에는 돌연변이 바퀴벌레를 붙들고 있는 놈도 존재했다.

시현이 공격 태세를 취함과 동시에 촉수가 일제히 날아들었다.

시현은 가장 선두에 있는 촉수를 쳐냈다.

조금 전 실패를 경험삼아 대충 하지 않고 온 힘을 다했다.

그런데도 촉수는 잘리지 않았다.

외피로 견딘 것도 아니다.

그저 순수한 내구성으로 5레벨 구원자의 일격을 견뎌 낸 것이다.

“역시 그냥은 안 되나!”

촉수의 내구성을 확인한 시현은 바로 권능을 사용했다.

만약 이마저도 통하지 않으면, 그 때는 라디아턴트의 권능이고 뭐고 무작정 달아나야 한다.

다행히도 권능을 이용한 일격은 통했다.

그런데 하나 문제가 발생했다.

<이자프는 구루벨보다 상위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권능이 힘을 잃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전혀 예상치 못한 문구의 등장에 당황하고야 말았다.

어째서 이 타이밍에 이런 문구가 나타났단 말인가.

머릿속이 복잡했으나, 지금은 눈앞의 적에 집중할 때다.

촉수 하나가 잘려 나갔지만, 아직 남아 있는 촉수의 개수는 많다.

생물이라기보다는 움직이는 식물에 가까운 촉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시현의 손에 몇 개의 촉수가 잘려 나가더라도 놈들은 달아나지 않았다.

심지어 하나를 베어 내면 어둠속에서 두 개의 촉수가 추가로 나타났다.

‘촉수를 아무리 잘라 봤자 의미 없어. 본체를 처치해야 하는데……. 이 어둠 속에서 본체를 찾아다니는 건 너무 위험해.’

무엇보다 다리 부상을 당한 이나연을 방치해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정을 내린 시현은 조금 무리해서 다섯 개의 촉수를 동시에 잘라 냈다.

그 대가로 오른쪽 어깨를 당하고 말았다.

‘스쳤는데도 외피가 너덜너덜해졌어.’

대형 악마도 일격에 시현의 외피를 깨뜨리지는 못한다.

방어력은 둘째치더라도 공격력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놈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의 공격으로 촉수에 붙들려 있던 바퀴벌레가 해방되었다.

촉수에 붙들리며 날개가 찢겨진 건지 날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 바퀴벌레가 시현을 향해 더듬이를 까딱거렸다.

마치 ‘날 살려 준 게 너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현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바퀴벌레를 반으로 베어 버렸다.

반으로 쪼개지며 죽은 바퀴벌레의 체액을 듬뿍 뒤집어 쓴, 라디아턴트의 맹세가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그것을 주워 든 시현은 이나연까지 회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시현이 어두운 장소로부터 벗어난 이후, 촉수는 더 이상 그의 뒤를 쫓지 않았다.

* * *

본진으로 귀환한 시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병원의 불을 죄다 켜는 것이었다.

지하부터 최상층.

심지어 사람이 잘 가지 않는 장소나 사용할 때만 불을 켜는 화장실, 주방 등.

모든 곳에 전등을 켜도록 지시했다.

당연하지만 그만큼 전력의 소모가 커졌고, 그에 따라 새로운 발전기 하나를 추가로 배치해야 했다.

심지어 잠을 잘 때에도 불을 전부 켜두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대체 왜 저러시는 거야? 나 밝으면 잠 못 자는데.”

“리더가 하는 일이니 뭔가 이유가 있겠지…….”

지금까지 쌓아 온 신뢰 덕에 생존자들은 시현의 기행에 의문을 품을지언정, 반발하지는 않았다.

단 한 명.

민서라만이 시현의 기행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원작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같은 참가자이지만 딱히 생각이 없는 진우혁은 그냥 그러려나보다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해 주지 않으면 생존자들이 불안해 할 거예요. 불만도 쌓일 테고.”

모두를 대표해 이나연이 이유를 물었다.

발전기 설치를 마친 시현은 의자에 앉아 입을 열었다.

“아까 봤던 촉수 있지?”

“제 발목을 아작 낼 뻔했던 그놈이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이나연이 붕대에 감겨 있는 자신의 발목을 확인했다.

치료제를 먹었음에도 상처가 바로 낫지 않아 현재 이나연은 급하게 만든 목발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놈 머지않아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기 시작할 거야.”

“어…… 그러면 큰일인데.”

이나연은 3레벨 구원자다.

세력 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바깥을 쭉 둘러봐도 그녀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그녀에게 패배를 안겨 줄 수 있는 구원자를 꼽으라면 그 수는 더욱 한정된다.

그런 이나연이 이렇다 할 저항조차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했다.

그런 놈들이 전국 각지에서 멋대로 활개를 친다면 인류는 머지않아 멸망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시현의 얼굴엔 여유가 보였다.

“불만 켜 두면 돼. 그놈들은 밝은 곳에서는 활동을 못 하거든. 물론 예외는 있지만, 아직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아! 그래서 타워 밖으로 빠져나온 저희를 쫓지 않았던 거군요.”

“맞아. 그러니까 인천연합이나 교회, LT마트를 포함해 가능한 많은 세력에게 해당 소식을 전해야 해.”

“그거라면 제가 맡아서 할 게요.”

“아니야.”

당장이라도 방에서 뛰쳐나가려는 이나연을 시현이 뜯어말렸다.

일손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다리가 다쳐서 절뚝거리는 이나연에게 일을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주기적으로 공연을 시작한 이후, 생존자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인기가 많은 이나연 아닌가.

그들로부터 온갖 혐오와 경멸의 시선을 받을 게 분명했다.

“다쳤잖아. 가서 쉬고 있어.”

“심심한데.”

“그러면 여행 준비라도 하고 있던가. 내 아르하의 권능이 회복되면 곧장 날아갈 거니까.”

“알겠어요.”

괜히 무리를 하다가는 회복이 늦어질 수도 있다는 걸 이나연도 알고 있었다.

불만이 있는 듯했으나 그녀는 순순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대충 작업을 마무리 한 시현은 밖으로 나갔다.

한참 전에 해가 저물었건만, 병원 내부는 대낮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밝았다.

“광원 설치는 이만하면 됐고.”

모든 작업을 마친 시현은 간만에 허리를 폈다.

어느새 창밖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놈들이 활동하기엔 딱 좋은 여건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았다.

병원의 빛이 꺼지지 않는 한, 놈들은 병원 근처에도 오지 못할 테니까.

“시현 씨!”

발전기가 설치된 방에서 막 빠져나온 시현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복도와 계단이 만나는 곳에서 민서라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이요?”

시현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병원은 평소 많은 손님을 받아들인다.

교역에 관하여 논의하고자 LT마트의 한기훈, 교회의 임태연, 인천연합의 이은아는 기회가 되면 수시로 오가고는 한다.

그리고 병합 문제로 테크노벨리에서도 자주 사람을 보냈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거대 세력에 몸을 의탁하고 싶어 하는 떠돌이 생존자들이 꾸준히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이 늦은 시간에 손님이 찾아온 적은 없었다.

밤은 악마가 활동하기 좋은 시간이고, 그만큼 낮에는 없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밤에 손님이 찾아왔다는 것은 어지간히 급한 일이거나, 굉장히 먼 곳에서 왔다는 말이다.

“일단 손님용 방으로 안내해 드렸는데, 최대한 빨리 시현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셔서요.”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가 보도록 할게요.”

시현은 곧장 손님방으로 향했다.

노크를 하자 안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남자의 목소리였다.

친숙하지는 않지만 분명 들어 본 적 있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보이는 얼굴이 시현을 놀라게 만들었다.

“김영운 씨?”

“오랜만입니다.”

제 방인 양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미소를 짓고 있는 인물은, 부산에 있는 등대의 에이스이자, 랭킹 1위 한소현의 오른팔이며, 유일무이의 예언자이기도 한 인물.

김영운이었다.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한 시현은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그 김영운이 일반적인 이유로 부산을 떠나 멀리 있는 서울까지 왔을 리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다고 정색할 수도 없는 노릇.

시현은 애써 웃으며 인사를 늘어놓았다.

“네,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한소현 씨도 잘 계시고요?”

“그럼요, 잘 지냈죠. 지금까지는.”

“…….”

마지막에 붙은 한 마디가 시현이 느끼는 불안함을 가중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시현 씨, 오랜만의 재회에 회포를 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럴 여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진지한 얼굴을 한 그는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한숨을 내쉰 시현이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 찰나.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혹시 대전 수목원에 연관된 이야기입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이미 알고 계셨던 건가요?”

“예. 그렇지 않아도 해결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전에 있는 수목원.

이설아의 Re write를 통해 이한울이 수목원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은 파악하고 있었고, 붉은 촉수와의 만남을 통해 이한울이 꾸미던 일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방치해 두면 그렇지 않아도 낭떠러지 끝에 몰려 있는 인류를 완전히 나락으로 빠뜨릴 수도 있는 중대한 이벤트다.

해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던 찰나에 등장한 예언가 김영운.

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위해 서울까지 왔는지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대단하네요. 저는 예언을 통해 겨우 감만 잡고 있는 상태였는데, 벌써 문제를 파악하시고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계시다니…….”

김영운은 진심으로 시현에게 존경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제가 놓치고 있는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 정보 교환부터 시작하죠.”

김영운이 모든 미래를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보는 미래는 인위적으로 뒤틀려 하지 않는 이상 100% 맞아 떨어진다.

그리고 시현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이설아의 Re write에서 발췌한 것.

어디까지나 이설아의 시선에서만 서술되어 있고, 그녀의 입장과 생각을 토대로 묘사되어 있다.

그렇기에 상세한 부분에서는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그 오류를 최소한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김영운과의 정보 교환이 필요했다.

시현의 제안에 김영운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제가 본 미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총 세 개의 미래를 봤습니다.”

“세 개나요?”

시현은 순수하게 놀랐다.

이전에 인천의 검은 수해에서 발생한 외신 사건에서도 김영운이 본 미래는 두 개였다.

그러나 지금 본 미래는 세 개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번 사건이 지난번 사건보다 더욱 심각한 수준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첫 번째는 대전 수목원에 대한 미래였습니다. 수목원의 중앙에 거대한 구덩이가 있고, 그곳에서 붉은 기둥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습니다.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붉은 하늘에서는 붉은 비가 쏟아졌어요. 붉은 하늘은 조금씩 범위를 넓히고 있었습니다. 예언을 보고 난 후 곧장 조사대를 보냈지만 이미 사건은 벌어지고 난 후였어요.”

“그렇군요.”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예언은 그저 ‘이런 상황이 벌어졌으니 인지해두어라’ 정도의 정보밖에 담겨있지 않았다.

그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기에 김영운은 곧바로 두 번째 이야기를 꺼냈다.

“두 번째 예언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스스로가 예언을 보고 있다는 자각은 있는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새까만 어둠만이 가득한데…….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예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저희 리더께서 한 가지 추측을 내놓으셨는데…….”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다음 말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시현을 안달하게 만들려는 속셈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을 망설인 것이다.

그는 마른 입술을 물로 축이며 말을 이었다.

“먼저 말씀드리면 보통 여러 차례 예언의 꿈을 꾸게 되는 경우. 첫 번째 꿈은 사건의 원인이나 현상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두 번째 꿈은 그에 대한 대처를 하지 않았을 시 나타나는 결과를 보여 주고요.”

“즉, 대전의 수목원에서 발생한 사건을 처리하지 않으면 새까만 어둠이 찾아온다. 이 이야기입니까?”

김영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도 나름대로의 이유를 추측했다.

머지않아 시현은 한 가지 추측을 내놓았다.

두 남자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김영운 씨의 죽음입니까?”

“관측자인 저의 죽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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