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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172화 (172/225)

[172화]

붉은 머맨은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느리다.

아무리 두 다리를 필사적으로 놀려 봐야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물을 차고 나가는데 도움을 주는 물갈퀴는 뭍에서의 속도를 떨어뜨릴 뿐, 현 상황에서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저리 비켜.”

시현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머맨의 목을 베었다.

그러면 그만큼 빈자리가 생겨야 하는데 금세 다른 놈이 달려들어 빈자리를 채워버린다.

그러다 보니 좀처럼 붉은 머맨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지 않았다.

“귀찮네.”

짜증이 났다.

콜로서스의 죽음에 겁을 집어먹고 무작정 달아났어야 할 놈들이건만, 붉은 머맨을 지키겠다며 몸을 던지고 있었다.

덕분에 좀처럼 진도가 안 나가니 짜증이 한계까지 솟구친 것이다.

“아, 진짜 폭풍. 폭풍 한 방이면 싹 다 정리될 놈들인데……. 광역기만 있었어도……. 아니, 잠깐. 나 광역 기술 있잖아.”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시현은 멍해졌다.

지금까지 폭풍이나 백색 불꽃 등, 아르하의 권능으로 모방한 광역기에 의존해 왔기에 깜빡하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된 두 권능만큼은 아니지만 처형의 권능에도 나름 광역 기술이 존재했다.

“와, 그걸 깜빡하고 있었네. 하도 안 써먹어서 그런가?”

어쩌면 잠시나마 아르하의 권능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 오히려 행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로 늘어뜨린 검에 검은색의 기운이 맺혔다.

점점 붉은 머맨은 멀어지고 있었지만 시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검은 기운이 완전히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툭.

바닥을 살짝 쳤다.

검에 맺혀 있던 검은 기운이 파동이 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파동에 닿은 머맨들이 반으로 갈라진다거나,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기괴한 형상으로 바닥에 쓰러져 침을 질질 흘리며 벌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약자에게 가하는 압도적인 공포.

그것이 이자프의 권능에 담긴 힘의 일부였다.

이전에 사용했을 때보다 반경도, 효과도 한참은 강화되어 있었다.

‘소형은 당연하다는 듯 자빠져 있고, 중형은…….’

저 멀리 다른 머맨들과 다를 바 없이 공포에 떨고 있는 붉은 머맨을 확인한 시현은 미소 지었다.

시현이 권능으로 공포를 부여할 수 있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시현과 일정 수준 이상의 격차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때문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보통 머맨들이 더 이상 앞을 가로막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현은 상당히 강해져 있었고, 그로 인한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시현은 붉은 머맨에게 다가갔다.

[무우우우…….]

얼마나 겁에 질렸는지 붉은 머맨은 악마답지 않게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강아지나 고양이도 아니고.

흉측한 외관의 머맨이 눈물을 흘려 봤자 일말의 동정심도 생기지 않았다.

시현은 죽은 생선의 대가리를 쳐 내는 느낌으로 놈의 목을 베어 버렸다.

잘린 머리는 바닥을 뒹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붉은 머맨의 머리는 시현에게 있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잘린 머리가 공포에 떠는 머맨들 사이를 굴러 강물에 떨어지는 사이, 시현은 단 한 번도 머리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붉은 머맨이 떨어뜨린 지팡이의 끝에 매달린 구슬에 못 박혀 있었다.

* * *

루에드의 맹세.

지상에 강림한 네 신 중 하나가 남긴, 정확하게는 떠넘기고 간 힘의 일부다.

사용하면 일정 지역에 강력한 축복을 선사하며 아르하의 권능을 가진 이에게 영구적으로 속성 방패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방어에 있어서 굉장히 유용한 권능으로, 원작에서 정훈이 굉장히 자주 사용한 권능이기도 하다.

배워 두면 정신력을 많이 잡아먹는 일방통행을 아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현은 루에드의 맹세에서 욕심을 버려야만 했다.

“그래도 루에드의 맹세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라디아턴트를 달라고 했으면 조금 아까울 뻔했어.”

라디아턴트는 앞으로 얻게 될 맹세 중에서 시현이 가장 높은 가치를 매기고 있었다.

발푸르기스와의 거래 때는 워낙 마음이 급해 가장 가치가 높다고 생각한 라디아턴트의 맹세를 거래 조건으로 내밀었지만, 막상 이렇게 되고 나니 라디아턴트가 아니라 루에드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어쩌면 이마저도 아르하의 안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쪽입니다.”

임태연의 목소리가 시현의 집중을 깨웠다.

시현은 임태연의 뒤를 따라 교회의 어두운 복도를 걷고 있었다.

상당히 넓은 교회에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없으며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장소.

여기까지 오며 시현은 몇 번이나 출입 금지 표지판을 마주해야 했다.

주요 식량 창고도 이 정도로 엄중하게 관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현은 임태연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두 사람이 향하고 있는 장소.

그곳에 있는 것은 임태연의 제단이었으니까.

제단은 파괴되면 여러모로 패널티가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엄중하게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고 보니 내 제단, 호텔 붕괴 때 파괴되지는 않은 것 같던데. 시간 내서 한번 잘 있나 확인해 봐야겠네. 그리고 병원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이한울의 제단도 찾아봐야겠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금방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제단이에요.”

창고로도 쓰기 힘들 정도로 좁고 어두운 방 안.

그곳에 자그마한 제단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원하는 만큼 사용해 주세요. 나오실 때는 여기 열쇠로 자물쇠를 걸어 주시면 됩니다.”

웃으며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열쇠를 시현에게 건네준 임태연은 방에서 퇴장했다.

사실 타인에게 제단을 공개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도 없지만, 시현을 극한까지 신뢰한다는 증거이다.

물론 제단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신뢰도 크게 흔들리겠지만 말이다.

제단 앞에 선 시현은 루에드의 맹세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제단 위에 올려두었다.

“약속은 이행했습니다.”

그 직후 제단에 푸른빛이 차올랐다.

눈을 뜨고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빛을 견디지 못한 시현은 눈을 감고 말았다.

좁아터진 방을 가득 채우던 빛이 완전히 사라진 후 시현은 눈을 떴다.

분명 제단 위에 올려 두었던 구슬은 오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 대신 시현의 눈앞에는 세 줄의 문구가 나타나 있었다.

<발푸르기스와의 약속을 이행했습니다.>

<발푸르기스의 눈이 남산타워의 정상을 가리킵니다.>

“음?”

구슬을 넘기고 나면 끝이라 생각했건만.

뭔가 뒤가 있는 모양이었다.

“남산타워……. 남산타워라면 분명 악마에게 점령당해 있는 장소인데……. 왜 거기를 가리킨다는 거야?”

발푸르기스는 시현에게 그리 호의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시현이 이설아의 권리에 대한 조건으로 라디아턴트의 맹세를 내걸었을 때, 루에드의 맹세까지 조건으로 제시할 만큼 욕심이 많은 존재이기도 하고.

그런 존재가 무상으로 무언가를 베풀었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시현은 발푸르기스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고민했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설마 라디아턴트의 맹세가 있는 장소가 남산타워인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발푸르기스는 절대 시현을 위해 무언가를 베풀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발푸르기스가 지상에 있는 무언가에 흥미를 보이는 경우는 맹세와 관련되어 있을 때뿐이다.

그런 발푸르기스가 은근슬쩍 남산타워의 정상을 속삭였다면, 거기에 맹세가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렇다면 굳이 그 장소를 내게 알려 준 이유는…… 순수한 호의는 아니겠고. 아르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넘어갔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아까워서 맹세를 찾아서 내놓으라고 은근슬쩍 압박하려는 건가?”

이 역시 발푸르기스의 성품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아르하가 등장하지만 않았어도 시현은 루에드와 라디아턴트, 두 개의 맹세를 대가로 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일단 약속한 게 있었고,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가는 발푸르기스가 직접 강림하게 되는 건수를 만들어주는 셈이기에 어쩔 수 없이 루에드의 맹세를 바쳤다.

하지만 공식적인 약속은 딱 여기까지였다.

괜히 겁을 집어먹고 발푸르기스에게 라디아턴트까지 넘길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상대는 인과율에 얽매여 있는 존재.

제 마음대로 지상에 들락날락하는 건 불가능하다.

“까고 있네.”

시현은 제단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마른하늘에 번개가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가뿐히 무시한 시현은 제단이 있는 방을 나왔다.

약속대로 자물쇠를 걸어 출입문을 봉쇄하고 긴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오니 임태연이 그를 반겨 주었다.

“원하시는 일은 잘 해결되셨나요?”

“네. 어려운 부탁이었을 텐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현은 가지고 있던 열쇠를 건넸다.

그것을 줄에 엮어 목에 건 임태연은 활짝 웃었다.

“뭘요. 시현 님은 교회를 벌써 두 번이나 구해 주셨잖아요.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그게 뭐가 되었건 적극적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시현은 임태연에게 펜과 종이를 빌렸다.

조금 얼룩이 묻어 있는 하얀 종이 위에 몇 자를 휘갈겨 쓴 시현은 그것을 대충 접어 임태연에게 건넸다.

“이걸 교회에 있는 민서라 씨에게 전해 주시겠습니까?”

“아, 굉장히 쉬운 일이네요. 오늘 바로 전해 드리도록 할게요.”

“그러면 부탁드립니다.”

이 쪽지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뭐가 되었건 시현의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임태연은 마냥 즐거워했다.

그 편지가 자신을 지옥으로 안내할 초대장이라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 * *

“이 인간이 또…….”

직접 병원으로 행차한 임태연에게 편지를 전달받은 민서라가 뒷목을 잡았다.

편지에 담긴 내용은 간결했다.

급한 일이 생겨 잠시 어디 좀 들렀다가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세력은 잘 부탁드립니다.

“떠넘겼어……. 또 나한테 전부 떠넘기고 혼자 어디로 가 버렸다고……. 리더로서의 자각이 전혀 없어!”

간만에 혈압이 치솟았다.

민서라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평소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화를 내면 무섭다는 말처럼, 간만에 터져 나온 민서라의 분노는 임태연을 쩔쩔매게 만들었다.

임태연에게 죄가 있다면 시현의 편지를 성실하게 전달한 것뿐인데 말이다.

‘뭐가 이렇게 무섭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민서라의 분노도 무서웠지만, 이나연에 비하면 그나마 양반이라 할 수 있었다.

“오빠가 어디로 갔다고?”

한 자루의 벼려진 칼날과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살기를 뿌려대는 이나연의 앞에 서 있자니 진심으로 졸도할 것 같았다.

실제 같은 장소에 있던 쌍둥이나 신호석, 강소하 같은 경우는 진즉 달아난 지 오래였다.

‘아, 시현 님. 저는 당신을 굉장히 존경합니다만…….’

조금은 그 마음이 꺾일 거 같았다.

* * *

임태연에게 중대한 임무를 떠넘긴 시현은 남산을 올랐다.

늘 황폐하게 망가진 도심지만 오가다가 간만에 초록이 무성한 산에 오르니 상쾌함이 느껴졌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들이마시는 공기마저도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건 또 뭐야?”

자신의 얼굴을 노리고 달려드는 무언가를 향해 시현은 손을 휘둘렀다.

굉장히 빠른 속도였지만 5레벨 구원자인 시현이 반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찌익!]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던 무언가는 비명을 지르며 지면에 처박혔다.

무언가의 정체는 바로 사슴벌레였다.

물론 평범한 사슴벌레는 아니다.

덩치가 사람의 머리통만해서 상당히 징그러우며, 뿔은 과도하게 발달되어 있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일단 악마인 건 분명해 보였다.

문제는 그런 놈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수풀 사이, 나무 위, 바위 틈.

곳곳에 몸을 숨긴 채 기회를 노리고 있는 악마가 족히 수십은 되어 보였다.

“남산타워가 악마에게 점령되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직 근처에도 안 갔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튀어나오다니…….”

목적지인 남산타워엔 대체 얼마나 많은 수의 악마가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그렇게 남산타워 앞에 도착한 시현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리고 말았다.

“와…… 이건 뭐 거의 악마의 성이 아니라 벌레의 성이네.”

비유가 아니라 실제 남산타워는 벌레의 성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변질되어 있었다.

한 때는 서울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자 연인, 가족을 위한 나들이 장소로 유명했지만, 이제는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타워의 겉 부분은 온통 붉은색의 고깃덩이로 뒤덮여 있었으며 도드라진 핏줄은 계속해서 맥동하고 있었다.

거대한 지네 수십 마리가 그 위를 휘감고 있었으며, 인근 나무는 온통 거미줄로 뒤덮여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면 늘어진 고치가 보이고 하늘에는 소름끼치도록 거대한 날벌레들이 비행을 즐기고 있었다.

그 크기가 어찌나 거대한지 날아가는 비둘기를 한 입에 삼켜 버리는 놈도 존재했다.

소형, 중형 가리지 않고 벌레가 가득한 공간.

그게 바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남산타워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을 끔찍한 광경이지만, 시현은 거리낌이 없었다.

“가 볼까.”

애초에 그는 벌레를 그리 혐오하지 않는다.

크기가 커서 조금 부담된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그 정도가 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을 열고 타워 내부를 확인한 시현은.

“안녕히 계세요.”

곧바로 문을 닫았다.

타워 안쪽에는 검고 매끌매끌한 날개와 긴 더듬이를 가진 암갈색의 벌레들이 바글바글했다.

“아무리 나라도 바 선생은 좀 그런데.”

중얼거리는 시현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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