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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167화 (167/225)

[167화]

꽈르르릉!

번개가 내리쳤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시작된 청색의 번개는 이설아의 코앞에 떨어졌다.

번개가 떨어진 자리에서 청색의 뇌전이 모여들더니 인간의 형태를 만들어 냈다.

<발푸르기스 제한적 강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현세에 개입했기 때문에 발푸르기스는 본 힘의 지극히 일부밖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인외의 존재에게 대항할 수단이 없습니다.>

<시스템 에러. 발푸르기스와 너무 가까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발푸르기스와 거리가 멀어질 때까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원작에서는 몇 번인가 지상에 신이 강림했다.

그 때마다 인근에 있던 구원자들은 위와 비슷한 내용의 메시지를 받았다.

즉, 눈앞에 있는 이목구비조차 없는 푸른 인간은 초월적 존재이자 외신과 비견되는 존재.

신이라 불리는 생명체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숨을 쉬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발푸르기스는 시현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크로노아의 종이여. 계약을 이행하라. 네가 가진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니, 너는 영원토록 내 곁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이설아의 신체를 푸른 뇌전이 휘감기 시작한다.

그것을 지켜보는 시현의 호흡이 가빠졌다.

식은땀이 흐르고 동공이 격하게 떨렸다.

뺨을 타고 뜨거운 물방울이 흘렀다.

시야가 흐려졌다.

이설아의 계략으로 인해 호텔의 모든 인원이 사망했다.

그것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이설아를 죽이고 그녀가 가진 권능을 모방해야 한다.

그러나 발푸르기스로 인해 이설아를 죽일 수가 없다.

때문에 시현은 오래간만에 지독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

그것이 시현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

시현이 핏빛 칼날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간 순간.

발푸르기스가 고개를 돌려 시현을 응시했다.

이목구비는 없지만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패여 있는 오목한 굴곡이 마치 시현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관둬라. 아무런 권위가 없는 네놈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다. 동시에 아르하와 이자프의 축복을 받은 네놈을 건드려서 내게도 좋을 게 없지. 서로 귀찮아질 뿐이다.]

그것은 발푸르기스가 베푼 최대한의 자비였다.

시현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이 발푸르기스에게 적의를 품어 봤자 좋을 게 하나 없다는 것을.

발푸르기스의 손짓 한 번이면 시현의 심장은 그대로 멈추고 말 것이다.

인간과 신.

두 종족 사이에는 그 정도로 격의 차이가 있었다.

‘침착해.’

시현은 자신을 타일렀다.

이제는 가족이라 칭할 수 있는 사람들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지라 사고력이 저하되어 있었다.

‘무언가 수단이 있을 거야.’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 결과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번뜩였다.

“발푸르기스. 거래를 제안합니다.”

[……인간 따위가 감히 내게 거래를 제안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발푸르기스는 헛웃음을 쳤다.

발푸르기스의 몸을 이루고 있는 청색의 번개가 붉게 물들었다.

뭣도 모르는 시현이이지만 그게 발푸르기스의 분노를 상징하는 색이라는 건 눈치로도 알 수 있었다.

지독한 압박감이 밀려왔다.

무형의 기운이 위에서부터 그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현은 필사적으로 견뎠다.

‘어차피 발푸르기스는 내게 손을 못 대. 그게 규칙이고, 인과율에 얽매여 있는 놈들은 규칙을 어기지 못해. 그러니까 제 입맛대로 다룰 수 있게 된 구원자, 이설아를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거야. 놈이 혹할 만한 무언가를 제시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힘들게 손에 넣은 물건이라 한들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주겠노라 제안하면 혹하지 않을 리가 없다.

신이라 해도 결국 욕망에서 해탈하지 못한 존재이니까.

하지만 시현은 발푸르기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원작에도 제대로 등장하지 않은 발푸르기스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혹할지,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으로는 어림없어. 블랙마켓을 이용하면…… 그래도 안 돼.’

블랙마켓의 물건은 어디까지나 인류의 승리를 위하여 준비된 것들이지, 신들이 혹할 만한 물건이 구비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진즉 포기하도고 남았겠지만, 시현은 끈질겼다.

과거와 현재에서 찾을 수 없다면 미래에서 찾으면 된다.

“라디아턴트의 맹세. 그것을 손에 넣게 되면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그것 참……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막 준비가 끝난 건지 푸른 장막에 휩싸인 이설아를 데리고 귀환하려던 발푸르기스가 움직임을 멈췄다.

적색의 번개도 서서히 청색으로 되돌아왔다.

[계속해도 좋다. 허가하마.]

“잠깐……!”

이설아가 무언가 말을 하려 했으나, 발푸르기스가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만으로 그녀의 입이 봉쇄되었다.

“아시겠지만 저는 아르하의 구원자입니다. 앞으로 세상에 뿌려지게 될 네 개의 맹세……. 아니, 제가 하나를 손에 넣었으니 남은 건 세 개. 그것을 다룰 수 있는 구원자는 저뿐입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구슬일 뿐이니 어떤 방식으로든 제 손에 들어오게 될 겁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애초에 신들이 맹세라는 형태로 자신이 가진 힘의 일부를 뿌려 놓은 이유가 아르하의 계약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일종의 떠넘기기였으니까.

원작에서는 정훈이었고, 리메이크 버전에서는 시현이 그 주인공이다.

설사 세상 그 누가 어떤 방법으로 맹세를 손에 넣는다 한들 그것은 돌고 돌아 시현의 손으로 오게 되어 있다.

맹세를 사용하면 시현은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각종 능력의 증가 뿐만 아니라 정신력의 소모 없이 권능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혜택이다.

그중 하나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맹세에 담긴 힘의 덩어리는 같은 신에게도 탐이 나는 물건일 것이다.

[그래. 결국 너는 나머지 세 개의 맹세를 손에 넣게 될 것이다. 그중 하나를 내게 준다면…… 그 거래에 응하지 못할 것도 없지.]

“…….”

소리도 낼 수 없고 움직일 수도 없어 그저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이설아의 동공이 격하게 떨렸다.

반대로 시현은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발푸르기스는 쉬운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네가 그것을 반드시 손에 넣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나. 그 전에 네놈이 죽을 수도 있는 거니까. 예를 들어 참가자 이한울, 네놈에게 지독한 원한을 품고 있는 그 자가 어떤 수를 준비하고 있는지 네놈은 모르지 않느냐.]

“뭐가 되었건 이한울은 제 상대가 못 됩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군.]

고개를 흔든 발푸르기스는 깊이 생각이라도 하는 것인지 손으로 턱 끝을 쓸었다.

[그 가능성까지 고려하여 루에드의 맹세. 그것까지 받도록 하지.]

“…….”

어처구니가 없는 제안이었다.

아무리 현물이 없다지만, 사실 맹세 하나만 해도 그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고작해야 다 죽어가는 3레벨 구원자 하나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물건이다.

그런데도 발푸르기스는 시현의 상황이 다급하다는 것을 이용해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이 악랄하기 짝이 없는 신을 믹서기에 넣어 갈아 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의 시현은 한 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뭐가 되었건 발푸르기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내 계약자는 너무 정이 많은 거 같아. 겨우 그깟 것들을 위해 두 개나 되는 맹세를 포기하려 들다니.]

배후에서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몸이 굳어진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눈앞의 발푸르기스에게서 느껴지던 존재감이 시현의 호흡을 힘들게 만들었다면, 지금 느껴지는 존재감은 시현에게 눈을 깜빡거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시현보다 약한 이설아의 경우, 그대로 졸도해 버리고 말았다.

[어째서 당신이…….]

발푸르기스는 크게 당황한 듯했다.

보랏빛으로 변한 신체가 제대로 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움찔거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조아렸다.

시현의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희고 가는 손이다.

[네 권한 하의 일인지라 가만히 지켜보려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구나. 아무리 이전에 비해 우리에게 여유가 있다지만, 그래도 승리가 확정된 건 아니건만……. 발푸르기스, 너는 도를 넘었어.]

[…….]

[돌아가라. 그리고 루에드의 맹세로 만족하도록.]

발푸르기스의 번개가 아주 잠깐 적색으로 변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아주 잠깐이었다.

[알겠습니다.]

깊이 머리를 숙인 발푸르기스는 강림할 때와 마찬가지로 한줄기 벼락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자, 이로써 내게 빚이 하나 생겼구나.]

무언가 대꾸를 하고 싶었는데 입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가볍게 뛰어오른 여성은 시현의 어깨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신기하게도 무게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화사한 금발이 쏟아지며 천막처럼 시현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녀는 마치 아이를 칭찬하듯 시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대가는 받지 않으마. 너는 내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었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이자프도 네게 큰 기대를 걸고 있어. 하지만 내가 큰맘 먹고 준비한 반지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은 조금 괘씸하구나. 벌을 주마.]

<아르하의 권능을 통해 모방한 권능이 일시적으로 2레벨 위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 후 1주일 동안 아르하의 권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발푸르기스가 사라졌기 때문인지 시스템 메시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시현은 움직여지지 않는 눈동자를 억지로 굴려 메시지를 읽었다.

‘설마…….’

그제야 시현은 여성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 순간, 시현의 몸을 포박하던 존재감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반사적으로 주위를 살폈으나 어디에도 여성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르하…….”

틀림없는 아르하였다.

인천시청에 방문해 시현을 찾으며 반지의 전달을 요청했다던 금발의 여성.

어처구니없게도 인과율을 무시한 채 강림해 지상을 돌아다니고 있던 신의 정체가 아르하였던 것이다.

“도대체 목적이 뭐지? 그 이전에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인과율을 무시하고 강림한 건지는 의문이었으나, 뭐가 되었건 아르하 정도나 되는 존재가 직접 강림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르하에 대해 천천히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시현은 아르하의 존재감을 견디지 못하고 졸도한 이설아에게 다가갔다.

“진짜……. 날 이토록 공포에 질리게 만든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그리고 마지막이 될 거야.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테니까.”

시현은 검을 휘둘러 이설아의 목을 쳤다.

* * *

“암만 생각해봐도 그냥 깔끔하게 처리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후환을 남겨 두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차피 이한울을 끝장내지 못한 이상 후환은 남아 있어. 사실 전쟁 때문에 테크노벨리에서 넘어온 생존자들의 신뢰가 바닥을 치는 상황이잖아. 그들의 신뢰를 사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어.”

“차라리 단호하고 무자비한 모습을 보이는 게 좋지 않아?”

“독재자라도 되고 싶은 거야?”

점점 언성이 높아지는 두 여성의 대화에 시현은 눈을 떴다.

그러자 보이는 건 침대 옆에 설치된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아 언쟁을 하고 있는 이나연과 민서라였다.

‘아…… 그러고 보니 권능을 사용하고 나서 바로 정신을 잃었지.’

아르하는 시현에게 벌을 주겠다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벌이 아니라 아르하의 자비였다.

시현의 레벨은 5.

거기서 아르하의 도움을 받아 7레벨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시현은 곧바로 시간 조작을 이용, 이설아에 의해 사망한 사람들의 시간을 전부 되돌려 놓았다.

자신의 레벨에 맞지 않는 단계의 권능은 막대한 정신력을 잡아먹었고, 시현은 정신력 고갈로 인해 기절하고 말았다.

권능이 잘 적용됐을지 정신을 잃기 전까지 걱정, 또 걱정이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성공의 증거가 눈앞에 있었다.

“어? 오빠, 일어났어요? 힘들었던 건 이해하는데 왜 아무데서나 누워서 자고 그래요? 여기까지 옮겨 오느라 엄청 힘들었어요.”

이나연이 웃으며 시현을 놀렸다.

자신이 한 번 죽고 살아났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한 말투였다.

어쩌면 7레벨의 시간 조작이 기억마저 되돌려 버린 건 아닐까 싶었다.

시현은 자신을 놀리기 위해 다가온 이나연을 끌어안았다.

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저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었다.

전신을 통해 느껴지는 온기, 고동, 숨결.

모든 게 다 감동으로 다가왔다.

“어? 뭐야. 뭐야 뭐야! 이거 뭔데! 나 오늘 죽나? 나 오늘 죽어요?”

이나연은 크게 당황하면서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보처럼 웃기까지 했다.

다음은 민서라 차례였다.

“뭐야, 저도요?”

그녀 역시 크게 당황한 듯했으나 시현의 눈을 보고 무언가 있으리라 판단한 건지 말없이 그를 안아 주었다.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고 신호석을 비롯해 구원자 전원이 일제히 시현의 방에 들이닥쳤다.

“형!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왔…… 어머나 세상에! 이게 뭐람!”

“신호석, 너도 이리 와. 제대로 살아 있나 확인해 보게.”

“엥? 그게 뭔 소리래요?”

극도로 혐오하며 달아나려 애를 쓰는 신호석이었으나, 시현의 손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쌍둥이는 자연스럽게 신호석의 뒤에 줄을 섰다.

시현은 쌍둥이를 끌어안았다.

이게 행복인가 싶었다.

그러나 마냥 행복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계약의 이행을 위해 루에드의 맹세를 손에 넣으십시오. 남은 시간 : 13일 9시간 23분.>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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