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166화 (166/225)

[166화]

“……음?”

작업에 매진하고 있던 이한울은 기묘한 감각에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어둠이 깔린 복도를 찬찬히 훑어보는 이한울의 발아래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려 주세요……. 제발…….”

다소 앳된 감이 있는 목소리.

내려다보면 피투성이의 여성이 보인다.

나이는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되었을까 싶을 정도.

온 몸에 상처를 입고 애처로운 눈으로 올려다보는 여성은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임에도 제법 미인 소리를 들을 법한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내려다보는 이한울의 눈빛은 냉랭하기만 했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물건을 바라보는 듯한 태도였다.

“조용히.”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하라는 건 뭐든지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살벌하게 답한 이한울은 대뜸 여성의 입에 손을 넣었다.

그러더니 우악스럽게 혀를 잡아당겼다.

“한 마디만 더 하면 혀를 뽑아 버릴 거야.”

“…….”

여성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이한울은 자신이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찾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여성의 머리채를 쥐고 길게 뻗은 복도를 걸었다.

머리가 뽑혀 나가는 고통에도 여성은 눈물만 흘릴 뿐, 필사적으로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참았다.

그러기를 약 10분.

이한울은 복도의 끝에 자리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검붉은 색의 바탕에 흰색의 얼룩무늬가 있는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 리더, 오셨어요? 생각보다 늦으셨네.”

제단의 근처 바닥에 조각가처럼 무언가를 새겨 넣던 한천식이 이한울을 반겼다.

며칠 밤을 꼬박 새운 건지 눈 밑에 피로가 가득하다.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그보다 또 날을 샌 건가?”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으후후후.”

음침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한천식은 작업을 재개했다.

그러는 동안 이한울은 여성을 끌고 가 제단 위에 강제로 눕혔다.

제단 위에 눕고 나서야 여성은 깨달았다.

본래 제단은 흰색이었을 것이다.

순백의 제단을 물들인 검붉은 색은 다름 아닌 피가 말라붙은 결과다.

즉, 이곳에 누운 자신을 이한울이 살려 둘 가능성이 없다는 것까지도.

모두 깨닫고 말았다.

“꺄아아…… 크억!”

비명은 목을 파고드는 차가운 금속에 의해 차단되고 말았다.

발버둥 치던 다리가 이내 축 늘어지고, 천장을 향해 뻗어진 두 손은 바닥으로 향했다.

흘러내린 피는 제단의 하얗던 부분을 붉게 칠하며 아래로 떨어졌다.

제단의 아래에 만들어진 작은 웅덩이에 고여 있던 피는 한천식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흘렀다.

이한울은 손에 묻은 피를 여성의 옷에 대충 닦아 내며 입을 열었다.

“다음 제물의 조건은 뭐래?”

“레벨 3 이상의 구원자. 가지고 있는 축복은 아델라이하. 성별은 남성. 나이는 20세 이하.”

“젠장, 더럽게 까다롭네.”

“한두 번인가요? 그래도 다행인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거죠.”

한천식은 웃었다.

이한울도 함께 웃었다.

그의 말대로 드디어 수확의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

길게 이어졌던 Re write.

각자 인생 역전을 노리는 참가자들끼리의 목숨을 건 사투.

그 최후의 승자가 되기까지 이제 머지않았다.

“다녀오지.”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짜증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이한울은 기쁜 마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긴 복도를 지나 미로 같은 공간을 지나고 나니, 초목이 무성한 수목원의 풍경이 드러난다.

내리쬐는 태양은 여전히 따사로웠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종일 지금의 기분을 유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희망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파사삭.

어깨에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구원자가 아니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미세한 촉감.

이한울은 자신의 어깨에 떨어진 무언가를 손에 주워 들었다.

작은 황색의 가루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만져지는 귀걸이에 응당 있어야 할 보석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젠장.”

이한울은 주저앉고 말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이한울의 뺨을 타고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 * *

“……어?”

시현은 크게 당황했다.

이 정도로 당황한 적이 근래에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당황한 나머지, 자신을 등지고 달아나는 수많은 적들을 앞에 두고도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갑자기 없어졌어. 말이 돼?”

분명 눈앞에 있었는데.

호위에게 짐짝처럼 들린 채 달아나던 원망 가득한 표정의 이설아가 오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포탈을 포함한 공간 이동 계열 권능을 사용했다면, 무언가 사전 징조라도 있을 텐데 그런 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당황한 것은 이설아를 짊어지고 있던 호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아야? 설아야!”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설아를 애타게 찾으며 그 이유를 파악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이쪽이에요.”

멀지 않은 곳에서 이설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남자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행동은 같았으나 반응은 달랐다.

“……?”

“서, 설아야!”

시현은 제 눈을 의심했고, 호위는 걱정에 가득한 비명을 질렀다.

타이어가 터진 자동차의 보닛 위에 이설아는 힘겹게 걸터앉아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어떻게 저 위치까지 이동했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상태가 굉장히 이상해 보였다.

오랜 시간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 것처럼 피죽이 상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설아는 온 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심지어 얼굴에까지.

지혈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건지, 붕대에는 선명하게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지?’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유추해 낼 수가 없었다.

원작의 지식을 총동원해도 이해할 수 없는 완벽한 미지의 현상.

그러다 보니 제 아무리 시현이라 해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현을 향해 끝없는 증오를 보내오던 그녀다.

그런데 지금 이설아는 마치 해탈한 사람처럼 시현에게 이렇다 할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머리에 감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혹시 이설아가 아니라 그녀와 목소리가 놀랄 정도로 비슷한 다른 사람이 아닐까 싶었지만, 얼굴을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시현은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머리카락이 길어졌어.’

본래 이설아는 어깻죽지까지 닿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마저도 굉장히 깔끔하게 정리해 놓는 스타일이었는데, 지금의 그녀는 귀신처럼 산발한 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그 길이가 무려 허벅다리까지 닿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설아는 피부 관리가 워낙 잘 되어 있는지라 우기면 10대로도 통할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이설아는 아무리 적게 쳐줘도 20대 후반으로 추정됐다.

전쟁으로 인한 피로의 누적과 체력 저하로 인해 다소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점을 감안해도다.

‘나이가 든 건가? 그 찰나의 순간에?’

보통의 상황이라면 멍청한 생각으로 일축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이설아의 권능은 시간 조작.

단순히 사자를 부활시키는 권능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이설아는 사람, 혹은 물체의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는 정도로밖에 권능을 사용하지 못했어. 하지만 만약 무언가를 계기로 그 이상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면? 아니면 패널티가 워낙 막대해 사용하지 않고 있다가 궁지에 몰려 어쩔 수 없이 꺼내 든 카드라면?’

온갖 가능성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설아의 권능은 시간 조작이야. 그렇다면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는 것 말고 멈출 수도 있는 거 아니야?’

허무맹랑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들어맞는다.

호위에게 업혀 있던 이설아의 위치가 눈 깜빡할 사이에 어떠한 사전 전조도 없이 바뀌어 있는 점.

그녀가 몇 년 정도 나이를 먹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진정한 해답은 오로지 이설아만이 알고 있다.

“뭘 한 거지?”

“표정을 보니까 대충 짐작하고 있는 거 같은데. 맞아, 시간을 멈췄어.”

시현의 예상은 그리 달갑지 않은 방향으로 적중했다.

“……그리고?”

일부러 뜸을 들이는 이설아 때문에 시현은 초조함을 느꼈다.

시간을 정지시켰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으니까.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 했느냐가 아니라 뭘 했느냐다.

이설아는 웃었다.

“곧 알게 될 거야.”

즐겁다는 듯 콧노래를 부르는 이설아의 모습은 비명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이질적이기까지 했다.

그녀가 무슨 짓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발생할 결과가 무엇인지를 모르니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때문에 시현은 달아나는 교단의 구원자와 생존자들을 뜬 눈으로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시현과 이설아.

그리고 이설아의 호위까지 세 사람뿐이었다.

‘시간을 끌고 있는 건가? 지금 죽여야 하나?’

하지만 그녀를 죽이는 게 트리거가 될 수도 있다 생각하니 좀처럼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졌다.

고작 10초도 되지 않는 짧은 침묵이 시현에게는 1시간처럼 느껴졌다.

“힌트.”

이설아는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시현은 귀걸이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봤다.

두 개가 한 쌍인 귀걸이는 한쪽의 보석이 깨지면 다른 쪽의 보석도 깨져 위기 순간에 상대방에게 신호를 줄 수 있도록 설계된 물건이다.

이설아의 귀걸이에는 보석이 깨져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짝을 누가 가지고 있는지는 천치라도 알 것이다.

‘귀걸이를 깨뜨려 이한울에게 신호를 보냈겠군. 하지만 대전에 있는 이한울이 신호를 받았다 한들 뭘 할 수 있지?’

이한울의 권능은 신혈.

악마를 유혹하거나 레벨 서포터의 재료가 되는 피를 몸에서 뽑아 낼 수 있다.

전투에는 하등 쓸모가 없는 권능처럼 보이지만, 레벨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신혈의 진면모가 드러난다.

‘신혈 사용자가 3레벨이 되면 자신의 혈액을 이용해 무기를 만들 수 있던가? 그리고 4레벨이 되면…….’

시현은 미간을 구겼다.

‘자신의 피를 폭발시킬 수 있게 돼.’

퍼엉!

생각이 정답에 가까워지는 순간, 시현의 몸에서 붉은 폭발이 발생했다.

전투로 인해 너무 많은 피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현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폭발의 세기가 너무 약했다.

겨우 이 정도로는 간당간당한 시현의 외피조차 깨뜨리지 못한다.

“아하하하하!”

이설아는 배를 잡고 웃었다.

우스워 죽겠다는 듯 뒤집어져서 발버둥까지 치고 있었다.

“보아하니 폭발까지 떠올린 거 같은데. 위력이 생각보다 약해서 놀랐지?”

“…….”

“그야 네 몸에 바른 피는 오빠의 피가 아니라 내 피거든. 혈연관계라 그런지 오빠의 권능으로 내 피도 조작할 수 있어. 효율은 쥐똥같지만.”

이설아는 몸을 일으켰다.

몸에 피가 모자라 그런지 머리를 잡고 비틀거리다 금방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도 마냥 좋다며 그녀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계산을 해 보니까 너를 내 피로 채운 욕조에 담가 놓고 폭파시켜도 죽을 것 같지가 않더라고. 그래서 죽을 것 같은 애들 위주로 피를 잔뜩 발라 주고 왔어.”

“…….”

“그러다가 피가 모자라면 회복약을 먹고, 몸이 회복되기까지 기다리고. 또 피를 바르고, 또 회복되기까지 기다리고. 몇 년이나 걸렸더라? 4년? 5년? 2년 넘기고부터는 시간을 안 새서 잘 모르겠네.”

“…….”

시현은 천리안을 사용했다.

병원의 옥상.

죽은 듯 쓰러져 있는 민서라의 허리 아래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나연과 박화영이 교전을 벌이던 장소에는 머리가 없는 시체 두 구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박화영의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나연이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건물 내부로 시선을 돌리면 비슷한 시체들이 한가득이다.

신호석, 강소하, 쌍둥이, 그리고 하나하나 언급하는 것조차 힘든 수많은 생존자들.

전부 사지 어딘가가 터져 나간 채 죽어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후우.”

시현은 애써 분노를 참았다.

조금만 방심해도 정신 줄을 놓쳐 버릴 것 같았다.

대충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시간이 멈춰 있는 동안, 자신의 피를 호텔 소속의 인원에게 흠뻑 뒤집어씌우고, 시간의 흐름을 원래대로 되돌린 이설아가 이한울에게 신호를 줘 피를 폭발시킨 것이다.

이한울 본인의 피가 아닌지라 위력은 약하지만, 그만큼 엄청난 양의 피를 사용한 것이리라.

사람 하나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피를 쏟고, 회복하고, 쏟아 내고, 회복하고.

그 끔찍한 과정을 멈춰 버린 세상에서 수년 동안 반복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방법은 있었다.

그녀를 죽이고 그녀가 가진 권능을 모방하기 위해, 시현은 검을 휘둘렀다.

이설아는 저항조차 하지 않았고, 그녀를 보호하기에 호위의 능력은 너무 약했다.

막 검이 이설아의 머리통을 반으로 쪼개려는 그 순간.

<발푸르기스에게 바쳐진 생명이자 영혼입니다. 구원자 윤시현의 권한으로 구원자 이설아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가 시현에게 절망을 심어 주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