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시현은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중 한 명,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정확하게는 시현이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얼굴이 하나였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것이다.
“나설주.”
“이거 참…… 알아봐 주셔서 영광이네.”
말과 달리 나설주의 표정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시현이 자신의 이름을 콕 집어 말했다는 것은 도주가 불가능하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귀환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안 궁금하고?”
“…….”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나설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은 워낙 외진 곳에 있어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오가는 사람을 찾는 게 굉장히 힘든 장소다.
남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될 실험실과 비밀 통로의 위치가 근방에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더군다나 지금은 바깥에서 박화영이 성대하게 쇼를 벌이는 도중 아닌가.
간다면 그쪽으로 가야지 이곳에 올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
“설마…….”
온갖 추측 끝에 나설주의 눈동자가 격하게 떨렸다.
“비밀 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던 건가? 도대체 어떻게? 그러고 보니 이재인의 보고도 없었는데 네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이재인은 죽은 건가? 그렇다면 그를 고문해서 정보를 뽑아냈겠군.”
곧 죽어도 아군이던 이재인이 배신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진실을 전했을 때 그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조금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 얻을 이익도 없는데 굳이 악랄한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귀찮으니까 깔끔하게 항복해. 목숨만은 살려 줄 테니까.”
시현의 강함은 이번 전쟁을 통해 교단의 구원자 전원이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구원자들은 슬금슬금 나설주의 눈치를 봤다.
허락이 떨어지면 일말의 주저도 없이 무릎을 꿇을 기세였다.
하지만 여전히 교단의 구원자들이 최강이라 믿고 있는 생존자들은 달랐다.
“웃기지 마라! 고작 혼자서 뭘 할 수 있다고…….”
“교단의 구원자가 얼마나 강한지 몰라서 그러는 거 같은데,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지 않으면 나설주 님께서 너를 잔혹하게 살해할 거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에잉! 교단의 구원자가 최강이라는 것도 모르는 풋내기였구먼!”
그들은 언성을 높이며 시현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댔다.
“최강…….”
시현은 지그시 나설주 및 그의 주변에 서 있는 구원자들을 응시했다.
구원자들, 특히 수치를 아는 나설주의 경우, 얼굴이 폭발할 듯 붉어져 있었다.
“저, 그, 여러분들…… 조금만 조용히 해 주시면…….”
나설주의 소심한 저지에도 불구하고 생존자들은 더욱 날뛸 뿐이었다.
늑대 뒤에 숨은 토끼들이 호랑이 앞에서 까부는 모양새 아닌가.
정작 자신들을 지켜 줄 늑대들이 맹수의 왕 앞에서 꼬리를 축 내리고 있는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했다.
어차피 비전투원인지라 신경 쓸 이유도 없겠다.
시현은 그들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빨리 선택해.”
“저 놈이 끝까지……!”
나이가 지긋한 노인 한 명이 저러다가 쓰러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핏대를 세우고 소리쳤다.
그러나.
“저, 저는 항복하겠습니다!”
구원자 중 하나가 무릎을 꿇는 순간, 노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비단 노인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라도 하려는 건지, 목청껏 소리 지르던 이들 전부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저도요. 살려만 주신다면야…….”
나이가 다소 어린 여성 구원자도 슬그머니 무기를 내려놓고 시현 앞에 엎드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생존자들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열심히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살피는 그들에게 시현은 조롱의 미소를 지었다.
“어지간하면 비전투원은 안 건드리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지금은 기분이 조금 안 좋네. 그래도 피로 얼룩진 복도를 청소하는 건 귀찮으니까 다시 한번 기회를 줄게.”
시현은 검을 뽑았다.
살벌하게 변한 눈빛에 생존자들은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았다.
시현이 한 걸음을 다가가면 나머지 인원이 한 걸음을 물러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결국 나설주가 나섰다.
“조건부로 항복한다.”
“네가 조건을 달 처지던가?”
“이 사람들은 죄가 없어. 여기 구원자들도 내가 억지로 끌고 온 것뿐이니까 양해를 좀 부탁한다. 그리고 나는…….”
“…….”
“은인인 이설아를 배신할 수 없어. 그러니까 부탁하마.”
나설주는 무기를 손에 들었다.
시현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원작에서 군주급 구원자로 성장하게 될 뛰어난 인재인 그는, 가능하다면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교단을 향한 나설주의 충심은 시현이 생각하던 것 이상이었다.
‘이거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나설주의 마음을 돌리지 못할 것 같네.’
사실 항복을 받아 주겠다는 것도 나설주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는데.
정작 본인만 쏙 빠져나가니 속이 쓰렸다.
그러나 장차 불온 분자가 될 수도 있는 나설주를 억지로 잡아 둘 수도 없는 노릇.
시현은 땅을 박찼다.
“으아아아아!”
나설주는 고함을 지르며 전력을 쏟아 냈다.
[크아아아아!]
나설주의 외침에 맞춰 안개로 만들어진 세 마리의 짐승이 일제히 나타나 시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공격 방향이 죄다 달라 대처하기 힘든 공격이다.
나설주를 교단의 에이스 중 하나로 만들어 준 기술이기도 했다.
그러나 열 두 방향에서 가해지는 히드라의 공격에서조차 무사했던 시현 아닌가.
고작 네 방향이라 생각하니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무엇보다 히드라 때와는 공격의 질이 다르다.
“이 정도라면…….”
시현은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검에 이것저것 덕지덕지 바를 필요도 없었다.
처형의 권능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촤악!
두 사람의 신형이 교차하고 피가 튀었다.
시현은 당연한 결과라는 듯 피가 묻은 검을 공중에 털었고, 나설주는 쓰러졌다.
당연히 나설주의 목 위에 존재해야 할 것은 먼 곳의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세, 세상에. 나설주 씨가 당했다고? 이게 대체…….”
“말도 안 돼!”
거스를 수 없는 강자인 나설주를 일격에 처리한 시현을 보며 생존자들은 절규했다.
그제야 나설주가 그런 반응을 보였던 이유를 알아차린 것이다.
멍하니 서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구원자 중 하나가 추가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나머지 둘은 시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어어!”
“이 개자식아!”
이길 수 있다는 확신보다는 나설주의 죽음에 눈이 뒤집힌 것 같았다.
가만히 있으면 살려 줬을 테지만,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놈들을 상대로 시현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두 번의 칼질에 추가로 두 개의 목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낸 시현이 고개를 들었을 때, 더 이상 목을 뻣뻣이 세우고 시현을 응시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이네 어쩌네 하며 유인원마냥 아우성을 치던 사람들도 행여 시선이 마주칠까 싶어 고개를 숙이거나 애써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전의는 바닥을 쳤으며,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겠다는 희망은 버린 지 오래였다.
시현은 그들에게 미리 가져온 밧줄을 던져 주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생존자들은 풀이 죽은 채 서로가 움직이지 못하게끔 포박했다.
“이제 남은 건 세 사람인데…….”
시현의 시선이 닿자 한껏 숨을 죽이고 있던 구원자 셋이 흠칫 몸을 떨었다.
일반 생존자와 달리 구원자 포로는 굉장히 귀찮은 존재다.
압도적인 힘 때문에 감금이나 포박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하며, 어떤 기상천외한 권능을 사용할지 모르니 그것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
그렇기에 보통의 경우, 구원자를 포로로 잡느니 그 자리에서 처형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한 경향을 알기에 세 명의 구원자들은 필사적으로 살 길을 모색했다.
“내과 진료실에 제단이 있어요! 거기 가서 제가 가진 토큰으로 속박의 면류관을 살게요!”
그리고 구원자 하나가 해답을 내놓았다.
속박의 면류관.
착용한 자의 축복을 봉인하며 스스로는 벗어 버릴 수도 없는, 누가 봐도 구원자의 포박에 사용하라고 만들어 놓았으리라 추측되는 아이템이다.
물론 아무에게나 면류관을 씌워 무방비 상태로 만드는 짓은 할 수 없다.
면류관의 효과가 발동하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직접 머리에 착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천지에 누가 스스로 힘을 봉하는 물건을 제 머리에 착용하겠는가.
그렇기에 사실상 면류관은 별 가치가 없는 것으로 낙인찍혀 구원자들의 뇌리에서 사라지다시피 한 물건이었다.
효용성을 알고 있는 참가자나 기억하고 있는 물건이지.
그런 물건을 떠올렸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어지간히 급했다는 반증이다.
그걸 착용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굴복의 표시였고.
아쉬울 게 없던 시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두 사람은?”
“어휴, 입 아프게 뭘 물어보고 그러십니까. 당연히 해야죠.”
“사실 제 무릎이 땅에 닿았던 순간부터 면류관을 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존심 따위는 내다 버린 지 오래였다.
두 사람은 제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기꺼이 면류관을 쓰고 포로가 될 것을 희망했다.
* * *
‘이제 슬슬 신호가 올 때가 된 거 같은데.’
박화영은 진땀을 흘렸다.
곁눈질로 배후를 확인했으나, 이설아는 긴박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젓고 있었다.
상황을 역전하기 위해 교단 내부로 잠입한 나설주로부터 아직 소식이 없다는 소리다.
‘나설주 이 자식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러다가…….’
그녀는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바람을 탄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녀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주, 죽을 뻔했네.”
아주 잠깐 한눈을 팔았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박화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바람을 이용해 지상으로부터 몸을 약 5미터가량 띄우고 있는 붉은 눈의 이나연이 보였다.
천살성을 이용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살기를 뿜어 대며 말이다.
“어째서 저 여자가 레벨 서포터를 사용하고 있는 거야? 그 망할 약쟁이들. 설마 귀찮다고 일을 대충 처리한 건가?”
명령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어디 구석에 짱박혀 게으름 부렸을 연구원들을 떠올린 박화영은 이를 갈았다.
“그보다 똑같이 레벨 서포터를 이용해 4레벨이 되었는데. 이 차이는 대체 뭐냐고…….”
레벨 서포터를 사용하기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강함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레벨 서포터를 사용하고 똑같이 4레벨이 되었는데, 차이가 확 벌어졌다.
빅화영의 권능은 그저 그런 수준으로 강해진 것에 반해, 이나연의 권능은 말 그대로 차원이 달라져 버렸다.
“진짜 더럽게 불공평하네.”
거대한 벽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권능의 위력에서 차이가 난다면 그 모자란 만큼은 개인의 실력으로 채우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만한 자신감이 있었다.
손에 든 검 한 자루에 평생을 바치지 않았던가.
그녀는 자신의 사브르를 믿었고, 그것을 다루는 자기 자신을 믿었다.
“이제 뭐 보여 줄 거는 없는 거야?”
마치 너 따위를 상대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듯 이나연이 늘어지게 하품하며 바닥에 내려섰다.
“아직 레벨 서포터의 효과가 끝나려면 15분은 더 남아 있는데……. 네가 너무 약해서 그런지 슬슬 질린다.”
이나연은 가차 없이 박화영을 조롱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인 박화영은 웃고 있었다.
‘방심했구나.’
강자 중에서도 특히 급격하게 강한 힘을 갖게 된 강자들이 자주 보이는 경향이다.
방심은 곧 패배를 부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나연이 권능을 이용해 계속해서 하늘을 떠다녔으면 손이 닿지 않는 그녀로서는 손조차 써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나연은 스스로 바닥에 내려왔다.
사브르가 이제는 이나연에게도 닿게 된 것이다.
박화영은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근육질의 다리로 강하게 땅을 박차며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일반인이었을 때도 빠르던 속도는 구원자의 신체 능력을 갖게 된 이후, 어지간한 사람은 눈으로 쫓는 것조차 어려운 경지가 되어 있었다.
‘들어갔다!’
박화영은 확신했다.
빠른 속도로 뻗어져 나간 사브르가 이나연의 목을 노리고 쭉쭉 나아갔다.
극도의 흥분 상태이기 때문일까.
세상의 흐름이 느려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곧 저 희고 가는 목에서 피분수가 쏟아질 것을 기대하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콰드드드득!
“어?”
굉음과 함께 박화영의 팔이 무언가에 튕겨져 나갔다.
그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튕겨져 나간 그녀의 팔이 부러지고 말았다.
“아아아악!”
부러진 팔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고통에 박화영은 비명을 질렀다.
제 몸처럼 애지중지하던 사브르도 놓쳐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지독한 고통에 몸을 피하기보다도 자신의 공격이 튕겨 나간 이유를 먼저 찾았다.
고통을 이기고 겨우 고개를 든 그녀는 이나연의 몸 주변에 작은 규모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이나연을 지킨 것이다.
“……오빠였으면 뚫고 들어왔을 텐데. 교단 최강이라더니 별 것도 아니네.”
그런 이나연의 주변으로 돌풍이 모여들었다.
“자, 잠깐…….”
박화영은 부러지지 않은 손으로 허겁지겁 사브르를 주워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평생을 함께 한 사브르는 저 폭풍 앞에서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미쳤지. 내가 어쩌자고 저런 여자랑 1:1을 하겠다고 나섰던 걸까. 아니, 쳐 죽여도 시원찮을 연구원 놈들이 레벨 서포터의 관리만 똑바로 했어도…….’
박화영은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리고 레벨 서포터를 개발하고 관리하는 연구원들을 저주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폭풍이 박화영을 덮쳤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