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크아아아아!]
히드라의 포효에 시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여간 덩치 좀 된다 하는 놈들은 왜 이리 소리를 질러 대는지 모르겠네. 귀마개를 장만하던가 해야지.”
들어주는 이 없는 투덜거림을 마친 시현은 본격적으로 히드라를 상대했다.
히드라는 단순 무식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 놈이었다.
열두 개의 머리가 동시에 달려들면 빈틈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 몇 개의 머리가 조를 짜서 순차적으로, 빈틈이 없는 연속 공격을 퍼부어 댔다.
방어에도, 회피에도 한계가 있는 상황.
그러나 시현은 포탈을 이용해 공간을 도약, 너무도 쉽게 히드라의 뒤를 잡았다.
사라진 시현을 찾지 못해 어리둥절해하는 히드라의 머리 하나를 목표로 삼은 시현은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온갖 기운을 휘감은 검은 단단한 히드라의 비늘을 너무나도 쉽게 파고들었다.
[쿠오아아악!]
공격을 당한 히드라의 머리가 비명을 지르고, 다른 머리들은 일제히 시현이 있는 장소를 노려봤다.
그러나 시현의 검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촤악!
엄청난 양의 피가 흐르며 히드라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던 핏빛 칼날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대량의 피를 마시는데 성공한 핏빛 칼날은 굉장히 흡족해 보였다.
“……쉽지 않네.”
시현은 혀를 찼다.
검의 길이에 비해 히드라의 목이 너무 두꺼웠다.
최대한 깊게 찔러 넣고 베었는데도 목을 베어내기는커녕 히드라의 뼈조차 구경하지 못했다.
그나마 상처 부위를 얼음이 뒤덮어 재생을 막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다.
콰아아아!
시현을 향해 물줄기가 쏘아졌다.
황급히 몸을 던져 공격을 회피하면서도 시현은 히드라의 공략 방법에 대해 연구했다.
‘공격력이 부족한 건 아니야. 부족한 건 무기의 길이인데…….’
시현이 가지고 있는 무기라고 해 봤자 핏빛 칼날과 검은 가시가 전부.
이걸로는 히드라의 목을 베어 낼 수 없다.
아니, 설사 이 두 개가 아니라 해도 세상에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날붙이 중 히드라의 목을 단번에 베어 버릴 만큼 길고 견고한 무기가 있을 리가 없다.
“어쩔 수 없나…….”
시현은 침음을 삼켰다.
가능한 모든 수가 막혔다.
그렇다면 아끼고 아껴 두었던 마지막 비장의 한 수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 욕심 때문일 것이다.
“에이잇!”
시현은 자신의 뺨을 때렸다.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기로 했잖아.”
스스로를 달랜 시현은 블랙마켓을 열었다.
“망할 도마뱀! 기왕 이렇게 된 거 핵과금러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려 주마.”
<승리의 영광 구매 완료.>
<참가자 윤시현의 소지 금액 : 1,884,110,000.>
“제길…… 드디어 가장 앞의 숫자가 1이 되어 버렸네.”
깎여나간 금액만큼이나 심장이 도려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향해 이를 들이밀며 달려드는 히드라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며, 시현은 막 눈앞에 생겨난 백색의 빛을 손에 넣었다.
<승리의 영광.>
구원자의 승리를 염원하는 천의 기운이 담긴 빛을 무기에 담는다.
새롭게 얻은 힘에 대한 설명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짧고 간략했다.
그러나 새로운 힘에 대해 속속들이 꿰고 있는 시현에게는 오히려 눈을 어지럽히는 귀찮은 문구가 없어 다행일 뿐이었다.
시현은 핏빛 칼날에 빛을 담았다.
요사스러운 빛깔의 검신을 찬란한 백색의 빛이 뒤덮는 광경은 신성하기까지 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빛은 아쉽게도 처형의 권능을 담은 냉기와 섞이지 않았다.
다소 아쉽기는 했지만 예상하던 결과이기에 크게 의의를 두지 않았다.
[캬아아아아!]
그러는 사이 히드라의 머리가 지척까지 도달해 있었다.
시현은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던 검을 머리 위로 쳐올렸다.
백색의 빛이 허공에 커다란 반월을 그렸다.
피를 머금은 백색의 칼날은 놀랍게도 5미터 가량으로 늘어나 있었다.
[…….]
히드라는 시현의 코앞에서 입을 쩍 벌린 채 움직임을 멈췄다.
그런 히드라의 턱부터 코와 미간을 지나는 하나의 실선이 생겨났다.
쩌저적.
실선을 따라 히드라의 머리가 양쪽으로 나뉘었다.
절단면에 달라붙은 서리로 인해 피가 흐르는 일은 없었다.
“일단 하나……라고 봐도 되는 건가?”
일단 머리가 양분되었으니 더 이상 이 머리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머리를 뿌리 부근에서 잘라낸 게 아닌지라 불안한 느낌이 남았다.
[크아아아아!]
한 차례 포효를 한 머리 하나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러더니 양분되어 죽은 히드라의 목을 물고 힘을 주기 시작했다.
죽은 부분을 떼어내어 재생시키려는 것이다.
“역시 불안한 느낌은 틀리지가 않네.”
다른 머리들은 일제히 시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누가 짐승 아니랄까 봐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히드라에게 조소를 남긴 시현은 공간을 도약했다.
그가 나타난 위치는 막 죽은 히드라의 머리를 몸에서 떼어 내는데 성공한 머리의 뒷부분이었다.
시현은 검을 휘둘러 히드라의 머리를 잘라 버렸다.
그와 동시에 막 재생을 시작한 머리까지도.
동일한 사고가 발생하지 않게끔 이번에는 아예 뿌리 부분을 잘라 냈다.
절단면에는 당연하다는 듯 냉기와 서리가 달라붙어 재생을 방해했다.
그렇게 잘려 나간 두 개의 머리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재생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열 개인가? 많기도 하지.”
시현은 자신에게 향하는 열 쌍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 * *
이재인.
해가 바뀌며 스무 살 성인이 된 그는 교단에 소속된 구원자다.
그는 자신의 권능에 늘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박화영처럼 전투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산에 특화된 것도 아니다.
어디서나 각광받는 회복 계열 권능도 아니며, 이설아나 이한울처럼 특정 분야에서 반드시 필요한 권능도 아니다.
그나마 정찰 쪽에서 귀하게 사용될 수 있는 권능이었지만, 그마저도 정찰계의 스페셜리스트라 할 수 있는 천리안 사용자 때문에 그는 늘 이렇다 할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그는 누구나 다 필요로 하는 영웅적인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그렇게 살기를 수개월.
이재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정유환이 죽었어.”
정유환.
사실상 다른 정찰 계열 구원자들을 장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기성 짙은 권능을 가진 구원자.
교단에 모여드는 모든 정보의 8할 이상을 담당하고 있던 인물 아닌가.
그만큼 교단의 리더 이한울이 아끼던 인물이기도 했고.
그런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이재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소식을 가져온 인물이 이한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재인이 네가 정보 수집 및 정찰을 담당해 줬으면 좋겠어. 정유환만큼은 아니지만 네 권능도 그쪽 방면으론 스페셜리스트니까.”
고민할 것도 없었다.
“맡겨만 주세요!”
날아오를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만에 하나라도 ‘역시 이재인보다는 정유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온갖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재인, 윤시현을 몰래 미행해 주세요. 저 인간이 앞으로 어떤 판단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빠뜨리지 말고 자료로 만들어 보고해 주세요. 가능하시겠어요?”
레벨 서포터를 주사하고 오랜 시간 권능을 사용한 덕에 상당히 지쳐 있는 이설아가 다른 사람을 통해 전달한 것도 아니고 직접 와서 내린 명령.
그만큼 중요한 사항이라는 뜻이다.
“알겠습니다.”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기회다.
그리고 멀리서 망원경을 사용해 시현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호텔의 생존자들은 호텔을 버리고 대피했어. 교단이 그들을 쫓지 못하게 하기 위해 리더인 윤시현이 남아 시간을 끌고 있는 거 같은데…….’
제 아무리 윤시현이라 한들 대형 악마가 둘이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교전을 포기하고 호텔의 피난민들이 있는 장소로 이동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가장 문제 되는 것은 공간을 뛰어넘는 권능이지만, 윤시현이 수도권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어디로 이동하든 내 권능으로 추적할 수 있어.’
그는 자신의 권능인 추적 벌레를 사용했다.
손끝에서 녹색의 빛으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벌레는 하늘을 날아 대형 악마들과 교전하고 있는 시현의 등 뒤에 살포시 달라붙었다.
이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는 마음 편하게 시현의 전투를 감상했다.
“그나저나 저 인간도 어지간히 괴물이네. 지금까지는 이한울이 가장 괴물이라 생각했는데, 윤시현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 있어.”
세상 그 어떤 존재가 권능을 이용한 열기로 대형 악마의 날개 깃털을 죄다 녹여 버린단 말인가.
그 강인함에는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러나 머지않았다.
제 아무리 시현이라도 대형 악마 둘이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버티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재인이 시현을 따라 이동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시현은 공간 이동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끈질기게 빙조 아르베니아의 등에 매달린 채 교전으로 발생하는 충격을 버티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거지?”
다양한 의문이 생겨났다.
“설마 공간을 도약할 정신력이 남아 있지 않은 건가?”
그는 신이 나서 망원경에 눈을 붙였다.
만약 자신의 추론이 맞는다면 시현은 이곳에서 목숨을 잃을 것이고, 그 소식을 가지고 돌아가면 이설아나 이한울은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능력을 높이 살 것이다.
그렇게 이재인은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망상을 뛰어넘었다.
[끼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빙조 아르베니아가 쓰러지고, 히드라는 마무리 일격을 넣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시현이 움직였다.
온 힘을 때려 박은 일격.
그 일격에 한계에 봉착해 있던 아르베니아의 숨이 끊어졌다.
그리고 시현은 푸른색의 보석을 손에 넣었다.
“……어?”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이재인은 식은땀을 흘렸다.
대형 악마.
거스를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들의 싸움에 끼인 시현은 뭔가를 해 보기도 전에 숨이 끊어졌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끝까지 살아남더니 히드라로부터 마지막 일격을 빼앗았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원자인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자, 잠깐. 대형 악마의 경험치를 혼자 독식했어?!”
그제야 이재인은 깨달았다.
시현이 빠르게 대피하지 않고 끈질기게 아르베니아의 등에 매달려 있던 이유를 말이다.
“그게 지금 이 순간만을 노리고 있던 거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진짜 괴물 같은 놈…….”
하지만 그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그래도 아르베니아를 토벌했으니 이제는 진짜 도망가겠지.”
아무리 아르베니아와 싸우느라 히드라의 체력이 다소 소진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히드라는 건재하다.
보통이라면 아르베니아를 토벌하고 얻은 막대한 경험치에 만족하고 다음을 노렸을 것이다.
그러나 시현은 그 보통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싸, 싸운다고? 대형 악마랑 1:1로?!”
겁도 없이 히드라와 교전을 시작한 시현을 보며 그는 기함했다.
악마는 강자이며 포식자다.
반대로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던 인류는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다.
얼마 전 3레벨에 도달한 이재인이지만 여전히 중형 악마는 무서운 존재였으며, 소형 악마도 모이면 두렵다.
그런데 저 인간은 중형도 아니고 대형과 일기토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비상식적이고 몰상식적인 행위다.
망원경을 들고 있는 손이 떨렸다.
“죽겠지? 분명 죽을 거야.”
그는 확신을 담아 중얼거렸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잘…… 싸우네?”
푸른 불꽃을 두른 검을 휘두르는 시현에게 히드라가 압도되고 있었다.
시현에게 심어둔 벌레 덕에 그는 전장의 상황을 조금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냉기…… 검에서 냉기가 흘러나오고 있어! 내 벌레가 기능의 3할 정도를 잃을 정도로 지독한 냉기!’
그 때문에 히드라는 좀처럼 제 실력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히드라의 흉포함이나 힘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다.
무려 열두 개의 머리.
그것이 동시에 시현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인터넷 방송에서 그런 걸 본 적이 있었지.’
한 명의 프로 복서와 일반인 세 명의 대결.
어느 정도 재미있는 승부가 될 것이라 생각한 이재인의 예상과 달리, 프로 복서는 이렇다 할 저항도 못 해 보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그를 통해 이재인은 하나 깨달은 게 있었다.
아무리 강자라 한들 여러 개의 손을 감당해 내지는 못한다고.
지금이 딱 그랬다.
시현은 강하다.
그가 가진 능력이나 힘을 시기해 깎아내리려 해도 그가 구원자 중 압도적인 최강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상대는 대형 악마다.
심지어 열두 개의 손을 가진 거나 마찬가지이며, 그 손 하나하나가 무지막지한 힘과 범위를 가진 즉사급의 필살기와 같았다.
장담하건데 이재인은 저 상황에서 단 10초도 버티지 못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시현은 달랐다.
쾅! 콰앙!
상당히 거리가 있음에도 검과 히드라의 머리, 이빨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세상 누가 저 소리를 듣고 검을 휘두르는 소리라 믿겠는가.
히드라를 상대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는 시현이었지만, 하나의 검으로 열두 개나 되는 공격을 전부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때문에 공간을 도약해 히드라의 사각으로 이동, 치명적인 일격을 꽂아 넣는 식으로 전투를 벌였다.
더군다나 말도 안 되는 길이를 자랑하는 빛의 검을 꺼내 든 이후 상황은 시현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두 개의 머리가 떨어져 나가 재생하지 못하게 된 것을 확인한 이재인의 쩍 벌어진 입에서 침이 흘렀다.
“미쳤다, 미쳤어.”
어느덧 이재인은 자신의 역할도 잊고 시현의 전투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히드라는 계속해서 다양한 속성을 가진 브레스를 이용해 시현을 압박했다.
그러나 시현은 침착하게 공간을 도약, 히드라의 머리를 하나씩 차근차근 잘라 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히드라의 머리는 네 개밖에 남지 않았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