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시현의 지시하에 호텔의 일반 전투원들과 생존자들이 먼저 피난길에 올랐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도시 곳곳에 득실거리는 악마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구원자들이 함께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특별하다.
대적할 수 없는 절대적인 포식자의 등장에 일대를 주름잡던 소형, 중형 악마들은 어디론가 숨어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생존자들은 별 어려움 없이 호텔을 벗어날 수 있었다.
[리더, 헬기는 어떻게 할까요?]
쌍둥이와 함께 피난민들의 선두를 담당하는 진우혁이 무전을 통해 질문을 해 왔다.
“음…….”
대답을 미룬 시현은 잠시 하늘 위로 시선을 옮겼다.
거대한 악마 빙조 아르베니아.
놈이 있는 한 함부로 하늘에 무언가를 띄울 수는 없는 상황이다.
시현은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네. 그러면 병원에서 뵙겠습니다.]
무전을 종료한 시현은 곧장 1층으로 향했다.
“으아아악!”
“상태가 총에 맞았습니다! 회복될 때까지 우측에 지원해 주세요!”
“그럴 여유 없어! 어떻게든 버텨!”
전장은 그야말로 혼란의 극치였다.
교단 측 구원자들은 온갖 수단을 이용해 호텔 측 구원자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바로 뒤에서 히드라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때려 부수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단이 호텔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피해를 입는 것은 불가피하게 교단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교단이 호텔의 구원자들을 잡고 늘어지는 이유는 죽어도 부활하는 교단과 달리, 어디까지나 회복에 의해 버티고 있는 호텔의 생존자들은 히드라의 앞발에 짓눌리는 순간 생을 마감하기 때문이다.
“징그러운 놈들.”
이를 갈며 전장에 합류한 시현은 백색 화염을 전방으로 날렸다.
오랜 전투로 외피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
교단의 구원자들은 살이 녹아내리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허물어졌다.
그래 봤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몸을 일으킬 테지만.
“시현 씨! 뭐가 어떻게 된 건가요?”
시현의 참전 덕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민서라가 다가와 질문했다.
최전방에서 조금도 여유를 가질 수 없는 박화영을 상대로 고전하느라 상황이 어떤지 전해 듣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런 와중에 생존자들이 일제히 뒤로 빠지고 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퇴각합니다.”
“퇴각이요?”
민서라는 크게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뒤로 달아날 곳이라고는 호텔 건물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구원자들이 빠지는 순간, 교단의 병력과 대형 악마 히드라는 호텔 건물에 도달하게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호텔을 지킬 생각으로 있던 민서라에게는 몹시 당황스러운 지시사항이었다.
그러나 이미 결단을 내린 시현은 입장을 번복하지 않았다.
“여기 있어 봐야 개죽음을 당할 뿐이에요. 제가 교단 구원자들의 발목을 잡고 있을 테니, 그동안 호텔 뒷문을 이용해 빠르게 후퇴하도록 하세요. 퇴로는 진우혁 씨와 쌍둥이, 그리고 나연이가 뚫어 뒀을 겁니다.”
“…….”
민서라는 가만히 선 채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현은 알고 있었다.
민서라는 감성적이지만 결코 어리석은 인간이 아니다.
굳이 시간을 들여 설득하지 않아도 자신의 뜻을 알고 따라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현은 다른 조장들에게도 퇴각 명령을 내렸다.
“와…… 그래도 호텔을 지키기 위해 저 괴물과 맞서 싸우라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천만다행이다.”
상당히 피로한 표정의 강소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며.
“야, 들었지? 튀어!”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기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LT마트의 구원자들을 이끌고 전장에서 이탈했다.
“호석이 너는 헬기를 부탁할게. 아르베니아를 자극하지 않도록 저공비행을 유지하고, 만약의 사태에는 주저하지 말고 헬기를 버려.”
“네! 알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신호석이 이탈하고, 비통한 표정의 민서라도 남아 있는 모든 구원자들을 이끌고 호텔의 뒷문으로 향했다.
이제 남은 건 시현뿐이다.
그새 히드라는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백색화염을 사용해 막 부활을 마친 교단의 구원자들에게 다시 한번 죽음을 선사한 시현이 전장을 이탈하려던 찰나였다.
“어딜 가시려고?”
박화영이 달라붙었다.
자신의 배후에서 히드라가 온갖 속성의 숨결을 토해내며 접근하고 있음에도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승자의 여유가 담긴 미소다.
박화영의 사브르가 시현의 급소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3레벨 구원자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예리하다.
시현은 침착하게 검을 들어 공격을 받아 냈다.
“……!”
시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두 번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 성공했지만, 세 번째 공격이 물 흐르듯 파고들어 시현의 옆구리를 가른 것이다.
물론 박화영의 공격력으로 시현의 외피를 어떻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시현은 4레벨 구원자.
더군다나 아르하의 권능 덕에 5레벨에 한없이 가까운 힘을 가지고 있다.
반면, 박화영은 시현보다 한 단계 낮은 3레벨 구원자가 아닌가.
동수를 이루기만 해도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인데, 오히려 한 수 밀리기까지 했다.
“……이러니 민서라 씨나 한기훈 씨가 애를 먹지.”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하건만.
시현은 애써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였다.
아무리 신체 능력이 높다한들 아마추어가 기술로 프로의 위에 서기란 어려운 법이니까.
“레벨이 높으면 뭐 해. 이렇게 실속이 없는데.”
그녀는 대놓고 시현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시현이 분해 날뛰는 모습이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시현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네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뭐?”
“이건 스포츠가 아니거든.”
시현은 그대로 검을 내리찍었다.
예의 빠른 몸놀림으로 공격을 회피하려던 박화영은 경악하고 말았다.
어느새 그녀의 주위로 백색의 화염이 이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로 움직이든 화염에 적중당해 몸이 녹아내리고 말 것이다.
결국 회피는 불가능.
방어를 강요당한 박화영은 사브르를 머리 위로 들었다.
콰앙!
“억!”
참으려 했지만, 소리가 목구멍을 뚫고 튀어나왔다.
검에 권능까지 담고 있건만 말도 안 되는 충격이었다.
시현이 가진 적색의 검에는 잿빛의 불꽃이 휘감겨 있었다.
쩌저적.
섬뜩한 소리가 났다.
“설마…….”
당황한 박화영의 눈에 보이는 건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균열이 발생한 사브르였다.
심지어 균열은 실시간으로 커지고 있었다.
“이런 미친!”
“이게 레벨 차이다. 확실히 기억해 둬.”
시현은 검을 잡은 두 손에 추가로 힘을 가했다.
결국 박화영의 사브르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사브르를 깨부수고도 힘을 잃지 않은 핏빛 칼날은 쭉쭉 뻗어 나가 박화영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다른 구원자들과 싸우며 한계에 달해 있던 외피도 일격으로 깨져 나갔다.
“아아아악!”
누군가에게 1:1로 져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박화영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그럼에도 핏빛 칼날은 멈추지 않았다.
피부, 근육, 뼈, 내장.
무엇 하나 핏빛 칼날의 진격을 멈추지 못했다.
그렇게 박화영은 대각선으로 두 동강 나고 말았다.
시현은 박화영의 시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전에 한 것처럼 시신을 이설아의 권능이 닿지 않는 곳까지 옮겨 박화영의 부활을 막을 심산이었다.
단신으로 세 명의 구원자와 동수를 이루는 괴물이다.
지금 죽여 없애야만 했다.
그러나 뜻밖의 방해가 들어왔다.
콰아아아!
머리가 뜨끈해지는 열기에 시현은 황급히 뒤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코앞에서 목표 달성에 실패한 시현은 욕설을 내뱉으며 자신을 공격한 놈에게 눈을 부라렸다.
[크르르르르…….]
어느새 호텔의 바로 앞까지 도달한 히드라의 머리 중 하나가 시현을 내려다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히드라가 지나온 길에는 짓이겨진 시체가 가득했다.
‘박화영을 끝장내지 못한 게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나.’
조금 무리를 하면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교단의 구원자들이 박화영의 시신 근처에 도달해 있는 상황이었다.
자칫 발목이 잡힌다면 진짜로 이탈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시현은 권능을 이용해 공간을 도약했다.
목적지는 하늘 위.
빙조 아르베니아의 등 위였다.
“흐어억!”
아르베니아의 등 위에 발을 디딘 시현은 비명을 질렀다.
신발을 신고 있음에도 지독한 한기가 느껴졌다.
심지어 시현은 착용자에게 늘 적정 온도를 제공해 주는 외투를 걸치고 있지 않은가.
지독한 겨울을 겪으면서도 시현은 단 한 번도 ‘춥다’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발을 타고 전신으로 퍼진 한기에 으스스 몸이 떨렸다.
“이러다 동상으로 발가락 죄다 잘라 내게 생겼네.”
조금이라도 덜 추운 장소를 찾기 위해 시현은 아르베니아의 등 위를 뛰어다녔다.
그런 상황에서 아르베니아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코끼리의 등 위에 개미 한 마리가 올라간 상황이었다.
코끼리는 그런 사소한 것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에 온 정신이 팔려 있다면 더욱 그러한 경향을 보이기 마련이다.
[캬아아아!]
히드라는 결국 신혈이 발라져 있는 호텔의 벽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소중한 보물을 끌어안듯 히드라는 온 몸을 던졌다.
대형 악마의 체중이 실리자 버티지 못한 호텔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옥상에 있던 온실도.
많은 재화를 들여 만든 제작실도.
생존자들의 삶이 묻어나오는 객실도.
모두가 모여 술을 마시거나 이나연이 공연을 벌이던 메인 홀도.
차를 좋아하는 신호석의 보물이 가득한 주차장도.
민서라가 열과 성을 다해 키운 수호나무도.
그동안 생존자들과 함께 쌓아 왔던 모든 것이 호텔 건물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
그것을 지켜보던 시현도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 했다.
피난길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생존자들도 필시 같은 마음일 것이다.
“지금쯤 신이 났겠지.”
적진 한복판에서 두 팔을 번쩍 들고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을 이설아를 생각하니 배알이 뒤틀리는 듯했다.
[끼아아악!]
한 차례 울부짖은 아르베니아는 고도를 높였다.
머리 위에 아르베니아가 날고 있음에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 히드라.
반면, 신혈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미끼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눈치만 보다가 결국 자리를 피하는 아르베니아.
두 대형 악마 사이에는 그만큼 격의 차이가 있다는 소리다.
“그렇게는 안 되지.”
아르베니아를 내려다보는 시현의 눈초리는 아르베니아의 체온만큼이나 싸늘했다.
이대로라면 아르베니아는 자신의 둥지로 돌아가고 히드라는 호텔을 초토화시킨 후 지하로 되돌아갈 것이다.
교단은 승리를 자축하며 본진으로 귀환할 테고.
그렇게 되면 지금 교단의 본진으로 향하고 있는 호텔의 생존자들이 위험해진다.
그걸 지켜보고 있을 시현이 아니었다.
“네가 활약을 좀 해 줘야겠다.”
시현은 손끝에 백색의 불꽃을 만들어 냈다.
시현의 머리 위에도 불꽃이 피어났다.
그 개수는 삽시간에 불어나 주변 온도를 확 끌어올렸다.
[끼아악?]
등짝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아르베니아는 크게 당황한 듯 보였다.
아르베니아의 약점은 불.
머리 위에 떠 있는 수십, 수백 개의 화염을 피하기 위해 아르베니아는 고도를 낮췄다.
그러나 시현의 주변을 맴도는 화염의 특성 상, 아무리 고도를 낮춰도 달아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현은 백색의 화염을 아르베니아의 등짝에 퍼붓지 않았다.
그저 권능을 이용해 화염의 개수를 꾸준히 늘릴 뿐이었다.
* * *
“이겼어. 내가…… 내가 윤시현을 이겼어!”
이설아는 주먹을 꽉 말아 쥐고는 승리의 기쁨을 표출했다.
설마 대형 악마가 두 마리나 나타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어찌되었건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호텔의 생존자들을 몰살시키고 윤시현의 목까지 쳤다면 완벽했겠지만, 일단 호텔을 붕괴시킨 것만 해도 충분히 값진 승리였다.
지금부터 호텔은 물자 없이 서울을 떠돌게 될 것이고, 정착지가 없는 그들은 꾸준히 악마로부터 생존의 위협을 받거나 식량 및 식수의 부족으로 인해 허덕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시현을 향한 그들의 신뢰는 나날이 감소할 것이다.
하나 둘 이탈자가 생겨나고 자신의 세력을 지키지 못한 시현의 랭킹이 뚝 떨어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설사 재기를 노린다 해도 엄청난 시일과 노력을 요구할 터.
사실상 시현이 랭커로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빠, 내가 해냈어!”
당장이라도 이곳에 없는 이한울에게 자신이 해낸 성과를 자랑하고 싶었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그녀가 소매로 눈물방울을 닦아내는 순간.
[끼아아아악!]
아르베니아가 포효했다.
툭.
하늘을 올려다 본 이설아의 눈동자 위에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어?”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