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오늘도 교단은 집중사격으로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처음에는 이를 어쩌나 당황해하며 시현만 찾던 생존자들도 이제는 패턴화가 이루어진 것인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침착하게 대응사격을 실시했다.
그러나 총력전인 만큼 오늘은 뭔가가 달랐다.
툭, 데구르르.
“음?”
가장 선두에서 방아쇠를 당기던 용감한 생존자는 무언가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더니 자신의 발치에 떨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이게 뭘까 싶어 내려다본 생존자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여태까지 교단에서 사용하지 않던 무기인 수류탄이었다.
안전장치는 모두 제거되어 있었다.
반응할 틈도 없었다.
콰앙!
폭발과 함께 생존자의 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허공을 날았다.
공포심을 자극하는 화려한 시각 효과에 얼어붙는 사람이 다소 등장했다.
“뭐 하고 있어? 뒤로 옮겨!”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전방에 있던 이나연이 가장 먼저 조치를 취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치명상이기는 하지만 아직 숨은 붙어 있다.
그리고 숨이 붙어 있다면 시현의 권능을 이용해 치료를 시도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상처가 너무 깊었다.
권능이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자는 빠르게 악화되었고, 이내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아…….”
이나연은 울상이 되었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동안 한솥밥 먹으며 같이 생활해 온 식구가 아닌가.
그들이 죽어 나가는 것은 언제 봐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나연아! 뒤 조심해!”
다른 생존자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돌아보니 또 다시 수류탄이 날아오고 있었다.
“이익!”
이나연은 다소 무리해 총알이 쏟아지는 전장 한가운데로 달렸다.
그리고 날아드는 수류탄을 공중에서 캐치, 전속구로 돌려주었다.
외피가 상당히 깎여 나가기는 했지만, 그 덕에 적진 한복판에 수류탄을 터뜨릴 수 있었다.
1차 피해로 많은 전투원들이 사망했고, 2차 피해로 건물의 벽이 무너지며 다수의 압사자가 생겨났다.
그러나 죽으면 끝인 호텔과 달리 그들은 부활했다.
“진짜 더럽게 치사하네!”
차오르는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을 차던 이나연을 향해 누군가가 달려왔다.
박화영이다.
“오늘은 상대를 조금 다르게 해서 싸워 보자고.”
“……오히려 좋아.”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검을 뽑아 드는 이나연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그런 박화영을 필두로 교단의 구원자, 생존자 할 것 없이 모두 앞뒤 가리지 않고 돌격을 감행했다.
“미친 건가?”
상대가 총기의 무서움을 모르는 중세 시대 기사마냥 정신 놓고 달려드니 호텔의 생존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호텔의 생존자들은 연발로 총을 난사했다.
엄폐를 포기한 적들은 이렇다 할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벌집이 되어 숨이 끊어졌다.
그러나 이설아의 권능이 그들을 일으켰다.
일어선 그들은 몇 걸음을 더 내딛다가 죽고, 다시 일어나 몇 걸음을 내딛다 죽는 것을 반복했다.
그렇게 천천히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물론 교단이라 해서 중공군마냥 무작정 목숨을 갈아 넣는 것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수류탄이나 화염병을 투척하는 등, 그들은 전쟁을 위해 비축해 두었던 물자를 모조리 쏟아 내고 있었다.
저 멀리 빌딩의 옥상에서는 이전에 선보인 포격의 진이 여럿 준비되고 있었다.
“아군이고 적군이고 같이 날려 버리겠다는 건가?”
시현의 미소가 뒤틀렸다.
적과 아군을 동시에 쓸어버리다니.
일반적인 전쟁에서는 결코 사용할 수 없는 파격적인 수단이다.
설사 전쟁에서 승리한다 해도 아군으로부터의 신뢰를 잃을 것이며, 지휘관은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경우가 달랐다.
어차피 교단의 생존자들은 죽어도 다시 되살아날 것 아닌가.
영원이 숨이 끊어지는 것은 호텔의 생존자들뿐이다.
긴박한 상황임에도 시현은 침착하려 애를 썼다.
당황해서 발을 동동 굴러봤자 해결책이 나오지는 않는다.
‘가서 해결하고 올까?’
포탈을 이용하면 빌딩의 옥상으로 가, 포격을 준비하고 있는 구원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복귀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이 정도로 다양한 전략을 준비해 온 이설아가 똑같은 방법으로 두 번이나 당해 줄 리가 없다는 게 시현의 생각이었다.
‘뭔가 대책을 세워 뒀을 거야. 어쩌면 함정을 파 놓고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지.’
그렇다면 직접 가는 건 위험하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해서 전장을 둘러보던 시현의 눈에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이고 있는 이나연과 박화영이 보였다.
무려 민서라, 신호석, 그리고 한기훈.
이 세 사람을 상대로 호각을 이뤘던 박화영이다.
이전 대련에서 민서라와 이나연이 동수를 이뤘음을 감안해 보면, 일방적으로 이나연이 밀리고 있는 양상이어야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두 사람은 동수를 이루고 있었다.
전에 봤을 때보다 박화영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했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지 박화영의 표정에 불만이 가득하다.
실력의 차이를 특성으로 커버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두면 세 명의 구원자를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나. 지금은 나연이가 더 필요하니까.”
시현은 이전에 박화영을 상대한 세 사람에게 곧장 연락을 취했다.
전장에서 구원자들을 상대로 활약하고 있던 민서라, 한기훈, 그리고 신호석은 시현의 연락을 받고 두 사람이 접전을 벌이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연아, 앞으로는 우리가 맡을게.”
“됐어. 저 정도는 나 혼자서도 가능해. 시간은 조금 오래 걸리겠지만…….”
민서라의 요청에도 이나연은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민서라는 두 눈동자를 피처럼 붉게 물들이고 있는 이나연을 단번에 각성시킬 마법의 주문을 알고 있었다.
비단 민서라 뿐만 아니라 호텔의 소속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그 한마디를 말이다.
“시현 씨가 널 찾고 있어.”
“그럼 갈게!”
언제 무차별적으로 살기를 흩뿌렸냐는 듯, 순한 양이 된 이나연은 시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딜 가려고! 아직 안 끝났어!”
자신보다 한참 하수를 상대로 고작 동수를 이뤘다는 사실에 꽤나 자존심이 상한 박화영이 이나연의 뒤를 쫓으려 했다.
그러나 민서라가 앞을 가로막았다.
“미안한데 나연이는 좀 바빠.”
“진짜 별 것도 아닌 것들이…….”
이를 갈던 박화영이 칼부림을 시작했다.
“망할. 오늘도 무지하게 다치겠네.”
“그러니까요.”
한숨을 내쉰 두 남자 역시 본격적으로 참전했다.
그들을 뒤로한 이나연은 시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빠! 저를 찾으셨다고요?”
“왔어? 미안한데 잡담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을 거 같다.”
시간이 굉장히 촉박했다.
이미 빌딩 옥상에 있는 포격의 진 중 몇 개는 완성 직전이었다.
시현은 이나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파악하고 있던 이나연은 시현의 손을 잡았다.
‘뭘 지우지?’
현재 시현이 모방하고 있는 권능은 포탈 생성, 일방통행, 백색 화염, 천리안, 치료.
이렇게 다섯 가지다.
치료의 경우, 배치 변경이 불가능하므로 나머지 네 개 중 하나를 없애야만 폭풍을 모방할 수 있다.
현재 가지고 있는 권능 대부분이 사망자의 것을 빼앗아 온 것인지라 한 번 지우면 다시 얻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
때문에 망설여졌다.
“시현 씨! 교단 측에서 계속 박격포를 쏴 대는 통에 헬기를 띄울 수가 없는…… 으햐악!”
배후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지근거리에서 발생한 폭발에 놀라 머리를 감싼 채 주저앉아 있는 이은아가 보인다.
어제 저녁 호텔에 물자를 지원할 겸, 현재 인천연합이 처한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헬기에 타고 합류한 이은아가 아직 복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깜빡 잊고 있었네.”
이은아가 이곳에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시현은 일방통행을 지우고 폭풍을 모방했다.
그리고 정면을 향해 손을 뻗는다.
“하나로 충분하겠어요?”
“부족해.”
“알겠어요.”
이나연 역시 시현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멀리 보이는 빌딩의 옥상을 향해 손을 뻗는다.
상당히 오랜 시간 준비해야 하는 포격의 진과 달리 폭풍은 원하는 자리에서, 원하는 순간에 즉시 사용하는 게 가능하다.
괜히 사기라 불리는 게 아니다.
콰아아아!
두 줄기의 폭풍이 전장의 머리 위를 갈랐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뻗어나간 폭풍은 빌딩의 상층부를 송두리째 날려 버렸다.
그 위에 서 있던 구원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뭐가 되었건 정상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죽었을 수도 있겠는데.”
빌딩과 전장까지의 거리가 제법 멀다.
그렇다는 건 이설아가 사용 중인 시간 역행의 범위 바깥이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소리다.
어쩌면 다수의 구원자들을 리타이어시켰을 수도 있다는 행복 회로를 돌리며, 시현은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난장판이네.”
말 그대로의 상황이었다.
진형이고 뭐고, 그런 건 무너진지 오래였다.
적과 아군이 한 데 뒤섞여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지? 진짜 여기서 지들이 죽건 우리가 죽건 끝장을 볼 생각인가?”
“왜 그렇게 생각해요?”
“너무 깊이 들어왔잖아. 여기까지 왔으면 이전처럼 타임 리미트가 되었을 때 빠지는 게 불가능해.”
이설아가 광범위하게 시간 역행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세 시간.
지금이야 호텔 쪽에서 즉사의 일격을 회피하지 못한 사상자가 하나 둘 나오는 정도라지만, 세 시간이 지나고 나면 교단 측에 발생하는 사상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교단은 언제든 몸을 뺄 수 있게 적당한 선에서 진격을 멈췄다.
그런데 오늘은 아주 끝장을 보자며 달려들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이설아도 알 거야. 고작 세 시간으로 호텔의 수비를 뚫을 수는 없을 거라고. 그런데 대체 왜…….”
미간을 찌푸린 채 전장을 넓게 살피던 시현의 눈에 한 여성의 모습이 포착됐다.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젊은 여성.
족히 두 자릿수는 될 법한 구원자들에게 호위를 받고 있는 구원자.
이설아다.
“찾았다.”
교단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이설아의 등장에 시현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드디어 이 지독하고 끔찍한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희열을 느낀 것이다.
제 아무리 호위의 수가 많다 한들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각오한다면, 이설아 한 명을 죽이고 빠지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다.
그 순간, 이설아가 고개를 들었다.
우연일까.
허공에서 두 남녀의 눈이 마주쳤다.
이설아는 사납게 시현을 노려봤다.
당장에라도 공간을 도약하고 싶었으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폭풍을 지우고 일방통행을 모방할 필요가 있었다.
“이은아 씨, 일방통행의 모방을 부탁드립니다.”
“아, 네.”
전에도 한 번 권능을 제공한 적이 있던 이은아는 당황하지 않고 시현이 내민 손을 잡았다.
이은아가 시현의 곁으로 다가와 손을 잡기까지 걸린 그 짧은 시간.
이설아는 이미 다음 행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가 신호를 주자 주변에 있던 호위들이 일제히 활을 꺼내 들었다.
시위에 건 활들은 하나같이 특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는데, 날카로운 화살촉이 달려 있어야 할 부분에 깨지기 쉽고 뭉툭한 유리병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유리병에는 붉은 액체가 들어 있었고.
“……하, 이런 미친.”
교단과 적대하고 있는 입장에서 저 붉은 액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현이 모를 리가 없었다.
신혈.
악마를 불러들이는 피다.
화살은 일제히 하늘을 날았다.
일방통행의 모방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
어쩔 수 없이 모방을 뒤로 미룬 시현은 포탈을 생성, 날아드는 화살을 손으로 붙잡았다.
그러나 다음 포탈을 생성하기도 전에 이미 화살은 호텔의 벽에 도달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유리병이 깨지고, 안에 들어 있던 붉은 피가 호텔 벽을 적셨다.
상당이 오랫동안 모아온 신혈을 전부 사용하기라도 한 것인지 호텔의 벽 한쪽 면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시현이 붙잡은 화살 하나로는 별 차이도 없을 정도였다.
신혈에 의한 반응은 곧바로 찾아왔다.
고고고고.
땅이 울렸다.
시현의 뺨을 타고 한 줄기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어디보자…… 이그드라실은 없고, 콜로서스는 산소 부족으로 빌빌거리고 있고. 그러면 서울에 남은 대형은 뭐가 있더라?”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고민에 대한 답을 내놓기도 전에 두 마리의 거대한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