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어떤 식으로?”
돌연 박화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언제부터 저곳에 있었던 걸까.
돌아보니 문틈에 기대고 있는 박화영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세상만사가 굉장히 불쾌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일단 나는 계획을 바꾼다는 말에는 찬성이야. 솔직히 말해 1:1이면 그것들은 내 상대가 안 되지만, 그 셋이 작정하고 덤벼들면……. 아무리 나라도 동수를 이루는 게 고작이더라고. 레벨 서포터를 사용한다면 또 모를까. 하지만 그건 30분이라는 시간제한 때문에 좀 꺼려진단 말이지.”
그녀의 말에 이설아는 크게 놀랐다.
권능을 사용하는데 온 정신을 집중하느라 전황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건 사실이다.
때문에 뭐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는 옆에 있는 정민혜에게 전해 들은 게 전부였다.
이설아는 박화영을 싫어하지만 그녀의 실력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교단에서도 나름 쟁쟁한 구원자들 네다섯은 거뜬하게 상대하는 그녀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고작 세 명의 구원자를 상대로 동수를 이뤘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개개인의 실력은 고만고만한데 연계가 좋아. 둘 다 주먹 쓰는 놈들이라 거리를 만드는 게 쉽지가 않은데다가 그 은신 쓰는 놈이 상당히 거슬리더라고.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귀신같이 달려드는데, 기가 막힐 지경이야.”
“그 정도로 수준이 높아요?”
“음……. 사실 진짜 문제는 그거지. 이끄는 태초의 빛.”
“아…….”
교단은 세력의 크기만큼이나 정보력도 우수하다.
그런 교단이 이그드라실 전투에서 만인 앞에 선보여진 이끄는 태초의 빛에 대하여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광범위한데다가 강력하기까지 한 버프.
심각한 수준의 패널티나 귀찮은 전제 조건이 뒤따르는 것도 아니라 그걸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더욱 까다롭게 느껴졌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이번 작전은 어떻게든 성공했을 텐데. 아쉽게 됐네.”
진심으로 안타깝다고 여기고 있는 건지 박화영은 한껏 찡그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계획을 바꾼다는 말에는 찬성.”
그렇게 말한 박화영은 이설아가 방구석에 던져 놓은 가방으로 향했다.
가방을 열고 안에서 한 뭉텅이의 종이를 꺼내 온 박화영은 그것을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그러더니 그 중 몇 장을 골라 파기했다.
“자, 제1안은 실패. 이제 몇 번째 안을 선택할 거야, 사령관님?”
“음…….”
이설아는 고민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종이에는 정갈한 필체로 빼곡하게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 전부가 이한울, 이설아 및 교단의 수뇌부들이 모여, 며칠 밤낮을 의논한 끝에 만들어 낸, 호텔 정복을 위한 안들이다.
그 수가 워낙 많아 오히려 뭘 사용하면 좋을지 고민되기까지 했다.
“이거 어때?”
같이 안을 살피던 박화영이 눈을 빛내며 C―1이라 적힌 안을 집어 들었다.
“호텔 걔네 제작자 있어서 구원자의 무장은 우수하지만, 일반 전투원용 장비는 부실하잖아. 보아하니 총알도 인천연합에서 공급을 받는 거 같던데.”
“C―1이라면……. 좋네요.”
이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호텔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아군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인 상태에서 승리를 하고 싶었다.
교단의 적은 호텔만 있는 게 아니니까.
인천연합, 등대 등.
이름만 대면 누구나가 알아 주는 거대한 세력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최대한 전력을 온존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박화영이 고른 C―1은 상당히 괜찮은 안이었다.
“내일 해가 지면 곧바로 시행하도록 하죠.”
* * *
“괜찮아요?”
다음 날 저녁.
교단 측에서 움직임을 보였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온 시현을 맞이한 민서라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시현의 얼굴은 누가 봐도 어제 밤 한숨도 못 잔 사람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한계까지 소모한 체력과 정신력 때문에 느껴지는 피로감은 고레벨 구원자라고 해도 버티기 힘든 수준이다.
이를 감안하면 지금의 시현은 상당히 자신을 혹사시키고 있는 셈이었다.
“조금 쉬시지 그랬어요.”
“교단 측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요. 저놈들이 무슨 수를 사용할 것인지, 그 대처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하다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요.”
“그건……. 하아.”
민서라는 한숨만 내쉬었다.
시현의 말은 백번 옳다.
그러나 호텔에 있어 시현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주축이다.
만약 그가 무리하다가 컨디션 불량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기라도 하면 그대로 호텔은 붕괴할 수밖에 없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상황.
민서라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풀 죽은 민서라를 뒤로 한 시현은 호텔의 옥상으로 향했다.
지금은 천리안을 사용하는데 필요한 정신력마저 아끼고 싶은 상황.
육안으로 주변을 살피는데 옥상만큼 제격인 곳도 없다.
“리더, 오셨습니까?”
옥상에서 망원경으로 적의 동태를 살피던 생존자가 시현을 반겨 주었다.
시현 이상으로 눈가가 시커먼 게 간밤을 설친 게 분명했다.
시현은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현재 호텔에 이 생존자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차고 넘친다.
온 몸이 고열에 녹아내리고 잿더미가 되거나 내장을 쏟고 머리가 터져 나가도 눈앞에서 부활해 버리는 적들의 모습은 그들과 싸우는 호텔 생존자들의 정신에 큰 충격을 선사한 것이다.
시현조차 기가 질렸는데, 이들이라고 오죽했을까.
시현은 다 이해한다는 듯 생존자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망원경을 건네받았다.
“현재 저들은 머릿수를 이용해 호텔 주변을 포위한 채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다가 갑작스레 공격해 왔으니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될 거 같습니다.”
“……없네.”
망원경으로 적 진영을 쭉 훑어 본 시현은 짧게 감상을 고했다.
“없다니요?”
“구원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
생존자는 크게 놀라며 다시 한번 적들을 살폈다.
그러나 전에 봐서 몰랐던 걸 다시 본다 한들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구원자이기에 같은 구원자를 분간해 낼 수 있는 시현과 달리, 평범한 생존자에 불과한 그는 적 구원자가 일반 생존자들 사이에 섞여 있는지 다른 장소에 따로 배치되어 있는지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어, 음……. 구원자가 배치되어 있지 않다면 오히려 저희가 기습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지 않을까요?”
남성 생존자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전황을 뒤집을 획기적인 것이라도 되는 양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이었다.
“괜찮은 생각이네요. 하지만 그게 함정이라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어…… 음…… 죄송합니다.”
남자는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도대체 저놈들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 걸까.
시현은 어떻게든 저들의 지도자인 이설아의 속내를 캐내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다.
탕!
높아져만 가는 긴장감 속 고요한 적막을 깨뜨린 것은 한 발의 총성이었다.
시작은 이번에도 교단 측에서 끊었다.
첫 번째 총성이 있은 이후 기다렸다는 듯 총알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에휴.”
한숨을 내쉰 시현은 혹시라도 눈 먼 총알에 아군이 당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권능을 사용했다.
애초에 교단의 군대가 사정거리 내에 들어왔을 때부터 준비하고 있었기에 아군의 대응사격은 상당히 빨랐다.
그렇게 서로 총알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시간이 흘렀다.
‘구원자는 나오지 않는 건가?’
상대 쪽에서는 여전히 전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구원자를 내보내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쉬이 구원자를 내보낼 수 없었다.
그랬다가 상대방이 파 놓은 함정에 걸리기라도 하면 그 때는 정말 끝이다.
물론 시현도 마냥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노리는 게 뭐지?’
그는 침착하게 전황을 살폈다.
수많은 총알이 오가고 있는 것 치고는 별로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설아가 시간 역행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양측 모두 엄폐물을 이용해 단단히 몸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투원 중 태반은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 총만 머리 위로 들고 대충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대한민국 성인 남성의 대부분이 군대에서 총기 다루는 법을 배운다는 점을 감안하면 있을 수 없는 행태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현역 시절 습득한 경험과 지식보다 눈먼 총알에 머리가 뚫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앞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총알만 무의미하게 소모되고 있었다.
하지만 대응사격을 멈춘다면 적들이 더 가까이 파고들 것이다.
이 이상 자리를 빼앗긴다면 전투 도중 호텔 건물에 파손이 발생할 수도 있기에 사격을 멈출 수도 없었다.
“설마 물자로 압박하겠다는 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시현은 교단을 증오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힘을 얕보지 않았다.
‘교단의 인원이 많으므로, 그만큼 물자 소모량이 많을 것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은 물자를 확보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따라서 교단은 물자부족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근거 없는 추측만으로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을 만큼 낙천적이지도 않았다.
‘인원이 많으면 그만큼 물자 확보에 빼돌릴 수 있는 인원이 많다.’
‘그러니 교단이 가진 물자는 호텔보다 몇 배는 더 풍요로울 것이다.’
라는 게 시현의 생각이었다.
거기에 맞춰 사고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물자라 하면 식량의 고갈을 노리는 건가? 하지만 호텔은 상당히 오랜 기간을 버틸 수 있는 식량을 확보해 뒀어. 상당히 큰 규모의 온실이 있어서 어느 정도 자급자족이 가능한 상태고. 그걸 교단이 모를 리가 없는데…….’
시현은 생각의 방향을 전환했다.
그러자 물 쓰는 듯 총알을 소모하고 있는 전장이 눈에 들어왔다.
“총알?”
총은 외피를 가진 구원자에게 있어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 통용되는 이야기다.
수십, 수백의 인원이 일제히 총알을 때려 박으면, 제 아무리 외피라 해도 버텨 내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즉 집단과 집단의 전투에선 총기를 가진 다수의 인원이 어느 정도 승패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저렇게 성과 없는 총격전이 장기간 지속되면 곤란한 건 우리 쪽이지.’
사실을 말하자면 호텔이 비축해 놓은 탄은 그리 많지 않다.
근방에 군부대가 없어 총알 수급이 어려울뿐더러 총알은 식량과 함께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최우선적으로 구비해야 할 물품이다.
일반 생존자들에게 몸을 지키는데 총만큼 우월한 무기는 없으니까.
그렇기에 우호 관계를 쌓은 인근 세력으로부터 인원을 받거나 구매를 하고 있었지만, 맘 놓고 사용하기에는 부족한 게 현실이다.
‘아무래도 풍족한 물자를 토대로 천천히 밀고 들어오려는 심산인 거 같은데.’
시현은 웃었다.
“어림도 없지.”
* * *
이설아의 계획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구원자를 의도적으로 숨겨 상대로부터 의심하게 만들고 일반 생존자들끼리 사격전을 벌이게 해 물자의 소모를 유도한다.
비축해 둔 물자의 양은 교단이 압도적.
이런 식으로 희생자 없는 총격전을 반복하다보면 먼저 총알이 떨어진 호텔 측에서 사격이 멎을 것이다.
그 틈을 노려 병사들을 진격시키고 호텔 건물을 때리기 시작하면,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호텔은 불리한 싸움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다.
계획은 좋았다.
다만 그들이 하나 놓치고 있는 게 있었다.
작전이 시행되고 이틀이 지난 후.
이설아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저게 뭐람.”
이설아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그녀 뿐 아니라 박화영도, 이설아를 호위하는 두 명의 구원자도, 그리고 그 외에 교단에서 간부 취급을 받고 있는 구원자 전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호텔의 상공에 떠 있는 그것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헬기였다.
국방색으로 칠해져 있는 군용 헬기가 교단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주변을 한 바퀴 돌더니 인천 방향으로 머리를 틀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인천으로 가서 물자를 공급받겠다는 것이다.
“이설아, 너 호텔이 헬기를 가지고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어. 알고 있기는 했는데…… 헬기가 보통 물건인가요? 설마 제대로 굴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그녀의 말대로 헬기를 조종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했다.
얼마 전, 호텔에서 잠시 머무르고 있던 헬기 운전사가 자신의 고향으로 복귀했다는 정보까지 입수하지 않았던가.
고작 며칠 동안 헬기 조종법을 익히지는 못했으리라는 게 이설아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이설아의 예상을 깨고 호텔은 군용 헬기를 아주 철저하고 유용하게 이용해 먹고 있었다.
“젠장…….”
그녀는 가벼운 욕설과 함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작전은 실패다.
헬기를 이용하면 인천시청까지 오가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고, 군용 헬기라 크기도 넉넉하니 제법 많은 양의 탄환을 이송할 수 있을 것이다.
물자로 말려 죽이겠다는 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요 이틀 사이 호텔은 교묘하게 한계에 봉착한 척,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이며 교단을 기만했다.
아마 그 사이에 핵심 구원자들은 편하게 쉬면서 체력과 정신력을 보충했을 것이다.
“후우, 윤시현…….”
슬슬 속에서 천불이 났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