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망할, 좀비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
시현은 거칠게 욕을 토했다.
숨은 거칠어졌으며, 흘린 땀으로 인해 비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건 상상 이상으로 지옥이었다.
그야말로 끝이 없었다.
시현은 자신을 막기 위해 달려드는 적을 망설이지 않고 베었다.
몇 번이나 검을 휘둘렀고, 그로 인해 몇 명의 사람이 죽었는지는 30을 넘고 나서부터 세는 것 자체를 포기했다.
그런데도 당최 나아지는 게 없었다.
100명을 죽이면 뭐한단 말인가.
돌아보면 100명이 다시 부활해 있는데.
아무리 죽여도 수가 줄어들지를 않다보니,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는 것 자체가 굉장히 힘에 부쳤다.
생존자들은 계속해서 시현에게 달라붙었다.
‘정신력을 아끼고 있을 때가 아니야.’
구원자가 된 이후, 정신력이 먼저 고갈되면 고갈됐지, 체력이 먼저 바닥을 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신력보다 체력이 현저하게 부족한 상황이다.
시현은 아낌없이 권능을 퍼부었다.
백색의 불꽃이 일대를 수놓자,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을 목표로 삼는 건 소용없어.’
어차피 죽고 나면 몸에 붙은 불길의 시간도 거꾸로 흘러가 홀연히 사라져 버리니까.
‘그렇다면…….’
시현은 빠르게 눈을 굴렸다.
곳곳에 망가진 바리케이드의 잔해가 눈에 띄었다.
일부는 철로 만들어져 있지만 나무를 이용해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시현은 잔해에 불을 지르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아포칼립스가 시작되고 도시 전역에 퍼져 있는 붉은 고깃덩이도 상당히 가연성이 높은 물질이다.
백색의 불길은 빠르게 번지며 일대를 집어삼켰다.
“으아아악!”
“이, 이 미친 자식!”
교단의 전투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시현과 거리를 벌렸다.
누군가가 말했다.
사람이 죽는 것 중 가장 고통스럽고 끔찍한 방법이 불에 타 죽는 거라고.
아무리 시간 역행의 권능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지만, 그런 끔찍한 과정을 몇 번이고 되풀이할 만큼 겁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생긴 약간의 빈틈.
시현은 그곳으로 파고들었다.
“어어?”
“막아! 중앙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말과 달리 그들의 움직임은 더뎠다.
머리로는 시현을 막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죽음과 부활의 반복에 무의식적 차원에서 몸이 움직이는 것을 거부했다.
덕분에 시현은 적진의 중앙까지 무사히 침투할 수 있었다.
교단의 병력 중 가장 방어가 단단한 장소.
그곳에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있는 여성이 있었다.
‘이설아인가?’
얼굴의 반은 가려져 있기에 확신할 수 없었다.
애초에 몇 번 마주친 적 없는 얼굴이기도 하고, 이한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이설아의 존재감이 약한 건 사실이었다.
“……뭐가 되었건 여기에 있다는 건 적이라는 뜻. 죽여 보면 알겠지.”
섬뜩한 말과 함께 시현은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두 명의 구원자가 시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윤시현이다! 반드시 막아!”
“이설아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
가만 생각해 보니 이설아에게 두 명의 호위가 늘 따라다니던 것이 떠올랐다.
제대로 정답을 짚었다고 생각한 시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처형의 권능을 담은 핏빛 칼날이 어지러이 춤췄다.
두 명의 구원자는 이렇다 할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칼날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긴 자상이 생기고, 무언가가 강제로 헤집어 놓은 것처럼 상처의 크기가 배로 커졌다.
거기에 더해 기존의 상처에 교차 형식의 추가적인 상처가 생겨났다.
잘린 내장이 쏟아지고 갈비뼈 사이로 팔딱팔딱 뛰고 있는 심장이 보인다.
“……제길.”
시현은 이를 갈았다.
조금 전, 두 명의 구원자에게 일격을 가할 때 손에 걸리는 느낌이 없었다.
즉, 두 사람은 외피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투의 핵심이 되는 이설아의 호위로 어중이떠중이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터.
높은 확률로 눈앞에 있는 여성은 시현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마련해 둔 가짜 이설아라는 말이 된다.
“철저하기도 하지.”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시현은 여성의 목을 베었다.
카앙!
무언가가 손에 걸리는 느낌이 났다.
외피다.
그러나 강도는 약하다.
시현은 땅을 딛고 있는 발에 힘을 주며 체중을 앞으로 실었다.
그러곤 허리를 크게 뒤틀며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여성을 보호하던 외피는 강한 일격에 허무하게 깨져 버렸고, 여성의 목도 함께 바닥을 굴렀다.
잘려진 머리카락이 허공을 나풀거렸다.
‘만약 이 여성이 이설아라면 광범위하게 설정해 둔 시간 역행도 끝이 나겠지.’
시현은 아주 작은 기대를 품고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예상대로였다.
시간 역행은 끝나지 않았고, 조금 전 쓰러뜨린 세 사람의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시현의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쏟아지는 땀으로 인해 발아래에 웅덩이가 생길 정도였다.
그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판단한 생존자들은 용기를 내 달려들었다.
그들 사이사이로 막 부활을 마친 3인조와 비슷한 인상착의를 한 3인조가 여럿 눈에 띄었다.
“설마 저 중에서 정답을 뽑아야 하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시현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가혹하게 혹사당한 폐에서 아픔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직 한계는 아니다.
‘자존심 상하기는 하지만 일단 한 번 물러나는 수밖에. 그 다음에 저 중에서 진짜 이설아를 어떻게 찾을지도 생각해 봐야겠어.’
늘어뜨린 검에 처형으로 인한 흑색의 기류가 맴돌았다.
그 위로 백색 불꽃이 입혀지자 이그드라실을 불태울 때 사용한 잿빛의 불꽃이 완성되었다.
시현이 지쳤다고 생각해 신명나게 달려들던 교단의 전투원들이 겁에 질린 채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못하고 옆에 있는 동료의 등만 떠밀었다.
모르는 이가 봐도 굉장히 위험해 보이는 불꽃.
맞아도 시간 역행으로 인해 죽지는 않겠지만, 그 과정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고통스러우리라는 것을 본능적인 차원에서 감지한 것이다.
“뭐 해. 아무도 안 올 거야?”
시현의 도발에도 움찔거리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었다.
그러나 대치 상태가 마냥 계속되지는 않았다.
고고고고.
땅울림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적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건물의 옥상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태양을 연상시키는 적색의 빛은 허공에 정체불명의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원에 복잡한 고대 상형문자가 뒤엉켜 있는 듯한 도형의 직경만 해도 무려 10여 미터에 달했다.
“저건…… 아무리 봐도 화속성 포격의 진이네.”
포격의 진.
에체르르샤라티나라는 굉장히 어렵고 복잡한 이름의 신에게 축복을 받은 구원자가 사용할 수 있는 권능으로, 장거리 저격이 가능한 권능 중에서도 나름 강한 위력으로 각광을 받는 권능이다.
포격의 진은 사용자의 레벨에 따라 거리, 위력이 증가하는데 지금의 경우에는 대충 봐도 최소 3레벨 구원자가 사용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시현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지금쯤이면 수호나무 결계를 사용할 수 있어. 결계를 사용하면 3레벨 포격 정도는 막을 수 있고. 문제는 결계를 사용해 줄 민서라 씨가 박화영에게 발목이 잡혀 있다는 건데……. 그렇다고 저걸 방치하면 구원자는 몰라도 일반 생존자들은 상당히 죽을 거야.’
지금 호텔 소속 생존자들의 피해가 적은 것은 어디까지나 시현이 계속해서 치료의 권능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마저 거스르는 시간 역행과 달리 치료의 권능은 죽음까지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따라서 이번 공격을 허용한다면, 호텔 측은 수복할 수 없는 큰 피해를 입게 되는 셈이다.
“어쩔 수 없나.”
시현은 여전히 주춤거리는 호텔의 전투원들을 뒤로하고 호텔을 향해 달렸다.
콰아아!
동시에 진의 중심으로부터 적색의 섬광이 쏘아졌다.
노리는 곳은 시현의 예상대로 호텔 소속의 생존자들이 뭉쳐 있는 장소.
대량 학살을 노리기에 최적의 장소다.
“그래도 다행이네. 건물을 노렸으면 늦었을 지도 모르는데…….”
시현은 마지막 남은 정신력을 쥐어짜 냈다.
일방통행의 권능이 발동하며 허공에 투명한 사각형이 생겨났다.
일방통행은 정면에서 오는 적색의 섬광을 깔끔하게 집어삼켰다.
이그드라실의 섬광을 삼킨 때와는 상반된 결과였다.
“일단 어떻게든 급한 불은 껐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일당백의 능력을 보여 준 시현이라도 엄연히 한계가 있기 마련.
체력은 바닥이고 정신력도 방금 전 사용한 게 마지막이었다.
권능의 소모가 없는 치료의 권능이야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지만, 그 이외의 방면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다.
그러나 시현의 생각과 달리 전장은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어어? 저것들 갑자기 왜 도망가는 거야?”
“리더! 갑자기 교단의 병력이 물러서고 있어요!”
“……엥?”
당사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름 모를 어느 생존자의 보고에 시현은 고개를 들어 적진의 동향을 살폈다.
보고자의 말대로 교단의 병력이 물러나고 있었다.
본인들이 유리한 상황인데도 말이다.
이나연을 상대로 고전하던 나설주도 기회를 틈 타 달아났다.
박화영도 마찬가지다.
호텔 측에서도 에이스로 통하는 민서라와 LT마트의 리더 한기훈, 그리고 은신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허를 찌르는데 도가 튼 신호석.
놀랍게도 이 세 사람을 상대로도 우위를 점하던 박화영은 망설이는가 싶더니 나설주와 함께 퇴각했다.
민서라는 그런 박화영의 뒤를 쫓는 대신 주저앉는 것을 택했다.
체력과 정신력이 한계에 봉착한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시현 씨. 셋이서 한 사람도 커버를 못 하다니……. 변명하려는 건 아니지만 박화영 그 여자, 완전 괴물이에요.”
“괜찮습니다. 오히려 세 분이 아니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겁니다.”
“그렇게라도 말씀해 주시니 감사해요. 그나저나 교단은 왜 갑자기 병력을 뒤로 물린 걸까요?”
민서라가 의아함을 표했다.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시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굳이 자신들이 유리한 상황에서 병사를 뺐다는 것은…… 교단 본진에 사고라도 생긴 건가?”
“뭘 어렵게 생각해?”
한참 추론하고 있는데, 한기훈이 다가와 시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민서라와 함께 박화영을 상대한 그 역시 굉장히 지쳐 보였다.
그 증거로 시현의 어깨를 두드리던 손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한기훈 씨는 답을 알고 계십니까?”
“이설아라고 했나? 이 시간 역행을 광범위로 사용하고 있는 교단의 구원자. 우리가 지친 것처럼 그 여자도 지쳤겠지. 더 이상 시간 역행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아.”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무슨 수를 사용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설아는 광범위하게 시간 역행을 부여하는 고난이도 기술을 습득했다.
범위 내에서 시간 역행이 진행되는 횟수가 아니라, 시간에 따라 정신력이 소모되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 정도 인원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3레벨 구원자가 되었을 이설아는 권능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까.
시간을 확인해 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30분.
레벨 서포터의 유지 시간과 정확하게 동일하다.
“그렇다는 건…… 레벨 서포터를 사용하지 않으면 광범위하게 시간 역행을 걸치는 건 불가능하다, 이건가?”
새까만 밤처럼 어둡고 암울하기만 하던 미래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빛 말이다.
* * *
“으아아…….”
이설아는 바닥을 기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정신력의 고갈로 인한 어지럼증이 동반되었다.
오늘 점심에 먹은 것을 그대로 게워 내고도 모자랐는지 몇 번이고 헛구역질이 났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내용물이 텅 빈 주사기가 보였다.
“괜찮으세요?”
이설아의 호위 중 하나인 정민혜가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그녀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이설아는 깨질 듯한 두통을 어떻게든 견뎌 내며 창가로 향했다.
행여 그녀가 몸을 가누지 못해 떨어지기라도 할까, 정민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옆자리를 지켰다.
“생각보다 강해요.”
“윤시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윤시현이 강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새삼스럽지도 않아요. 하지만…… 저희가 관측했던 것보다 호텔 구원자들의 전투력이 강해요. 예정대로라면 이번 습격에서 박화영과 나설주가 상대 구원자 수를 반토막 냈어야 하는데…….”
예정이 틀어졌다.
계획대로라면 이설아가 시현과 정신력 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 호텔의 전투력을 크게 깎아 먹었어야 했다.
그 다음 후퇴.
이설아가 회복되면 다시 공격.
해당 과정을 반복하는 것으로 아군의 피해를 줄이는 한편, 호텔의 전력을 야금야금 갉아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설아의 생각보다 호텔의 전력이 강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상 소모전은 무의미해졌어요. 내일 습격에서는 접근 방식을 바꿔야겠어요.”
“그건 상관없지만…….”
말끝을 흐린 정민혜는 창밖으로 보이는 아군의 면면을 살폈다.
과연 저런 얼굴을 한 사람들이 몇 번이나 작전을 함께 수행해 줄 것인지.
불안하기만 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