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이한솔의 폭탄 발언에 경악한 것은 시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스의 낙인을 가진 돼지 한 쌍을 데리고 있다는 건가요?”
커다란 정신적 충격에 비틀거리면서도 시현은 기억을 더듬어 루스의 낙인이 갖는 효과를 떠올렸다.
낙인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구원자를 선별하기 위한 과정으로 사용된다.
즉, 어디까지나 인류를 위한 것으로 정의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인류가 갖지 못하는 낙인이 하나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루스의 낙인이다.
오로지 짐승에게만 나타나는 낙인이지만, 사실 그 효과를 누리는 것은 역시나 인간이다.
루스의 낙인이 박힌 짐승을 요리해 섭취할 경우 섭취량에 따라 신체의 자연 회복력이 증가하며, 동물과 쉽게 친해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루스의 낙인에는 한 가지 더 인류를 위한 효능이 존재한다.
바로 루스의 낙인을 가진 짐승 사이에서 태어난 새끼는 100% 확률로 낙인을 가진 채 태어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장 속도와 임신 기간이 보통의 짐승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빨라, 적은 양의 사료로 대량의 고기를 얻는 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이 지옥과도 같은 세상에서 신선한 육류를 얻을 수 있는, 사실상 유일무이한 수단이었다.
시현은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토큰에 여유가 있으니 농장이야 얼마든지 늘릴 수 있어. 테크노벨리의 생존자들을 수용할 공간도 충분하고. 어느 정도 시스템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만 고생하면 주기적으로 육류를 얻을 수 있으니…….’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루스의 낙인을 가진 돼지 한 쌍.
그것만으로도 테크노벨리의 생존자들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했다.
“알겠습니다.”
“그 말은…….”
“테크노벨리의 생존자들을 호텔에서 받아들이겠습니다. 물론 저희 쪽의 규칙에 따라 주셔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요.”
“감사합니다!”
이한솔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몇 번이고 반복해서 고개를 숙였다.
* * *
며칠 후.
테크노벨리에서 출발한 50여 명의 선발대가 호텔에 도착했다.
몇 대의 차량에 옷가지, 침구류, 생필품 등 다양한 물자를 싣고 있는 그들을 맞이해 주던 시현은 자신이 한 가지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텔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테크노벨리의 생존자들을, 이제는 새로운 호텔의 가족이 된 그들을 지켜보는 민서라의 눈동자가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시현의 소매를 꼭 붙들었다.
“시현 씨, 이거 아무래도…….”
“네. 무슨 말을 하고자 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시현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루스의 낙인을 가진 한 쌍의 돼지.
이한솔의 말은 진실이었다.
문제는 테크노벨리에서 돼지 한 쌍을 확보한 게 상당히 오래전 이야기라는 것이다.
루스의 낙인을 통해 한 쌍의 돼지는 엄청난 속도로 수를 불려 나갔고, 이제는 그 수가 무려 30여 마리에 이르렀다.
돼지들이 울어 대는 소리에 귀가 아플 정도였다.
“어차피 지금 당장 저 정도 되는 돼지들을 기를 능력은 안 되니까…….”
“안 되니까?”
“반 정도 도축하죠. 그리고…….”
“그리고?”
“오늘 온실에 심어 놓은 상추를 싹 수확하죠. 창고에 고이 모셔 두던 술도 꺼냅시다.”
“꺄아아!”
어지간히도 기뻤는지 민서라가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다.
슬금슬금 모여들어 시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생존자들 전원이 만세를 부르거나 정체불명의 춤을 추는 등 각자만의 방법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오죽했으면 테크노벨리의 생존자들이 당황한 나머지 자신들이 의지할 세력을 잘못 선택한 게 아닐까 걱정했을 정도다.
그날 저녁.
호텔에는 때 아닌 바비큐 파티가 열렸다.
불판 위에서 노릇노릇하게 익어 가는 먹음직스러운 삼겹살 한 점에 생존자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즐거운 축제의 현장임에도 곳곳에서 곡소리가 들려오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내가……. 내가 다시 이 순간을 맞이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는데…….”
“아아우아 아아어!”
“뭐라는 거야? 다 먹고 말해.”
“살아 있길 잘했다고. 흐이잉!”
민서라는 맥주 한잔을 곁들이며 이 순간을 즐겼고, 이나연은 감동에 겨워 폭포수처럼 눈물을 쏟아 냈다.
기껏해야 고기 한 점.
카드 한 장 들고 가까운 마트에 가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흔해 빠진 음식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같은 무게의 금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한 음식이었다.
“입에서 살살 녹아.”
“세찬아, 너 고기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이제부터 좋아해.”
쌍둥이는 양쪽 볼이 터지도록 고기를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게으름의 화신이던 강소하는 악마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일 때만큼이나 진지한 얼굴로 고기를 구우며 부지런을 떨었다.
신호석, 진우혁 등 호텔을 위해 고생해 준 구원자들도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
“윤시현!”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거구의 남자가 시현의 목에 팔을 둘렀다.
술병을 손에 들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한기훈이었다.
고기의 양이 며칠은 먹고도 남을 정도였기에 성남에서 함께 고생해 준 LT마트의 구원자들도 파티에 초대한 것이다.
“네 덕이 이렇게 뱃속에 기름칠을 다하고, 정말 고맙다. 내 인생에 육식은 전에 D마트에서 먹은 생선 요리가 마지막일 거라 생각했는데.”
“거 먹는데 방해하지 마세요.”
시현이라 해서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간만에 먹는 고기 아닌가.
신경을 곤두세운 그는 오로지 굽고 먹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시현 씨! 고기만 먹지 말고 한잔 받아요.”
만취한 것인지 푼수같이 웃고 있는 민서라가 시현에게 맥주가 가득 담긴 잔을 건넸다.
얼음을 동동 띄워놓아서 그런지 잔이 굉장히 차갑다.
손끝에서 시작한 서늘함과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감각이 기분을 들뜨게 만든다.
‘술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
조금 망설이기는 했지만 민서라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거절해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차가운 탄산이 목을 넘어갔다.
“크하!”
깔끔하게 잔을 비우고 입가에 묻은 거품을 혀로 훑어 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실컷 웃은 민서라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음 목표를 찾아 움직였다.
그렇게 한창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을 무렵.
피잉.
밤하늘에 작은 불꽃 하나가 쏘아졌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불꽃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 고도를 높인 불꽃은 폭발하며 사방으로 예쁜 적색의 불꽃을 피워 냈다.
“뭐야. 어떤 센스 있는 인간이 폭죽을 터뜨린 거야?”
유쾌하게 웃은 한기훈이 캔 맥주를 들이켜며 말했다.
그를 따라온 LT마트의 구원자들이나 테크노벨리 출신의 생존자들은 손뼉을 치며 밤하늘에 예쁘게 피어오르는 불꽃놀이를 즐겼다.
그러나 호텔의 생존자들은 아니었다.
축제의 현장이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웃고 떠들던 LT마트와 테크노벨리 출신 생존자들도 분위기를 읽고는 하나둘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저건…….”
시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밤.
폭죽.
두 개의 키워드가 맞물리며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누군가가 그 단어를 읊조렸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주변이 워낙 조용했기에 선명하게 들렸다.
야간에 호텔의 인근을 경비하는 인원들은 항상 폭죽을 휴대하고 다닌다.
만약 소형 악마를 발견하면 경비조가 알아서 처치하고, 중형, 혹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의 소형 악마 무리를 발견하면 무전을 통해 인근의 경비조와 연락해 힘을 합쳐 사건을 처리한다.
만약 대형 악마가 나왔을 경우 청색의 폭죽을 쏘아 올리도록 되어 있다.
그 외에도 두 가지 경우가 더 있는데 그중 하나가 전쟁이다.
만약 타 세력에서 호텔에 명백한 적의를 갖고 무장을 한 채 접근하는 것이 발견되었을 경우 경비조는 황색의 폭죽을 쏘아 올린다.
그리고 마지막.
접근해 오는 세력이 교단의 세력일 경우에는 적색의 폭죽을 쏘아 올리도록 약속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 밤하늘을 장식하는 폭죽의 색은 적색이었다.
“돌아 버리겠네.”
시현은 이를 갈았다.
모처럼의 축제가 방해를 받았다는 것에 대한 분노도 있지만, 그보다는 다른 쪽의 분노가 더 컸다.
“포탈 생성 권능을 다루는 연습도 해야 하고, 대전에도 방문해야 하고, 인천에도 가 봐야 하고, 이번에 받아들인 생존자들의 배치도 해야 하고, 할 일이 태산처럼 많은데 전쟁이라고?”
게다가 하필이면 그 상대가 교단이다.
서울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으며,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한다 해도 인천 연합, 등대와 함께 늘 상위권을 다투는 거대 세력.
더군다나 그 수장은 시현에게 있어 불구대천의 원수와도 같은 이한울이다.
시현이 느끼는 스트레스가 자연스럽게 정점을 찍었다.
“시현 씨.”
폭죽 한 방에 술이 깬 것인지 멀쩡한 얼굴의 민서라가 시현을 찾았다.
“폭죽이 터진 위치가 꽤나 가까워요. 서두르지 않으면 준비를 끝내기도 전에 놈들이 도착할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시현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스스로를 향해 속삭였다.
‘나는 리더다.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본보기가 될 의무가 있어.’
지금 이 순간에도 수백 쌍의 시선이 시현에게 향해 있다.
시현이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면 이들 모두가 불안을 느낄 것이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시현의 손바닥이 아래로 내려갔다.
눈빛은 차갑고 냉정했으며, 표정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던 분노는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 모습이 시현을 지켜보고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 생존자들의 마음에 안도감을 심어 주었다.
“아쉽게 됐지만 파티는 중지입니다. 오늘 막 호텔에 소속되신 분들은 사용 중이던 식재료를 창고로 옮겨 주세요. 자세한 건 진우혁 씨가 알려 주실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인원은 각자 팀장의 지시에 따라 본인이 맡은 자리로 이동하도록 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가장 인간을 괴롭게 만드는 것은 악마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것은 같은 인간이었다.
시현은 오늘과도 같은 날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고 예견하고, 그에 따른 대책을 마련해두었다.
생존자들의 배치도 그 일환이다.
“움직여!”
시현의 지시가 떨어지자 생존자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렬로 무기 창고로 향해 장비를 지급받아 근접 전투원은 바리케이트 인근에, 총기류를 지급받은 인원은 호텔의 창문을 이용해 자신들이 사격해야 할 적을 탐색했다.
그러나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적의 위치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들은 걱정하지 않았다.
시현은 야전이 있을 것까지도 예상하고 대책을 세워 뒀으니까.
호텔의 옥상에서 시작된 강한 라이트가 인근 백여 미터를 밝게 비췄다.
대낮처럼 환해진 공간을 생존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살폈다.
그 결과.
“발견했습니다! 270도 방향에서 적 발견!”
야밤을 틈타 호텔을 공격해 온 적을 탐지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구원자들 위치로.”
구원자들은 각자의 팀장을 따라 배정된 위치로 이동했다.
남은 것은 아직 자리를 청소하고 있는 테크노벨리의 생존자들, 그리고 LT마트 소속의 구원자들이다.
한기훈과 허공에서 시선이 교차했다.
그는 히죽 웃었다.
“용병 안 필요하냐?”
“당연히 필요합니다.”
시현은 순순히 한기훈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물론 그에 따른 대가는 치르겠지만 말이다.
시현은 한기훈 및 LT마트의 구원자들을 데리고 호텔의 서쪽 방면으로 향했다.
동시에 천리안을 발동.
적의 동향을 살폈다.
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천리안을 사용하니 호텔 인근이 대낮처럼 환하게 보였다.
호텔의 서쪽.
거리는 약 120여 미터 밖에서 한 무리의 생존자들이 접근해 오고 있었다.
어둠에 몸을 숨긴 채 천천히 이동하는 그들의 수는 대충 봐도 수백여 명은 되어 보였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교단이 가진 전력의 8할 정도는 되어 보였다.
‘이한울은 보이지 않는군.’
이상한 일이었다.
교단이 총력전을 벌여온다면 그 선두에는 당연히 이한울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디에도 이한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왜 없는 거지? 단순한 기만작전? 대량의 인원으로 시선을 집중시켜 놓고 뒤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건가?’
상대가 무슨 수를 꾸미고 있는지 간파하기 위해 시현은 부단히도 머리를 굴렸다.
그러던 와중에 익숙한 얼굴에 눈에 들어왔다.
‘선두에 있는 건……. 이설아?’
놀랍게도 교단의 선두에는 이한울의 여동생이자 시간 조작이라는 사기성 짙은 권능을 사용하는 이설아가 있었다.
그제야 이설아 주변에 있는 인물들의 면면이 보였다.
하나같이 초면이지만, 그 강렬한 외형적 특징들로 인해 그들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야수의 군주 나설주.
칼의 군주 박화영.
당장 눈에 띄는 두 사람만 해도 무려 장래에 군주로 거듭나는 인재들이다.
그 외에도 이름만 대면 누구나가 ‘아!’하고 감탄을 터뜨릴 만한 인재들이 모여 있었다.
이한울만 없다 뿐이지 어딜 어떻게 봐도 교단의 전력이다.
“이한울,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기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짓밟아 주마.”
시현은 전의를 불태웠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