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정성국은 원작의 정해수와 마찬가지로 감염이 된 상태에서 구원자로 각성한 인물이다.
구원자로 활동하며 그의 정신은 점점 오염되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정상인이라면 이해 못 할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다.
화목하고 평화로운 것보다는 피와 죽음이 난무하고 시체가 굴러다니는 걸 보며 쾌락을 얻는, 그런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는 자신의 오염된 욕망에 따라 테크노벨리가 있는 성남으로 참가자들을 모았다.
그리고 그들 전부를 죽이려 했다.
저들끼리 자멸하는 모습을 보며 즐길 생각이었겠지만, 그 모든 게 시현으로 인해 허사가 되었다.
그런 정성국이 참가자들이 힘을 모아 이그드라실이라는 초대형 악마를 토벌하려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라는 게 시현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성국은 시현의 기대를 배신하고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포기한 건가? 아니, 애초에 그럴 인간이 아니야. 그렇다면 가능성은…….’
시현의 시선이 이그드라실의 최심부로 향했다.
참가자 중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으며 천소해 역시 길목을 가로막고만 있을 뿐,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 누두도 이그드라실의 분신에 도달하지 못했다.
‘……아니지.’
단 한 사람.
접근이 가능한 사람이 있다.
정성국.
그는 공간이동을 사용하는 참가자다.
“나연아.”
“네?”
“저기 보이는 이그드라실 밑동의 중심부를 향해 폭풍을 날려. 최대한의 위력으로.”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신력이 고갈돼서 오빠의 호위를 못 하게 되는데요? 저 지금 진짜 한계에요.”
“호위는 괜찮아. 민서라 씨나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돼. 지금은 이게 제일 중요하고, 그건 너밖에 못하는 일이야.”
초조함에 쫓기다 보니 목소리가 제 것이 맞나 싶을 만큼 심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나연은 군말하지 않고 남아 있는 모든 정신력을 쥐어짜내 폭풍을 사용했다.
이그드라실의 외피에 마무리 일격을 가할 때와 비슷한 규모의 폭풍이 이그드라실의 잔해를 향해 쏘아졌다.
“어어? 자, 잠깐만.”
“으아아아! 이 미친 윤시현!”
폭풍의 규모가 워낙 거대했기에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천소해나 그녀와 대치하고 있던 참가자들까지 강풍에 휩쓸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이그드라실의 심부를 쓸고 지나간 폭풍 덕에 수북하게 쌓여 있던 재와 가까스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그루터기는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이그드라실이 뿌리를 내리며 생긴 구멍이 가득한 아스팔드 도로.
그리고 중심부에 서 있는 정성국이었다.
“역시.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다니까.”
여유롭게 웃고 있는 정성국의 오른손에는 은은한 녹색의 빛을 발하는 묘목이 들려 있었다.
가만히 뒀으면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했을 이그드라실의 분신이다.
정성국이 들고 있는 이그드라실의 묘목은 굉장히 앙상해 보였다.
“늦었네.”
시현은 두통을 느꼈다.
일이 꼬여도 아주 단단히 꼬였다.
“진짜 최악이야. 하필이면 저 인간이 묘목을 손에 넣다니…….”
“일이 그렇게 심각해요?”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이나연은 정신력의 고갈로 괴로워하면서도 질문했다.
시현은 쓰러져 있는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주며 말했다.
“심각하다…… 정도까지는 아니고. 귀찮게 됐지.”
“귀찮아요?”
“이제 겨우 일을 다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현장에서 문제가 터졌으니 해결하라고 하면 귀찮고 짜증나지. 안 그래?”
“……그러게요.”
이나연은 웃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시현이 다른 여러 가지 표현을 놔두고 굳이 귀찮다라고 표현했다는 것은 딱히 해결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반증이었으니까.
그녀는 시현은 무한히 신뢰한다.
때문에 정성국이 이그드라실의 묘목을 손에 넣었어도, 그로 인해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 전혀 모른다 해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 * *
시현이 처음 이그드라실을 소환했을 때만 해도 정성국은 크게 기뻐했다.
그는 정신이 오염된 자신의 사고방식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기에 거부할 수 없는 욕망과 충동에 따라 행동할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시현이 이그드라실을 소환했다.
성남에 모여든 생존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구원자, 일반 전투원들을 깡그리 몰살시킬 생각이 아닌 이상 그런 짓을 저지를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그는 한 가지 가설을 내놓았다.
어쩌면 윤시현도 자신과 같은 부류가 아닐까 하는 그런 가설 말이다.
하지만 그 후에 벌어진 시현의 행동은 그의 기대를 크게 벗어났다.
“그런 거였군. 자신을 미끼로 써서 참가자들이 저들끼리 싸우는 것을 막고, 이그드라실이라는 공공의 적을 만들어 서로를 적대하던 참가들이 힙을 합치게 만든다라…….”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대단하시군. 아주 영웅이 따로 없어. 주인공 납시었네, 그래. 역시 랭킹 3위다워.”
이런 세상에서도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윤시현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동시에 질투가 났다.
자신은 정신을 갉아먹는 충동과 욕망조차 이기지 못해 이러고 있는데, 누구는 황금과 꽃으로 장식된 승승가도만 달리고 있으니.
욕망에서 해탈한 성인군자라도 질투가 났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계획을 세웠다.
“이그드라실을 토벌한다 이거지? 내가 보기에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 보이지만, 그 인간도 바보는 아니야. 충분히 승산이 있으니 그런 짓을 벌였겠지.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그는 스마트폰에 전원을 넣고 원작을 펼쳤다.
이그드라실.
원작에서도 제법 후반부에 토벌되는 초대형 악마의 흔적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작의 주인공 정훈이 이그드라실을 토벌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한 권 분량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뭐라도 좋았다.
이용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싶어 그는 철저하게 원작을 파악했다.
그 결과.
아주 재미있는 정보를 하나 입수할 수 있었다.
“악마화…… 아하하! 이런 게 있었단 말이지?”
스마트폰 액정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는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 * *
악마화.
그것은 인간의 육신이 악마에 가까워지는 과정을 뜻한다.
대표적으로 평범한 인간이 감염되어 하수인이 되는 경우를 예시로 들 수 있겠다.
그들은 겉모습은 인간이되 신체 구조부터 시작해 사고방식까지 모든 것이 인간보다는 악마에 가깝다.
어떠한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한 번 악마화가 진행된 인간을 원래대로 돌려 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경우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악마화가 진행되기 때문에 어찌 보면 하수인은 불쌍한 희생자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육신을 악마화시키는 방법이 존재한다.
원작에서 언급된 대표적인 예시가 이그드라실.
구원자는 이그드라실이 두 번째 기회를 노리기 위해 남겨 놓은 묘목을 이용해 스스로의 육신을 악마화시키는 게 가능하다.
그 경우 이그드라실이 남겨 놓은 에너지 전부를 흡수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강함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말해진다.
원작에서는 주인공 정훈이 묘목을 손에 넣었기에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만 되었을 뿐, 실제 무슨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리메이크판에서는 구원자이자 수많은 주인공 중 하나인 정성국이 손에 넣은 묘목으로 사고를 치고 말았다.
“으하하하하!”
광소를 터뜨리는 정성국의 손에 들린 묘목은 녹색의 빛을 토해 내며 빠른 속도로 시들어 갔다.
묘목에서 쏟아져 나온 녹색의 빛은 정성국의 몸에 흘러들어 그의 육신을 변화시켰다.
피부가 갈라지고 녹색의 끈적이는 체액이 흘러내렸으며 작은 나무뿌리가 피부를 뚫고 나와 마치 갑옷처럼 그의 몸을 보호했다.
눈동자는 두 개로 갈라졌으며 정성국이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강한 풍압과 함께 칼날처럼 날카로운 나뭇잎들이 흩날렸다.
“젠장…… 끝난 줄 알았는데, 숨겨진 라스트 보스가 있었네.”
“저거 어쩌냐? 이그드라실 본체만큼은 아니어도 엄청 강할 텐데.”
참가자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민에 빠졌다.
사실상 그들에게 싸울 힘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다들 지쳐 허덕이는 지금 상태에서 이그드라실의 힘을 받아들여 악마가 된 정성국과 싸우다가는 엄청난 수의 희생자가 발생할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달아나는 게 옳다.
하지만 가끔 욕망은 인간의 사고능력을 저하시킨다.
“그냥 도망가면 이그드라실의 경험치는? 그 개고생을 했는데, 보수는 못 받아 먹는다는 거잖아.”
“경험치를 먹으려면 저 인간을 처리해야 해. 심지어 지금 경험치 버프까지 있잖아!”
초대형 악마 이그드라실을 처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막대한 양의 경험치.
그것에 눈이 돌아간 참가자들은 피아간 힘의 차이를 알고 있음에도 슬금슬금 무기를 들고 정성국을 포위했다.
그러나 정성국은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정성국의 두 눈은 오로지 시현에게 못 박혀 있었다.
어찌나 안광이 번뜩이는지 소름이 돋을 정도다.
“윤시현, 네가 만들어 준 이 기회 놓치지 않으마. 이 힘으로 피의 축제를 벌일 거야. 그 시작은 네가 될 테고.”
정성국은 손에 들고 있는 무기마저 내버렸다.
이미 이그드라실의 힘을 받아들인 지금, 어쭙잖은 무기는 오히려 전투력을 깎아먹을 뿐이다.
“달려들어!”
정성국을 포위하고 있던 참가자들이 일제히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을 무시한 정성국은 시현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콰아아!
강한 파동과 함께 쏘아진 나뭇잎이 참가자들을 덮쳤다.
비명과 함께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크하하하하!”
얼굴에 튄 피를 손등으로 훔친 정성국은 그것을 혀로 핥으며 광소를 터뜨렸다.
그는 또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가 딛고 있는 지면을 중심으로 날카로운 가시를 닮은 나무뿌리들이 방사형으로 뻗어 나와 접근하는 참가자들의 육신에 숨구멍을 뚫어 주었다.
즉사에 이를 만큼 치명적인 공격은 아니었지만, 시현이 권능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 그들은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으허어억.”
“경험치고 뭐고, 이러다 죽겠다.”
욕망을 억제하는 데 고통을 이용한 치료만큼이나 적절한 건 없었다.
공포에 질린 참가자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고, 그렇게 뚫린 길을 따라 정성국은 걸었다.
그가 걷는 방향의 끝에는 무력한 시현이 서 있었다.
시현은 겁먹은 기색 하나 없이 옆에 있던 남자에게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전달했다.
남자는 크게 당황하는 듯 했으나, 이내 각오를 다진 듯 시현의 앞에 섰다.
겁먹은 얼굴에 정처 없이 떨리는 눈동자.
이그드라실과의 교전에서 입은 상처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기껏해야 1레벨, 높게 쳐 줘야 2레벨 구원자.
이그드라실의 힘을 흡수한 정성국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유가 뭘까.
그에게서 좋지 않은 느낌이 났다.
누가 뭐라 해도 이그드라실을 토벌하는 데 1등 공신이던 시현조차 그에게 그런 감정을 주지는 못하는데 말이다.
“넌……. 뭐지?”
“지, 진우혁. 호텔 소속의 구원자입니다.”
“…….”
정성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다.
그렇다는 건 곧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이름이라는 뜻이다.
그는 계속해서 경종을 울리는 자신의 본능을 무시하고 잠시 멈춘 걸음을 다시 내딛었다.
목표는 시현.
진우혁을 포함해 몇몇 호텔의 구원자들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으나 힘의 차이는 월등하다.
방해될 것은 없다.
가뿐하게 무시하거나, 끈질기게 달라붙으면 뿌리를 이용해 심장을 꿰뚫어 버리면 될 일이다.
그렇게 정성국과 시현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
정성국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쯤 되면 뭔가 반응을 보일 법도 한데, 시현의 표정이 한없이 태평했기 때문이다.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어차피 넌 레벨 서포터의 후유증으로 반격조차 못 하는 상황이잖아. 그렇데 어째서 날 두려워하지 않지?”
그에 시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정성국을 응시할 뿐이었다.
악마화를 통해 감정에 민감해진 그는 시현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동정이었다.
“주제도 모르고!”
한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쳤다.
정성국은 땅을 박찼다.
단번에 거리를 좁히고 시현의 목을 붙잡을 요량이었다.
지금 정성국의 힘은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해졌다.
아주 살짝만 힘을 줘도 시현의 목은 힘없이 부러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금 전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진우혁이 몸을 던져 정성국을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귀찮게 하고 있어!’
그는 이를 갈았다.
목표를 이루는 데 걸리적거리는 남자를 제거하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으아아아악!”
자지러지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