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천 개의 별이 세계수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대처할 시간도, 방법도 없었다.
잿빛의 별에 닿은 이그드라실은 타오르기 시작했다.
뿌리부터 시작해서 줄기, 가지, 그리고 이파리까지.
아름답던 이파리는 삽시간에 재가 되어 떨어져 내렸고, 탐스럽던 황금빛의 열매는 폭발하며 또 다른 화재를 낳았다.
[오오오오!]
이그드라실을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제아무리 식물형 악마라 할지라도, 오히려 식물형 악마이기 때문에 뜨거운 열기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 모습을 하나부터 열까지 지켜보던 참가자들은 얼이 빠지고 말았다.
“미쳤네…….”
“원래 저 정도 되려면 3∼4년차는 돼야 하는 거 아니야? 물론 우리도 원작의 구원자보다 성장이 빠르기는 하지만, 저거랑은 비교가 안 되네.”
권능의 원 주인인 지현아가 사용할 때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하고 화려한 이펙트를 선보인 시현을 보며 몇몇 이들은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침을 흘리기까지 했다.
“이게 5레벨…….”
시현이 레벨 서포터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민서라가 느끼는 경이로움 더욱 컸다.
원작에서도 5레벨 구원자는 상당히 높은 위치에 속하는 인재로 통했다.
7레벨.
도달한 구원자는 단 한 사람, 정훈이 유일했다.
6레벨.
찾아보는 게 어려울 정도로 극소수의 구원자만이 여기에 속했으며 8인의 군주나 그와 비슷한 수준의 실력을 가진 구원자가 여기에 속했다.
그리고 5레벨.
어느 정도 이름 높은 세력의 리더 정도 되는 구원자가 여기에 속했으며, 시청의 리더 신현수나 등대의 리더이자 예언자 김영운 역시 5레벨 구원자였다.
그들이 거기까지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은 최소 5년.
그런데 시현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도달해 버리고 만 것이다.
물론 레벨 서포터라는 비정상적인 수단을 사용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현의 업적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5레벨 구원자의 힘.
그것을 지근거리에서 목격한 민서라는 뭐라 할 수 없는 감동에 휩싸여 말조차 잊고 말았다.
툭.
그런 민서라의 어깨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
그게 몹시 방해라는 듯 대충 털어 내던 그녀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어깨에 떨어져 내린 건 작은 불씨였다.
불씨가 민서라의 어깨에 앉아 있던 시간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불씨는 그녀의 어깨가 드러날 정도로 옷자락을 태워 버렸으며 땅에 떨어진 후에도 열기를 잃지 않았다.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한 민서라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을 뒤덮고 있는 이그드라실의 가지와 이파리.
그것이 불에 타 힘을 잃고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잿빛의 불꽃을 품은 채 말이다.
“이런 미친.”
민서라는 공포에 질렸다.
“으아아악!”
“머리! 머리 조심해!”
“윤시현, 이 트롤러 새끼!”
다른 참가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오르며 떨어지는 이파리, 나뭇가지, 그리고 세계수의 열매까지.
그야말로 화염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육각방패를 비롯해 온갖 방어계열 권능이 머리 위를 보호했으나, 참가자와 구원자, 그리고 일반 전투원까지.
수많은 인원을 전부 보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당장 시현에게 공격을 멈추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5레벨 구원자로서의 힘을 발휘하는 데 시간제한이 있는 시현은 멈추지 않고 이그드라실을 압박했다.
무엇보다 지현아의 백색 화염만큼 이그드라실에게 효과적으로 데미지를 줄 수 있는 권능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제 와서 공격 방법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일반 생존자들은 인근에 지붕이 있는 건물로 몸을 잠시 피하세요! 그곳에서 이그드라실을 향해 사격합니다. 방패계열 권능을 가진 구원자는 미처 피난하지 못한 생존자를 위주로 보호하세요!”
시현의 외침에 겁먹은 구원자 하나가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정도는 알아서 피해! 그 정도도 못 피하면, 그게 구원자냐!”
약한 소리를 하는 구원자에게 일갈한 이는 시현이 아니라 이나연이었다.
그녀 역시 처음에는 화염의 비에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시현의 옆에 서서 폭풍을 사용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시작된 칼바람은 잿빛의 불길로 인해 약해진 이그드라실의 껍질을 찢어발기고 깊숙한 곳에 있는 속살에까지 불길을 전달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구원자들도 이그드라실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수많은 구원자들이 쏟아내는 권능을 몸으로 버텨 내던 이그드라실도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섰다.
격한 진동과 함께 땅이 갈라지며 이그드라실의 뿌리가 튀어나왔다.
대지 아래에 꼭꼭 숨겨 둔 뿌리 역시 잿빛의 화염으로부터 안전하지는 못했다.
이그드라실은 불타는 뿌리를 휘둘러 구원자들을 공격했다.
“바, 방패!”
“하지만 지금 방패는 일반 생존자들을 지키는 데 사용되고 있어!”
나무뿌리와 화염의 비.
둘 중에 무엇을 먼저 막아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방어계열 구원자들.
영 미덥지 못한 그들의 행태에 혀를 찬 강소하가 남아 있는 피의 구슬을 모두 사용해 뿌리를 한 번에 속박했다.
이미 화염에 의해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던 뿌리는 사슬에 휘감기자 퍼서석 소리를 내며 재를 흩뿌렸다.
참가자들도 폼으로 구원자가 된 것은 아니다.
강소하가 뿌리를 포박하고 있는 그 짧은 틈을 타 태세를 정비하고 공세로 전환했다.
쏟아지는 공세에 뿌리가 하나둘 제거되었다.
[우우우우!]
이그드라실의 줄기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초대형 악마, 이그드라실이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그드라실의 몸으로 녹색의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건…….”
신이 나서 화염구를 퍼붓던 시현은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성남시를 두르고 있던 이그드라실의 결계가 옅어지고 있었다.
상황이 불리해지니 결계를 회수해 자신의 외피로 두르려는 것이다.
“어어? 겨, 결계가 사라지고 있다!”
누군가가 시현과 같은 것을 발견하고는 목청껏 소리쳤다.
참가자들이 이그드라실이라는 초대형 악마와의 싸움에 기꺼이 참가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그드라실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성남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하지만 개인의 무력으로는 이그드라실을 처치할 수 없다.
그렇기에 다 같이 힘을 모아 이그드라실을 처치하러 나선 것이다.
하지만 이그드라실은 결계를 회수했고, 반대로 자신을 보호할 외피를 겉에 둘렀다.
전투는 보다 어려워졌지만, 반대로 도망갈 길이 생겼다.
만약 여기서 이탈하는 참가자가 생기기라도 하면, 이그드라실과의 전투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시현은 도망가는 참가자는 없거나, 극소수일 거라 자신했다.
‘치명상을 입은 이그드라실, 그리고 초대형 악마를 사냥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경험치와 보상. 그걸 참가자가 어떻게 참아?’
참가자는 욕망의 덩어리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가며 Re write라는 이름의 게임에 참가한 게이머들이다.
그런 참가자들이 자신의 순위를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 먹을 이유가 없다.
전장의 분위기는 시현의 예상대로였다.
“어, 어떻게 하지? 결계도 풀렸으니까 이제 도망갈 수 있는 거잖아?”
“그쪽은 빠지시려고? 어휴, 감사하기도 해라. 이그드라실의 토벌 보상은 나누면 나눌수록 줄어드니까 그쪽이 빠져 주면 우리야 고맙지.”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누가 빠진다고 했나. 사람 참.”
승산이 보이니 참가자들은 퇴로가 확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달아나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와서 외피를 둘렀다 해도 그 안에서 불길은 타들어 가고 있으며, 외피를 깨부수기만 하면 승리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거기에는 레벨 서포터를 이용해 5레벨 구원자로서 위용을 보여 준 시현이 또다시 뭔가를 보여 줄 거라는 믿음도 한몫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아, 30분 지났다.”
도핑으로 한순간 무지막지한 무용을 선보인 시현이 그 후유증으로 인해 구원자라고 칭하기도 민망할 만큼 약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자프의 권능을 2시간 49분 동안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르하의 권능을 1시간 1분 동안 사용할 수 없습니다.>
레벨 서포터의 패널티로 인해 시현의 권능 두 개가 전부 봉인되었다.
“흐음…… 패널티가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생각만큼 심각하지는 않네.”
하지만 그동안 구원자의 육신에 익숙해져 있던 시현에게 패널티로 인해 찾아온 무력감은 상당히 버티기 힘든 수준이었다.
몸이 무겁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 느낌이다.
툭.
어디선가 작은 돌멩이 파편이 날아왔다.
그것이 시현의 뺨을 긁었다.
자그마한 고통과 함께 피부가 벌어지고 피가 흘렀다.
권능이 작동하지 않고 있기에 상처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회복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런 거에 상처를 입은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아주 살짝 공포심이 생겼다.
평소라면 몸을 보호해 주는 외피로 인해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자그마한 충격에도 피를 보게 되었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콰앙!
시현의 바로 옆에 이그드라실의 열매가 떨어지고 폭발했다.
터져 나온 강렬한 열기에 피부가 아프고 숨이 턱 막혔다.
‘인간은 이렇게나 무력한 존재였구나.’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면 자신과 같은 처지임에도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생존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막상 힘을 전부 잃고 나니, 그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오빠!”
이나연이 비명을 지르며 시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가 시현을 낚아채는 순간, 그가 있던 자리에 불타는 나무 짐승의 앞발이 내리꽂혔다.
오감마저 둔해진 것이다.
단칼에 짐승을 처치해 버린 이나연이 그를 다그쳤다.
“뭐 하고 계신 거예요? 왜 가만히 서서…….”
시현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던 이나연은 그제야 시현의 뺨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어라? 오빠 외피 언제 깨진 거예요? 아니, 외피가 깨질 만한 수준의 상처를 입으신 적도 없는데 왜…….”
“부작용.”
빈 주사기를 흔들며 힘없이 웃는 시현.
이나연은 마치 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니까 그 말은, 언제 어디서 어떤 이유로 사망할지 모른다는 말이에요?”
“그런 셈이지.”
“……오빠, 내 뒤에 딱 붙어 있어요.”
외피가 사라졌다 해도 결국 일반 생존자들과 다를 게 없어진 것뿐.
팔다리가 사라져 거동이 불가능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나연은 마치 걸음마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를 보호하기라도 하듯 눈에 쌍심지를 켜고 고개를 홱홱 돌리며 경계 수준을 몇 계단이나 끌어 올렸다.
덕분에 시현은 눈 먼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을 걱정 없이 편하게 전황을 훑어볼 수 있었다.
‘지금 이 대로라면 외피를 깨는 데만 해도 한 세월이겠네.’
외피는 악마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강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대형 악마인 현무만해도 인천 연합이 게릴라전을 벌이며 며칠 동안 고생한 결과, 겨우 외피를 깰 수 있었다.
대형조차 그 정도인데, 초대형인 이그드라실의 외피를 깨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체적으로 화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시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굳이 외피를 깰 필요는 없어. 버티기만 하면 돼.’
외피는 사용자를 보호해 주지만, 외피를 두르기 이전에 받은 피해까지 없던 것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이그드라실이 급하게 결계를 외피로 돌렸지만, 이미 몸에는 불길이 번지고 있는 상황.
시간만 끈다면 불길은 이그드라실의 온몸을 태워 버릴 것이다.
[우오오오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그드라실이 반격에 나섰다.
줄기가 기형적으로 뒤틀리더니, 타원형의 빈틈이 만들어졌다.
“과, 광선 공격이다!”
“윤시현! 방패!”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윤시현을 찾았다.
그의 권능이라면, 만물의 통행을 막는 일방통행이 자신들을 지켜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시현은.
“못해. 정신력이 전혀 없어.”
“……엥?”
모두의 기대를 배신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그드라실은 강력한 한 방을 위한 에너지를 모으고 있었다.
“솔직히 이 정도면 다 해 줬지. 밥상 예쁘게 차려 줬더니 이제는 먹여 달라고까지 할 셈이야?”
그제야 자신들을 지켜 줄 방패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참가자들은 혼비백산 달아났다.
“흩어져! 어떻게든 피해!”
“젠장, 저 빌어먹을 자식! 이제 와서 통수를 치다니…….”
혼란이 극에 달한 참가자들을 보며 시현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이그드라실을 토벌하기로 결정한 후 반나절 정도의 여유가 있었는데, 이그드라실을 토벌하기 위해 복습을 한 참가자는 없는 모양이었다.
“밑으로 들어가, 멍청이들아. 아까 못 봤어? 이그드라실의 광선은 원뿔모양으로 뻗어나가잖아. 도중에 각도를 바꾸는 것도 불가능하고. 바로 밑에 있으면 안 맞아.”
“……아!”
힌트를 듣고 나서야 대처 방법을 떠올린 참가자들은 찬사를 터뜨렸다.
가만 생각해 보니 시현의 말이 백번 옳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그드라실의 광선은 본체의 중심부에서 쏘아지며, 하나의 점에서 시작해 거리가 멀어질수록 범위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때문에 이그드라실의 발아래에 사각지대가 생긴다.
그뿐이랴.
이그드라실이 광선을 토해 내고 기절해 있는 동안 사각지대를 이용하면 일방적으로 공격까지 가능하다.
“달려!”
참가자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이그드라실을 향해 내달렸다.
어쩔 수 없이 일방통행에 의존해야 하던 전과 달리, 지금 이그드라실과의 거리는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웠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