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아포칼립스 초창기에 그렇게나 시달린 시현이 주사기에 담긴 액체의 정체를 모를 리가 없었다.
레벨 서포터.
일시적으로 구원자의 레벨을 강제적으로 끌어올려 주는, 사기성 짙은 약품이다.
문제는 그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사용자에게 강력한 힘을 제공하지만, 그 대가로 레벨 서포터는 사용자의 목숨을 앗아 간다.
“잘 알고 있네.”
천소해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주사기를 자신의 팔뚝에 꽂았다.
올려다보니 지현아 역시 레벨 서포터를 꺼내들고 있었다.
“으…… 꼭 주사기 형태여야 하는 거야? 복용할 수 있는 형태면 얼마나 좋아.”
주사기를 든 지현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애초에 자신의 팔에 날카로운 바늘을 꽂아 넣는 건 어지간한 담력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결국 지현아는 자신의 팔에 주사를 놓는데 성공했다.
굉장히 혼란스러운 광경이었다.
‘그 엄청난 부작용을 가진 레벨 서포터를 아무 거리낌 없이 주사했다고? 저 두 사람은 단순한 소모품으로 사용할 만한 전력이 아닌데?’
무엇보다 지현아와 달리 천소해는 참가자다.
원작을 읽었다면 레벨 서포터의 부작용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터.
그런 인간이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팔에 레벨 서포터를 꽂았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결국 도출되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믿고 싶지 않지만, 정말 믿기 힘들지만.
죽음이라는 부작용을 제거한 레벨 서포터는 완성된 것이다.
“돌아버리겠군.”
그렇지 않아도 귀찮은 콤비였는데 이걸로 더욱 까다로워졌다.
어쩌면 단순하게 까다롭다고 정의하고 끝낼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거 방심하면 죽을 수도 있겠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2레벨 구원자 둘이 아니라 3레벨 구원자 둘이다.
물론 시현은 4레벨 구원자이며, 3레벨에 달한 아르하의 낙인이 추가적으로 신체 능력을 보정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시현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화력을 손에 넣었다.
방심은 금물이다.
‘아니지.’
시현은 생각을 바꿨다.
가만 생각해 보면,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저 두 사람과 싸워 줄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목적이 간을 보는 것이기도 했고, 가능하면 죽이고 아니면 예정대로 도망가면 된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싸움이었다.
“이제 2차전 시작해야지?”
도핑을 끝마치고 과하게 자신만만해진 천소해가 손 위에서 검을 빙그르르 돌리며 말했다.
시현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싫은데.”
“……뭐?”
당황한 천소해를 뒤로한 시현은 전속력으로 달렸다.
설마 시현이 도망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천소해는 멍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러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발악하듯 발을 굴렀다.
“어? 어어? 야! 비겁하게 도망가냐!”
천소해가 기를 쓰며 따라붙었으나 아무리 레벨 서포터로 도핑을 했다 해도 두 사람 사이에는 레벨의 차이가 존재한다.
거리는 빠르게 멀어졌다.
결국 시현을 놓쳐 버린 천소해는 애꿎은 벽에다 대고 성질을 부렸다.
“망할! 드디어 윤시현을 잡아 죽이나 했더니 쥐새끼처럼 빨라 가지고! 비겁하게 도망이나 치고!”
“애초에 도핑까지 하고 둘이서 덤빈 우리가 비겁 운운할 처지는 아닌 거 같기도 해.”
“너, 누구 편이야?”
“하하하.”
웃음으로 상황을 정리하려는 지현아를 보고 씩씩거리던 천소해는 주먹으로 벽을 때렸다.
힘없이 허물어지는 벽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 부작용 때문에 반나절은 끙끙대고 앓아야 할 텐데.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우리 전투원들도 근처에 있으니까 별일은 없을 거야. 네가 쓰러져도 잘 회수해 줄 테니까. 그나저나 윤시현 말이야, 나 오늘 처음 봤는데…….”
“처음 봤는데?”
“내 타입이더라. 왠지 괴롭히는 맛이 있을 거 같아. 굳이 죽이지 말고 우리 쪽으로 영입하면 안 되는 거야?”
“……미친년.”
고개를 흔든 천소해는 시현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 * *
천소해와 지현아.
두 사람을 성공적으로 따돌린 시현은 폐건물에 숨어들었다.
“젠장! 어디로 사라진 거야?”
“일단 이 주변을 샅샅이 뒤져봐!”
시현의 뒤를 쫓고 있는 건 비단 두 사람뿐만이 아니다.
정훈을 손에 넣는 데 있어 가장 유력하고 위험한 경쟁자인 시현을 처리하고자 하는 참가자, 그를 처치하면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을 노리는 참가자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참가자들이 시현의 뒤를 쫓고 있었다.
때문에 시현은 그들의 눈을 피해 더욱 깊고 으슥한 곳에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피곤하네.”
육체적인 부분보다는 정신적인 부분에서의 피로감이 더 컸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할 게 산더미처럼 많은데, 부작용을 제거한 레벨 서포터의 등장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기껏 서울에서 제일가는 세력을 만든 놈이 그동안 대외적인 활동도 안 하고 숨어서 뭘 하나 싶었는데, 이런 짓을 하고 있었구나.”
원작에서 레벨 서포터를 개발한 연금술사 구종환.
그를 처리했으므로 레벨 서포터의 개발은 불가능하거나 한참 늦게 완성될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1∼2년 정도는 여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이한울의 집념과 능력은 시현의 상상 이상이었다.
“덕분에 계산해야 할 게 하나 더 늘었어. 만약 레벨 서포터를 만드는 데 드는 코스트가 적다면, 두 사람뿐만이 아니라 교단의 구원자 전원이 레벨을 높여서 달려들 텐데. 이걸 어떻게 대처하냐…… 생각만 해도 짜증나네.”
밤은 깊어지고 졸음도 쏟아졌다.
시현은 버려진 침대에 몸을 눕혔다.
아직 생각이 다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건 내일의 나지 오늘의 내가 아니라는 일념 하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추격자들은 시현에게 잠깐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았다.
“윤시현.”
나지막한 목소리.
들어본 적 있는 익숙한 음성이 시현의 눈을 뜨이게 만들었다.
침대에 누운 채 고개만 돌려 옆을 바라보니 반쯤 무너진 벽 위에 걸터앉아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테크노벨리의 리더이자 시현과 민서라를 돌연변이 수룡의 둥지까지 날려 버린 장본인.
참가자 정성국이다.
‘거리는…… 8미터 정도인가.’
나름 안전거리랍시고 확보해 둔 것 같지만, 시현에게는 정말 별거 아닌 거리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를 제압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시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도 해결하고 싶은 궁금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배짱으로 모습을 드러낸 거야?”
“솔직히 놀랐어. 네가 살아 돌아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거든. 낙하의 충격으로 죽거나, 아니더라도 그 근처에는 바위 도마뱀을 포함해 위험한 악마가 잔뜩 있으니까. 당연히 죽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쉬웠겠네.”
“그럼. 아쉽지. 모처럼 큰 그림을 그려 놨는데, 너 때문에 그림이 망가지고 있다고.”
주머니를 뒤적거린 정성국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열심히 라이터의 부싯돌을 굴렸으나, 가스가 없는지 불은 나오지 않았다.
절망하며 라이터를 내던진 정성국은 재차 입을 열었다.
“부탁인데 그냥 우리끼리 싸우게 놔두면 안 되냐? 솔직히 말해서 너 스스로도 밸런스 붕괴가 심하다는 거 알고 있잖아. 거, 애들 싸우는 데 어른이 끼어들면 못써요. 꼴사나워. 다른 사람들한테 욕먹어. 손가락질 당한다고.”
“애들 싸움은 무슨. 애들을 모아서 싹 다 몰살시키려는 거겠지.”
시현은 조롱하듯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그런 시현을 응시하는 정성국의 표정은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수룡의 둥지를 처리하는 동안 내가 생각해 봤거든? ‘대체 이 새끼는 대가리에 무슨 생각을 넣고 있는 걸까’, ‘왜 도와주겠다는 나를 죽이려 든 걸까’하고.”
“그래서 답은 찾았어?”
“문제가 어렵더라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안 나와. 그래서 막막했는데, 하나 걸리는 게 있더라고.”
“걸리는 거?”
“네 랭킹.”
랭킹 557위.
Re write가 시작되고 수개월이 지난 지금 다수의 참가자가 목숨을 잃었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가장 밑바닥이라 할 수 있는 순위다.
문제는 그 순위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성국은 원작의 주인공인 정훈을 동료로서 두고 있다.
아무리 본인이 무능하고 독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성향의 인물이라 해도 원작의 주인공을 데리고 있다는 점만으로 관심을 받기에는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성국의 순위는 바닥이다.
이 점을 이해할 수 없던 시현은 고민한 결과, 한 가지 가정을 내놓았다.
“너는 진짜로 정훈을 데리고 있는 건가?”
“그럼. 성은 정, 이름은 훈. 성별은 남자.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아. 애초에 정보 수집에 특화된 권능을 가진 구원자라면, 이 정도야 금방 알아낼 수 있잖아? 테크노벨리에 모인 구원자들도 그 정도 정보력은 가지고 있을 테고. 금방 드러날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디에 있어.”
“아니. 질문을 바꿀게.”
시현은 잠시 호흡을 끊었다.
그리고 자신이 쭉 의심하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네가 데리고 있는 정훈은 원작의 주인공인 그 정훈이 맞아?”
“…….”
정성국은 침묵했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시현이 아니었다.
“역시 동명이인인가.”
처음 LT마트에서 정훈과 만나지 못했을 때 시현은 두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하나는 정훈을 누군가가 채갔을 가능성.
그렇기에 테크노벨리에 정훈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테크노벨리의 정훈은 원작의 정훈과 그저 이름이 같을 뿐인 동명이인의 구원자였다.
‘그렇다면 역시…….’
두 번째 가능성을 떠올린 시현은 식은땀을 흘렸다.
현재 참가자들이 진행하고 있는 Re write는 일단 원작의 리메이크라는 설정이다.
그리고 참가자는 리메이크작의 주인공이라는 설정이고.
그렇다면 원작의 주인공은 어떻게 되는 걸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으나,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답이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그래. 정훈에 대해서는 이해했어. 하지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
“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다 말해 줄게.”
“이러는 이유가 뭐야?”
“그야 당연히 내 랭킹을 올리기 위해서지. 나도 Re write에서 승리하고 싶은 참가자 중 하나니까. 정훈을 미끼로 써서 쟁쟁한 참가자들을 한 데 모아서 저들끼리 싸우게 만드는 것으로 일망타진한다. 얼마나 훌륭한 계획이야.”
“웃기지 마.”
시현은 싸늘하게 내뱉었다.
“애초에 Re write에서 이길 생각이 있는 놈이었으면, 이런 사건을 벌이기 전에 557위라는 그 같잖은 랭킹부터 어떻게든 해결했겠지.”
보통이라면 557위라는 순위를 듣는 순간, 어지간히도 무능한 인간이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현이 본 정성국은 결코 무능한 인간이 아니다.
포탈이라는 사기성 짙은 공간 계열 권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를 통해 물정령사를 영입하고 테크노벨리라는 거대 세력의 리더 자리까지 차지했다.
이 정도 업적을 세운 참가자라면, 아무리 못해도 100위권에는 진입했어야 정상이다.
더군다나 그는 동명이인의 정훈을 미끼 삼아 성남시 전체를 전장으로 만드는 미친 업적을 이뤄 냈다.
박수를 받을 만한 일은 아니지만, 독자들은 참가자의 선행, 악행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정확하게는 비판은 하겠지만 그게 조회수의 하락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 증거로 이한울의 랭킹은 2위로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성국의 순위는 557위.
즉, 업적과 무관하게 관심을 받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다.
도대체 이 남자는 뭔 짓을 했기에 이만한 업적을 세우고도 최하위권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일까.
헬기를 타고 성남시로 복귀하는 도중에도 시현은 꾸준히 고민했다.
그 덕에 떠올릴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이라면 선악을 따지지 않고 즐기는 Re write의 독자들이 아주 혐오하는 것을.
“너 감염자냐?”
이 세상에는 인류가 인류를 배신하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다.
살아남기 위해, 혹은 제 뱃속을 채우기 위해.
기타 등등의 이유로 인류를 배신하고 악마의 편에 선 이들을 인간은 신을 배신한 자, 이단이라 칭한다.
그러나 정성국은 이단과 거리가 먼 케이스다.
이단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류를 배신하는 자들인데, 정성국이 하는 짓을 보면 이익을 보려고 일을 저지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의 파멸을 바라는 듯한 행동패턴.
시현은 이런 부류의 인간을 하나 알고 있다.
정해수.
이빌 보아에게 감염된 상태로 각성한 구원자.
육신은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자의 것이지만, 그 속은 새까맣게 오염되어 결국에는 최악의 빌런으로 탄생하게 된 등장인물이다.
그렇기에 대충 감염자라 칭한 것이다.
다행이도 뜻은 통한 모양이었다.
정성국은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각성 전에 조금 큰 모기한테 물리기는 했지. 하지만 아무렴 뭐 어때? 이것도 나고, 그것도 나인데.”
“…….”
시현은 말을 아꼈다.
설득이니 뭐니 그런 것은 불필요했다.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본인의 입만 아프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정성국이 거짓 소문을 의도적으로 흘려 사람들을 성남에 모은 이유.
그들로 하여금 피 튀는 싸움을 하게 만드는 이유.
원작의 정해수가 그러했듯 그저 대량의 사람이 처절하게 죽어 나가는 것을 눈에 담고 즐기기 위해서다.
그런 인간과 정상적인 의견 교환이 가능할 리가 없다.
“이만 가 봐.”
“뭐야. 그냥 보내 주려고? 눈깔 뒤집혀서 달려들 줄 알았더니…….”
“도망칠 거잖아.”
“그렇기는 하지. 그러면 내 부탁은 어떻게 되는 건데? 만약 네가 이번 사태에서 빠져 준다면…… 이한솔이랑 정훈을 넘겨줄게. 한쪽은 짝퉁이기는 하지만. 어때?”
“3초.”
“……?”
“내가 고작 이 정도 거리가 문제돼서 너를 보고만 있는 게 아니란 걸 증명하기까지 남은 시간이다.”
“…….”
무심하게 내뱉은 경고는 효과적이었다.
가만히 시현을 응시하던 정성국은 그대로 권능을 사용해 모습을 감춰 버렸다.
뻥 뚫린 천장을 통해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시현은 한숨을 토했다.
오늘도 편히 자기는 글러먹은 모양이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