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나 방금 재미있는 거 봤어요.”
“무슨 소식?”
“하운드네랑 교단네랑 붙었어요.”
“……너는 뭐 그런 중요한 소식을 오늘 날씨 이야기처럼 대수롭게 않게 말하냐?”
남자, 권수용은 자리를 박찼다.
눈앞에서 두 눈을 감은 채 태연한 얼굴로 손톱을 손질하고 있는 여자.
그녀가 가져다준 정보가 경이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부터 이 방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지만, 그녀가 가져다준 정보의 신뢰성은 확실하다.
참가자 임서림.
그녀가 가진 권능이라면 방 안에서도 테크노벨리뿐 아니라 성남 전체를 한눈에 담을 수 있으니까.
“상황은 어때? 심각해?”
“양쪽 다 뒤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어요. 사망자도 나왔고, 아무래도 쉽게 진화될 것 같지는 않네요.”
“미치겠네…… 이거 어떻게 해야 해?”
“가만히 앉아서 지들끼리 살 깎아먹기 하는 걸 지켜보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물론 그게 정석이긴 하지.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아.”
만약 등대 단일 세력이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모인 건 등대의 구원자뿐만이 아니다.
“야, 권수용!”
무례하게도 노크도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 한 무리의 남자들이 있었다.
잔뜩 흥분해서 씩씩거리고 있는 그들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어디론가 달려갈 기세였다.
“소식 들었어? 아니, 그쪽은 천리안이 있으니 당연히 직접 상황을 확인했겠지. 어떻게 할 거야?”
“그야 당연히…….”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그런 멍청한 소리는 하지 마라. 서로에게 총력을 퍼붓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놈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권수용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쳤다.
누가 누굴 보고 멍청하다는 건지.
하지만 다른 참가자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남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쪽도 같은 생각입니까?”
“당연하지. 애초에 우리가 여기에 모인 이유가 뭐야. 그 정훈을 손에 넣기 위함 아니야? 그렇다면 경쟁자를 6할 이상 줄일 수 있는 지금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지?”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생각 같아서는 무력을 사용하더라도 그들을 제압해서 대기를 명령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 모인 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각 세력에서 에이스 취급을 받고 있는 구원자이자 참가자들이다.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의 무력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되면 등대는 이들이 몸을 두고 있는 세력들과 전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지금 저희가 움직이면 단순히 참가자끼리의 싸움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세력이 움직이게 된다, 이거지?”
한 남자의 말에 권수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테크노벨리에 모인 참가자들은 어디까지나 선발대다.
그들 모두는 어딘가의 세력에 소속되어 있으며, 원작을 통해 많은 혜택을 얻는 것으로 일반적인 구원자보다 빠른 성장을 한 참가자들은 각 세력에서 리더, 혹은 에이스로 추앙받고 있다.
그런 그들이 목숨을 건 전쟁을 벌인다.
당연히 그들을 보유한 세력이 좌시하고 있을 리가 없다.
자신들의 에이스와 리더를 지키기 위해, 혹은 복수를 위해 발 벗고 나설 것이다.
전쟁의 범위는 크게 확장될 것이다.
지금처럼 다툼 수준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쟁 말이다.
“…….”
그제야 끓어오르던 피가 진정된 건지 참가자들 사이에 동요가 피었다.
하지만 그 동요도 잠시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의견은 달라지지 않아. 이 싸움이 전쟁으로 번지더라도 경쟁자의 수를 줄이는 것을 선택하겠어. 너와 달리 우리 같은 중위권 참가자들에게는 이제 뒤가 없다고.”
“역시 그렇군요.”
권수용은 두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하고 있던 결과였다.
이번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성능이 뛰어난 장비라거나 영약 같은 거였다면, 아쉬운 마음은 뒤로하고 포기를 선언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얻을 수 있는 이득은 고작 그 정도가 아니다.
원작의 주인공, 정훈.
이미 세상을 한 번 구원한 이력이 있는, 장래가 보장되어 있는 명실상부 최강의 구원자.
그가 있으면 Re write의 조회수와 최후의 전쟁에서의 승리, 두 가지를 전부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
어떻게든 조회수를 끌어올려야 하는 참가자들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다.
‘어쩔 수 없나.’
권수용은 몸을 일으켰다.
배후에서 천리안 임서림이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비록 등대에 몸을 두고 있으며 랭킹 1위 한소현의 밑에서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Re wirte의 승리를 노리는 참가자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가시죠.”
* * *
“이제 곧 천안입니다.”
헬기를 조종하던 한성규의 목소리가 헬기의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음 속에서 간신히 들려왔다.
한성규의 말에 시현은 창밖으로 시선을 줬다.
저 멀리 반파된 성남시의 모습과 그 너머에서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이그드라실이 보였다.
“성남에서는 엄청난 나무를 키우고 있는 모양이군요.”
난생 처음 초대형 악마를 목격한 한성규의 경우 얼이 빠져나간 듯 눈빛이 멍했다.
살짝 시선을 아래로 두니 그립던 테크노벨리의 모습이 보였다.
손가락보다 작게 보이는 테크노벨리를 보고 있으니 자연히 생각나는 얼굴이 있었다.
‘정성국…… 진짜 가만 안 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게 지금까지 참가자를 상대로 한 시현의 방침이었다.
이번에도 그 방침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슬슬 착륙해야 할 거 같은데, 적당한 지점이 안 보이네요. 같이 찾아 주시겠습니까?”
한성규는 굉장히 당황해하고 있었다.
두 번의 아포칼립스를 거치며 반파된 성남시에서 헬기가 앉을 만큼 정리된 평지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차하면 먼저 헬기에서 뛰어내려 주변을 청소하는 최악의 경우까지 고려해야 할 정도다.
“알겠습니다. 민서라 씨도 같이 찾아 주시죠.”
시현은 옆에 앉은 민서라에게 말했다.
그러나 민서라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꽉 닫은 눈을 열지 않았다.
“시현 씨,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저 고소공포증이 있던 모양이에요.”
“보면 압니다.”
“그러니까 이번만 부탁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굉장히 간절해 보였다.
애초에 그녀를 건드린 것도 반쯤은 장난이었기에 시현은 군말 없이 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그렇게 한참이나 착륙 지점을 찾기 위해 성남시의 하늘을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
콰앙!
굉음과 함께 폭발이 발생했다.
솟구친 불길과 연기는 제법 높은 고도를 유지하고 있던 헬기에까지 닿았다.
“어어? 어어어!”
다행이도 한성규가 급하게 방향을 튼 까닭에 헬기에 피해가 있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음은 분명하다.
“바, 방금 건 대체 뭐죠?”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시현은 천리안을 사용해 폭발 지점을 확인했다.
한 남자가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기에 조금 기억을 더듬어 보니, 처음 성남시에 도착했을 때 저격으로 시현을 반겨 주던 그 남자였다.
상당히 커다란 저격총을 들고 헐레벌떡 달려가는 남자의 뒤로 양손에 검을 든 여성이 따라붙었다.
표정만 봐도 한 성깔 하겠구나 싶은 인상의 여성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땅이 갈라지고 화염이 솟구쳤다.
비단 전투를 벌이고 있는 건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만큼 화려한 이펙트를 자랑하는 사람이 없었다 뿐이지 도시 곳곳에서 참가자들끼리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세 개의 집단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삼파전이다.
“결국 터졌네.”
시현을 혀를 찼다.
며칠 전에 본 성남의 상황은 그야말로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와도 같았다.
참가자들이 모여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어떻게든 치고 올라갈 상황을 노리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
계기만 있다면 얼마든지 도화선에 불이 붙을 수도 있었던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데 결국 붙어 버리고 만 것이다.
설마 자신이 도화선에 불을 붙인 불씨일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한 시현은 그저 반복해서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최악이네.”
“뭐가요?”
“지금의 상황이요.”
민서라는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채 시현의 중얼거림에 대꾸했다.
“딱히 저들이 싸우건 말건 저희와는 무관한 거 아닌가요? 물론 시현 씨야 랭킹 3위라는 최정상의 위치에 있으니 아무래도 좋으시겠지만, 일단은 경쟁자가 줄어드는 거니까요.”
“표면상으로는 그렇죠.”
“저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거 싫어해요.”
헬기에 탑승한 이후, 처음으로 눈을 뜬 민서라가 시현을 가볍게 노려봤다.
그러다가 시현의 너머로 보이는, 드넓게 펼쳐진 하늘을 보고는 하얗게 질려서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작게 웃은 시현은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
“당장이야 좋을 수도 있죠. 경쟁자가 줄어들고 귀찮게 구는 참가자들이 죽어 나가면 정성국을 처리하는 데도, 정훈을 영입하는 데도 방해는 그만큼 줄어들 테니까요. 하지만 시야를 넓게 보면, 참가자들이 대거 죽어 나가는 건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에요.”
“왜요? 시현 씨가 자신을 적대하는 사람들의 목숨까지 걱정해 주는 성격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건 맞아요. 하지만 저들이 죽을수록 인류의 승리가 멀어지거든요.”
Re write는 악마라는 비현실적 존재가 등장하는 아포칼립스 세상에서의 생존을 목표로 삼고 있는 소설이다.
그러나 단순히 생존을 목표로 삼아 언제까지고 목숨을 연명하기만 해서는 소설의 엔딩을 맞이할 수 없다.
엔딩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 이 지경이 되어 버린 원인을 찾고 그것을 해결해 멸종을 향해 치닫는 인류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구원해야 한다.
마지막 전쟁은 당연히 인류와 악마 및 이단의 싸움이 된다.
그렇기에 아무리 서로 Re write의 승리를 위해 아옹다옹하는 참가자라 해도 마지막 순간에는 아군으로써 전투력이 되어 줄 것이라는 게 시현의 생각이었다.
참가자의 수가 줄어든다는 것은 마지막 전쟁에서 인류의 편이 되어 줄 구원자가 줄어든다는 말이 된다.
설명을 듣고 이해한 민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어요.”
“뭐죠?”
“확실히 참가자들은 다른 구원자에 비해 압도적인 성장력을 보이고 있죠. 그들이 참가해준다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원작보다 수월한 형태로 마지막 전쟁을 끝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참가자가 없었음에도 결국 원작에서 인류는 승리했잖아요? 그렇다면 굳이 저들이 필요할까요?”
그녀의 대답은 그럴싸했다.
그러나 헬기의 고도와 흔들림이 고소공포증을 가진 민서라의 판단력을 흔들어 놓기라도 한 것인지, 사고가 1차원적이었다.
대화를 길게 끌 생각이 없었기에 시현은 정답을 꺼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어떻게 해서 빠르게 성장을 하게 되었는지.”
“그거야 저희와 마찬가지로 원작의 지식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겠죠?”
“맞습니다. 원작에 공개된 방법으로 악마를 사냥하고, 둥지를 공략하고, 세력을 손에 넣고. 그러면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원래 자신이 얻어야 했던 것들을 참가자에 의해 가로챔 당한 구원자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아!”
어지간히 놀랐는지 민서라가 눈을 번쩍 떴다.
그러더니 손바닥으로 시현의 허벅지를 연달아 두드리며 난리를 부렸다.
“세상에…… 그건 생각지도 못했어요. 시현 씨가 한 말이 전부 맞아요. 참가자가 강해질수록 원작에서 활약한 구원자들은 약해질 수밖에 없어요.”
마지막 전쟁에 참가한 구원자들은 하나같이 강력했지만, 그 과정에는 운이 따랐다.
아포칼립스 초기부터 운이 좋아 거저다 싶은 방법으로 악마를 사냥해 각성하거나, 둥지를 공략해 귀한 아이템 혹은 영약을 손에 넣거나, 커다란 세력의 리더가 되어 토큰을 대량으로 벌어들이거나.
그들의 성장에는 배경이 있었다.
하지만 그 배경을 참가자들이 가로채 버렸다.
당연하지만 배경을 토대로 성장한 기존의 구원자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실제 시현이 품은 이나연이나 강소하도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원작만큼의 위용은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본래 그들이 가졌어야 할 성장의 기회를 시현이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두 사람 정도니 그 정도 속도로 걸음마하고 있는 거지, 아니었다면 진즉 도태되었을 것이다.
“저것들도 생각이라는 게 있으면 전쟁까지는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 사달이 나 버렸네요.”
“그렇다면 어떻게든 전쟁을 멈춰야겠네요.”
“그게 가장 좋기는 하죠. 문제는 어떻게 멈추냐는 건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이렇다 할 기가 막힌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의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참가자들이 부른 원군이 하나둘 성남을 향해 모여들고 있는 게 시현의 천리안에 잡혔다.
이대로라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것이다.
‘뭔가 좋은 방법 없나?’
이렇다 할 해결책을 떠올리지 못해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토해 냈을 때였다.
운전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이 무슨 대화를 나누시는지 제가 정확하게 이해는 못하겠습니다만…… 원래 공공의 적이 나타나면 원수끼리도 손을 잡는 법이죠.”
조금이라도 시현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내뱉은 한성규의 한마디.
뭔가 계책이 있어서 꺼낸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일까.
그 순간, 시현의 눈에 보인 것은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초대형 악마.
이그드라실이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