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원작에서 신은 총 네 차례 지상에 강림한다.
지상에서 외신이라 불리는 존재의 봉인이 깨졌을 때마다 한 번씩, 해서 총 네 번.
그때마다 강림하는 신의 외형과 성품은 달랐다.
첫 번째 강림처럼 아이 같은 면모의 신도 있었고, 인류가 생각하는 신처럼 근엄하고 자비로운 존재도 있었다.
반대로 인류를 멸시하고 벌레 보듯 하는 이도 있었고.
공통점이라면 그들은 하나같이 인과율을 들먹이며 외신으로부터 직접 인류를 구하는 데 난색을 표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각자 하나씩, 총 네 개의 증표를 지상에 남겼다.
그리고 그 증표는 한 남자의 품에 모였다.
인류의 구원자 정훈.
원작의 주인공인 그 남자의 품에 말이다.
그 정도로 중요하고 대단한 물건 중 하나가 현재 시현의 수중에 들어왔다.
“본래라면 2년 후 신이 강림해서 직접 남기고 가야 했을 맹세가 왜 둥지의 공략 보상 상자에 들어 있는 걸까요?”
기쁨 이전에 의문이 앞섰다.
시현의 표정은 심각했고, 그건 시현과 의견을 나누는 민서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둥지에 있던 흙투성이의 냉장고 위에 걸터앉은 민서라를 다리를 꼰 채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에요, 시현 씨. 지금까지 원작이 얼마나 뒤틀렸는지 아세요?”
“아마 세는 게 바보 같을 정도겠죠.”
당장 시현만 해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몇 번이고 원작을 뒤틀었다.
원작에서 수많은 네임드 구원자들을 살해한 정해수를 미각성 상태에서 죽였고, 그 수족으로서 연이은 학살로 피의 강을 만든 이나연의 미래를 바꿨다.
그 외에도 원작에서 죽었을 사람을 살리고 살았을 사람을 죽이는 등 시현으로 인해 바뀐 미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문제는 원작을 토대로 미래를 바꾸려 드는 사람이 시현뿐만이 아니라는 거다.
“많은 탈락자가 있었지만, 처음 Re write의 리메이크가 시작될 때 참가자의 수는 총 666명이었잖아요. 그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 행동했을 테니…… 제가 한 번 원작을 뒤틀었을 때 원작은 666번 뒤틀렸다……라고 생각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소름 끼치네요.”
그러나 아직 바뀌지 않은 미래는 얼마든지 남아 있다.
어떻게 해도 인간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내용들의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외신의 봉인이 깨지는 것과 신의 강림.
이것만큼은 아무리 인간이 발악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미래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건 심각한 문제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요? 외신의 봉인이 깨질 대마다 강림하기 귀찮으니 미리 보상에 넣어 뒀다…… 이런 느낌인가?”
“그건 아닐 겁니다.”
시현은 딱 잘라 민서라의 말을 부정했다.
“이 땅에서 외신을 가장 몰아내고 싶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신들이니까요.”
어디까지나 인과율 때문에 하나의 외신이 깨어났을 때 강림할 수 있는 신이 하나뿐이며, 그 신의 힘이 외신에 비해 미약해 직접적으로 싸우지 않았다 뿐이지.
원작에서는 온갖 다양한 묘사로 외신을 향한 신들의 증오와 경멸을 찾아볼 수 있다.
기회만 된다면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외신의 각성을 저지하려 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구슬을 준 거 아닐까요? 구슬의 힘을 이용해 아직 봉인에서 깨어나지 못한 외신들을 혼내 줘라! 이런 느낌?”
“그것도 아닐 겁니다.”
“……시현 씨는 내가 뭔 말만 하면 아니래. 흥!”
민서라는 토라진 듯 뺨을 부풀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게 한없이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민서라의 배려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배려를 웃으며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심리 상태가 복잡했다.
“그게 가능했다면 원작에서도 똑같이 행동했겠죠. 신들이 강림해 맹세를 남기기 위해서는 먼저 외신이 깨어나 인과율에 빈틈이 생겨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그 전제 조건이 없었다, 이거죠?”
“본인들이 말했잖아요. 이 인과율이라는 놈에 허점은 없다고. 그런데 이렇게 떡하니 허점이 나타났단 말이죠.”
그렇게 말한 시현은 슬그머니 댓글창을 열었다.
분명 시끄럽고 떠들기 좋아하는 놈들이 열심히 떠벌리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 와, 오늘은 날씨가 참 좋네요.
― 그러게.
조회수에 비해 댓글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을뿐더러 누가 봐도 명백하다 싶을 만큼 내용도 형편없었다.
의도적으로 이쪽 방면의 회화를 피하려는 게 분명했다.
시현은 작게 혀를 찼다.
“쓸모없기는.”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단서도 부족한 마당에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도 없으니, 슬슬 올라가도록 하죠.”
생각 같아서는 아무리 시간을 들이더라도 답을 꼭 내놓고 싶었다.
하지만 시현의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수룡의 둥지를 토벌한다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여기까지 온 거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할애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테크노벨리와 정훈의 문제를 해결하려다 정성국에 의해 강제로 날려져 온 상황.
조금이라도 빠르게 성남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시현 씨! 수고 많으셨습니다.”
섬의 생존자들을 대표해 김상균이 나서서 시현에게 허리를 숙였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멀리 강가에 서있는 생존자들도 환호를 지르거나 시현을 향해 손을 흔드는 등 그의 행동에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적당히 화답해 준 시현은 비행 권능을 사용해 공중에 떠 있는 김상균에게 손짓했다.
“김상균 씨, 약속은 지켰습니다. 정화 구역으로 지정되었으니, 이 근방에 자리를 잡으면 생존이 보다 쉬워질 겁니다.”
“하지만 이 근방에는 방사능이…… 물이 빠졌다 해서 방사능이 아예 사라지거나 그런 건 아니잖아요. 아닌가? 저도 전문가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괜히 불안을 남겨 두고 싶지는 않아서요.”
이럴 때는 참가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정보 차이가 명확하게 느껴졌다.
시현은 웃으며 그의 오해를 정정해 주었다.
“조금 전에 퍼진 백색의 빛, 거기에 정화의 힘이 담겨 있습니다. 적어도 빛이 닿는 구역 내에서 오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 그런가요?”
나름 호의로 베푼 정보였으나, 김상균은 쉬이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여기서 제발 자신의 말을 믿어 달라고 사정할 이유도 없었기에 시현은 딱히 추가 발언은 하지 않았다.
믿고 안 믿고는 김상균 나름이다.
“이제 김상균 씨가 약속을 지킬 차례입니다.”
“물론이죠. 건너편 강가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김상균의 요청대로 시현은 민서라와 함께 강둑으로 올라갔다.
멍하니 김상균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그와 함께 중년의 남자가 헐떡이며 물이 사라진 강을 등산하듯 올라왔다.
“아이고, 숨차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남자는 어느 정도 호흡을 가다듬고는 환하게 웃었다.
“이거 인사드릴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한성규라 합니다. 아포칼립스 이전에는 공군 소속이었으며 헬기 조종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윤시현입니다. 목적지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그 전에 헬기가 몇 개월 동안 정비하지 않은 헬기가 장거리 비행을 버텨 낼 수 있을지 확인해야겠지만 말이죠.”
한성규는 굽어 있던 허리를 펴며 유쾌하게 웃었다.
피죽만 남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일단 군부대까지 안내해 드릴게요. 도중에 위험한 악마가 많으니 주의해 주세요.”
김상균은 앞장서서 세 사람을 안내했다.
그가 말한 군부대의 위치는 섬에서부터 그리 멀지 않았다.
군부대가 자리한 산 위에 레이더 기지가 있고,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한 헬기장에 투박하게 생긴 군용 헬기가 놓여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문제는 없어 보였지만,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이 딱 봐도 오래 방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이고, 이거 정비하고 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겠는데요?”
“정비도 할 줄 아시는 겁니까?”
“제가 헬기를 좋아해서요. 자격증 딸 때 정비도 같이 공부했습니다. 이쪽 자격증은 없지만요. 으하하하!”
한성규는 또다시 목청껏 웃었다.
그를 따라 시현도 웃었다.
조종사 자격증은 있지만 정비 능력은 없으면 어떻게 하나, 그럴 경우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는 헬기를 타고 가야 하나, 다른 이동수단을 찾아야 하나.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정비가 가능하다는 말은 가뭄의 단비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현은 헬기의 정비에 대해 잘 모른다.
따라서 최악의 경우에는 이 근방에서 하루 정도는 꼬박 새울 각오까지 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정비는 금방 끝났다.
“아무래도 근방에 은인과 같은 생각을 한 있던 사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며칠 전에 대충이나마 손을 본 흔적이 있어요. 안타깝게도 죽은 모양이지만요.”
미간을 찌푸린 한성규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정비복을 입고 있는 누군가의 오른팔과 왼다리, 그리고 누가 봐도 치사량이다 싶은 만큼의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누가 봐도 이 지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헬기를 정비하다가 악마에게 습격을 당한 사람의 흔적이다.
“그러면 바로 출발할 수 있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한성규가 먼저 운전석에 올라탔다.
시현과 민서라도 그 뒤를 따랐다.
기대했던 것보다 헬기 뒷좌석은 좁고 불편했지만, 난생 처음 헬기를 타는 거라 그런지 괜히 가슴이 뛰었다.
“저어…… 그런데요.”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헬기장까지 나온 김상균이 불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늘에도 악마는 있겠죠?”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랑 민서라 씨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헬기를 보호할 거니까요. 최악의 경우에도 한성규 씨는 보호하겠습니다.”
“아니요. 수룡의 둥지를 쓸어버린 두 분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닌데요. 돌아올 때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한성규는 어디까지나 이동 담당이다.
두 사람을 목적지까지 데려다 준 후에는 한성규 혼자 섬까지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성규 혼자 하는 비행은 온갖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런 거라면 방법이 있습니다.”
시현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타 세력과의 교류를 위해 소형화시켜 차량에 부착시킬 계획이던 수호나무 결계.
그것을 헬기에도 달아 놓을 생각이었다.
“자자, 뭐 하고 계십니까? 빨리 탑승하지 않으면 두고 갈 겁니다.”
지금 자신의 안전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성규는 헬기 창문을 두드리며 보챘다.
“그러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시현 씨, 정말 감사드립니다. 언제 한 번 꼭 서울에 들러서 오늘 받은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인사는 아까 전부 끝난 거 아니었나요? 감사도 너무 과하면 불편한 법입니다.”
“그런가요? 하하.”
김상균의 멋쩍은 미소로 두 사람은 대화를 끝마쳤다.
김상균은 헬기가 지상에서 떠나 먼 곳의 하늘로 향하는 순간까지도 쭉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 *
콰앙!
요란한 소음이 해가 중천에 떴음을 알렸다.
“이게 무슨 일이래?”
늘어지게 하품을 한 천소해는 눈곱 낀 눈을 비비며 침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분명 전날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던 커다란 크레이터였다.
검게 탄 자국이 남아 있는 크레이터에서는 상당한 열기와 함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으며, 그 중앙부에는 두 명의 참가자가 드러누워 끙끙거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죽은 것 같지는 않지만, 보아하니 툭 치면 깨질 만큼 외피의 상태가 간당간당하다.
“이런 망할!”
“이 미친 자식들. 진짜 해보자는 건가?”
곳곳에서 무장을 마친 참가자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등장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상황이 꽤나 심각하다고 판단한 천소해가 옆을 지나가던 중년 남성을 붙잡았다.
“아저씨, 이게 무슨 난리래?”
“천소해? 그 꼬라지는 대체 뭐냐? 설마 지금까지 자다 일어난 거냐?”
“그런데?”
“너는……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습격이 있었다.”
“습격?”
“곧 놈들이 들이닥칠 거야.”
“놈들이라니…… 설마 그 새끼들이 미쳐 가지고 전쟁이라도 하자고 달려든 거야?”
“그 설마다.”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를 알아차린 천소해가 사납게 이를 갈았다.
저 멀리.
전방에 자리한 건물 인근에 낯선 참가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 수가 족히 수십에 이른다.
그들이 바로 습격자의 정체이리라.
잠을 자는 동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고무줄로 대충 묶어 올린 그녀는 허리춤에서 두 자루의 검을 뽑아 양손에 쥐었다.
“누구야? 하운드의 미친개야? 아니면 등대의 충견이야?”
“미친 쪽.”
“하긴,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벌일 리가 없지.”
이가 갈렸다.
그녀가 교단의 명성을 팔아먹으면서까지 근방의 생존자들을 긁어모은 것은 어디까지나 하운드를 중심으로 한 연합과 등대를 중심으로 한 연합, 이제는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버린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덩치가 작으면 잡아먹힌다.
반대로 너무 크면 위기를 느낀 다른 두 세력이 힘을 합할 가능성이 있다.
그 절묘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천소해는 노력했고, 가까스로 서로를 견제하느라 전쟁이 벌어지지 않을 수준까지 연합의 덩치를 부풀렸다.
그녀가 노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원작의 주인공, 정훈.
불필요하고 많은 희생을 강요하는 전쟁은 가능하면 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각이라는 게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하운드는 천소해가 있는 연합을 향해 이를 들이민 것이다.
“기왕이면 전쟁은 피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도망이라도 치려고?”
“그럴 리가 있나.”
조롱하는 듯한 참가자의 말에 천소해는 코웃음 쳤다.
“감히 누구한테 싸움을 걸었는지, 내가 누구인지 철저하게 교육시켜 줘야지. 멍청한 광견들에게 최상위 랭커가 어떤 존재인지,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겠어.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사나운 얼굴을 한 채 전장으로 향하는 천소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참가자는 은근슬쩍 참가자 랭킹을 확인했다.
랭킹 23위.
천소해.
그녀는 단언컨대 여기 모인 참가자 중 가장 강력한 구원자일 것이다.
‘그나저나 우리와 하운드 쪽이 맞부딪쳤으니, 등대 쪽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여 주려나.’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