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캬아! 캬아악!]
[크아아아!]
수룡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름 몸의 반동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나, 하품이 날 정도로 느려 터졌다.
수룡이 가진 지느러미는 육지를 이동하는 데 그리 적합하지 않다.
심지어 물기를 가득 머금은 진흙 바닥에서의 이동속도는 안쓰러움에 눈물이 나올 정도다.
“이 정도면 거의 일방적으로 두드릴 수 있겠네요.”
사실 2레벨 구원자인 민서라에게 중형 악마, 그것도 돌연변이는 굉장히 까다로운 적이다.
정면 승부로는 승산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그러나 아무리 격의 차이가 있다 해도 상대방의 손발을 다 잘라 놓고 시작하는 전투 아닌가.
승산은 차고 넘친다.
“간만에 경험치를 대량으로 벌 수 있겠네요. 어쩌면 이번 기회에 3레벨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민서라도 참가자인 이상 강해지는 것에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저도 도와드릴게요.”
두 사람에게만 맡겨 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 김상균도 밑바닥으로 내려왔다.
나름 철저하게 무장을 한 것 같지만,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권능에 오랫동안 제대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 삐쩍 마른 김상균이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손발을 잘라 놨다지만, 날카로운 이빨은 남아 있는 상황.
사소한 실수로 김상균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
“괜찮습니다. 저희 둘로도 충분히 가능하니 김상균 씨는 쉬고 계세요.”
“하지만…….”
“수룡은 중형 악마입니다. 수도 많죠. 아무리 적들을 약화시켜 놨다지만 방심할 수 없는 상대입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터졌을 때 저희 두 사람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지만……. 김상균 씨를 돕지는 못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괜히 고집을 부렸네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있나요.”
슬그머니 웃는 것으로 김상균이 느끼고 있을 자책감을 덜어 준 시현은 핏빛 칼날을 뽑았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첫 번째 수룡이 지척까지 다가온 것이다.
까앙!
휘두른 검은 수룡의 외피에 막혔다.
자신의 외피와 비늘이 단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수룡은 공격을 방어하거나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날카로운 이를 들이밀며 전진할 뿐이었다.
“마침 잘됐어. 그렇지 않아도 4레벨 구원자가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고 싶었는데.”
시현이 4레벨 구원자가 된 것은 한참 전의 일이다.
그러나 그 후로 딱히 힘을 시험해 볼 기회가 없어 스스로도 어느 정도로 강해졌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침 딱 좋은 샌드백이 눈앞에 나타났다.
힘을 시험해 보지 않고서야 버틸 재간이 없었다.
“민서라 씨, 악마의 성향은 무조건적으로 악이던가요?”
“글쎄요. 성향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은 없어서. 꼭 필요한 정보인가요?”
“아니요. 일단 베어 보면 알겠죠.”
시현은 검에 처형의 권능을 담았다.
넘실거리는 검은색의 기류가 이전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검을 휘두르자, 길게 꼬리가 남았다.
검은 외피에 가로막혔다.
파지지직!
그 순간, 흑색의 강한 전류가 일더니 외피가 찢어져 버렸다.
핏빛 칼날은 쭉쭉 뻗어나가 수룡의 몸통을 크게 베었다.
[오오오오!]
난생 처음 고통이란 걸 겪게 된 수룡은 요란하게 몸부림 쳤다.
그러나 아직 수룡이 겪어야 할 고통은 끝이 아니었다.
푸확!
수룡의 상처가 대뜸 벌어지며 대량의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기존의 처형이었다면 여기서 피해가 그쳤을 테지만, 4레벨이 되며 강화된 권능의 힘은 여기서 또다시 추가 피해를 가했다.
상처에서 한 차례 검은 기류가 흐르더니, 기존의 상처와 동일한 크기의 상처가 생겨나며 또 한 차례 피가 튀었다.
“한 번의 공격으로 세 번의 대미지인가…… 마음에 드네.”
권능의 상향을 체감한 시현은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수룡의 주변을 돌며 마구잡이로 칼질했다.
물 밖에 건져진 수룡은 머리를 가누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돌려 시현을 물어뜯으려 했으나, 이미 시현이 지나쳐 간 자리의 흙바닥이나 파먹는 게 전부였다.
[우우우우!]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던 수룡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포효를 내질렀다.
그러자 강 전체에 퍼져 있던 수룡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동료의 위기에 놀라 헐레벌떡 달려온 수룡들은 시현을 물어뜯으려 했다.
만약 물속이었다면 수룡들의 장난감이 되어 일방적으로 당했겠지만, 시현은 어려움 없이 수룡들의 공격을 회피했다.
오히려 물이 없어 Z축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수룡들이 서로를 방해하는 불상사까지 발생했다.
“이거, 잘하면 한 번에 일망타진할 수도 있겠는데.”
야심찬 계획을 세운 시현은 본격적으로 수룡들 사이를 누비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 갔다.
그렇게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수룡들이 한 지점에 모였을 때, 시현은 활짝 웃었다.
“역시 사냥의 묘미는 누가 뭐라 해도 몰이사냥이지.”
시현의 손끝에서 시작된 폭풍은 수룡의 무리를 덮쳤다.
매서운 기세의 폭풍은 수룡들의 외피와 살갗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폭풍이 그쳤을 때 대부분의 수룡들은 엄청난 상처를 입었으며, 일부는 아예 목숨이 끊어지기까지 했다.
남은 건 싸울 힘을 죄다 소진해 버린 수룡의 목을 찬찬히 베어 주는 것뿐이다.
[크르르르…….]
쿵!
낮은 울음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시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뒤에 무언가가 있음을 깨닫고 몸을 던졌다.
진흙바닥을 뒹구는 시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불과 1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서있던 자리를 내리치는 거대한 수룡이었다.
콰앙!
바닥이 깊게 패이며 진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런……!”
시현은 첫 번째 공격을 피하느라 자세가 흐트러진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몸을 꺾어 진흙 덩어리를 피했다.
말이 좋아 진흙 덩어리지 그 크기는 사람을 덮고도 남을 정도다.
공격을 허용당한다면 진흙 더미에 파묻혀 기동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 것이다.
시현의 앞에 나타난 수룡은 여타 수룡들과 덩치부터가 궤를 달리했다.
돌연변이이기 때문에 보통의 수룡보다 1.5배는 커다란 붉은 비늘의 수룡보다 2배는 더 거대한 덩치에서 우러나는 압박감이 상당했다.
뿐만 아니다.
뱀처럼 긴 몸체에 보다 날렵한 외형을 가진 수룡은 지느러미가 아니라 짤막하긴 해도 손발을 가지고 있었다.
“여왕? 내 생각과는 생김새가 조금 다른데.”
수룡의 여왕이니 당연히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손톱 사이사이에 물갈퀴가 있다 뿐이지, 여왕은 수륙양용이 가능한 생김새를 갖고 있었다.
이래서야 힘들게 노력과 시간을 들여 물을 빼낸 보람이 없지 않은가.
[캬아아아!]
내지르는 외침에 대기가 격하게 떨렸다.
분노한 여왕은 시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발이 있기 때문인지 여타 수룡과는 속도가 몇 배는 더 빠르다.
가까스로 공격을 회피한 시현은 여왕의 옆구리를 그었다.
외피에 추가 데미지를 입히는 처형의 권능으로도 여왕의 외피를 단번에 깨뜨리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시현은 연거푸 여왕의 외피를 깎아내기 위해 검을 내리쳤다.
물론 여왕이라 해서 가만히 당하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길게 찢어진 여왕의 입에서 물줄기가 토해졌다.
시현은 몸을 던져 공격을 회피했지만, 강한 수압 때문에 튀어 오른 진흙 덩어리까지는 회피하지 못했다.
“젠장!”
시현은 힘차게 왼손을 휘둘러 들러붙은 진흙 덩어리를 털어 내려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깨끗하게 씻어낼 수 없었다.
진흙이 들러붙은 만큼 시현의 몸은 무거워졌고, 진흙의 무게에 비례해 속도는 느려졌다.
진흙을 이용한 공격이 제법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건지 여왕은 본격적으로 진흙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손, 발, 꼬리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바닥을 내리쳐 진흙이 사방팔방 튀게 만들었으며, 아예 꼬리를 이용해 대량의 진흙을 퍼다 던지기까지 했다.
피하고, 또 피했지만 결국 한두 번 공격을 허용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몸은 더욱 무거워졌고, 그에 따라 허용하는 공격의 횟수도 많아졌다.
무거운 몸을 움직이려니 체력의 소모도 극심했다.
“…….”
숨을 헐떡이던 시현은 매섭게 여왕을 노려봤다.
이대로는 여왕을 토벌할 수 없다.
도박을 하건 뭘 하건 지금의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
[…….]
여왕은 시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파충류형 악마이기에 표정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왕은 입을 벌려 자신이 가진 최강의 무기, 엄청난 압력을 자랑하는 물줄기를 토해냈다.
시현은 물줄기를 피하지 않았다.
콰아아아!
물줄기는 시현 뿐 아니라 그가 서있던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으아아악!”
“시, 시현 님! 시현 님이 당했다!”
멀리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섬의 주민들이 비명을 질렀다.
발을 동동 구르거나 머리를 감싸고 비명을 지르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절규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4레벨 구원자인 시현의 외피는 상당히 튼튼하다는 것이다.
촤악!
물줄기를 뚫고 시현이 빠져나왔다.
“고맙다.”
여왕을 향해 감사인사를 전하는 시현은 웃고 있었다.
여왕이 토해낸 물줄기는 시현의 외피를 찢지 못했다.
그러나 시현의 움직임을 속박하고 있던 진흙을 씻어내기에는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존의 속도를 되찾은 시현은 빠르게 내달려 여왕을 향해 폭풍을 사용했다.
폭풍은 여왕의 외피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캬아아아!]
여왕은 다시 한 번 진흙을 이용해 시현의 속도를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시현이 여왕에게 도달했고, 가슴 한복판에 검을 찔러 넣었다.
검에 의한 상처가 한 번, 그 상처가 크게 벌어지며 한 번, 검은 기류가 만든 상처까지 총 세 번 피가 튀었다.
한 순간 대량의 피를 잃은 여왕은 비틀거렸으나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시현은 여왕의 상처에 손을 얹었다.
“이것도 버텨 보던가. 폭풍.”
콰아아아!
폭풍은 여왕의 상처를 비집고 들어가 내부를 마구 헤집어 놓았다.
제아무리 여왕이 단단한 비늘을 가졌다 한들 내장까지 단단한 것은 아니다.
[쿠오오오오!]
여왕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악마의 특징이라 하면 바퀴벌레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끈질긴 생명력이다.
여왕은 내장이 죄다 끊어지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같이 죽자는 식으로 시현을 향해 물줄기를 토했다.
이번에 적중당하면, 외피는 고사하고 시현의 나약한 육신도 관통당하고 말 것이다.
“일방통행.”
시현은 마지막 정신력을 쥐어 짜내 일방통행을 사용했다.
여왕이 토해 낸 물줄기는 전부 반투명한 막에 가로막혔고, 최후의 발악이 허무하게 막히는 걸 확인한 여왕은 원통함에 눈을 감았다.
“허억…… 허억…….”
시현은 거칠게 숨을 토했다.
수룡이 토해 낸 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가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폭풍과 일방통행.
그렇지 않아도 소모가 큰 권능인데, 시현은 모방의 패널티로 인해 추가 소모까지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총 네 번의 권능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시현은 살짝 두통을 느꼈다뿐이지 구토를 하며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이 모든 게 성장의 증거라 생각하니, 괴로운 와중에도 미소가 번졌다.
“다 끝나셨어요?”
민서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수많은 수룡의 시체 위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막타 미안해요. 하지만 가만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쩔 수 없이.”
시현이 거의 다 잡아 놓은 사냥감의 마지막 숨통만 끊었으면서 대부분의 경험치를 가져간 게 마음에 걸렸는지 그녀는 귀엽게 웃으며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민서라가 아니었다면 여왕뿐 아니라 다른 수룡들까지 상대해야 했을 것이다.
그녀에게 감사하면 감사했지, 탓을 할 처지는 아니었다.
“레벨은 어떻게 됐습니까?”
“저도 이제 3레벨 구원자예요. 다 시현 씨 덕분이죠.”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민서라의 레벨업을 축하하고 있으려니, 수룡들의 시체가 검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아앗!”
수룡의 시체 위에 서 있던 민서라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수북하게 쌓인 검은 가루 안으로 곤두박질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가루를 뒤집어썼을 민서라를 놀려 주기 위해 그 사이를 파헤치던 시현의 손에 무언가가 걸렸다.
“이게 뭐지?”
시현은 확인을 위해 검은 가루의 안에서 손에 걸린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무언가의 정체를 확인한 시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드, 드롭아이템!”
태양을 받아 반짝이는 그것의 정체는 수룡의 비늘, 이른바 드롭 아이템이었다.
구울의 팔 이후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드롭 아이템이었기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러고 보니 돌연변이는 드롭 아이템을 토해 낼 확률이 평범한 악마보다 한참은 높았지.”
“기쁘신 건 알겠는데, 제 걱정도 좀 해 주세요.”
검은 가루 속에서 자력으로 빠져나온 민서라가 기침을 하며 울상을 지었다.
멋쩍음에 그녀의 옷에 달라붙은 검은 가루를 털어 주던 시현은 다시 한번 기함했다.
“이게 대체…….”
민서라의 긴 머리에 붉은색의 비늘 하나가 엉겨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드롭 아이템이었다.
당황한 시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검은 가루의 산을 응시했다.
바람이 불어 천천히 가루가 사라지고, 그 안에서 반짝이는 것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시현은 이날 환희의 감정이 한계치를 넘어가면 넋이 나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대체 뭘 본 거지?”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