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시현과 달리 아직 2레벨 구원자인 민서라에게 세 번의 도약으로 강을 건너는 건 불가능한 묘기였다.
조금 무리를 한다면 건널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김상균을 도와 섬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로 한 이상 굳이 무리를 해가며 민서라가 강을 건널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조심해 주세요. 저야 항상 하늘을 날아다니니 문제없지만, 이 근처는 식물형 악마가 많아서 굉장히 위험하거든요.”
김상균은 엄포를 놨다.
식물형 악마가 얼마나 까다로운지는 인천의 검은 수해를 통해 충분히 경험했다.
시현은 제대로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하지만 눈으로 경계하는 것은 그리 효율이 좋지 않았다.
고고고.
“잠시만요. 방금 땅에서 진동이 느껴지지 않았나요?”
“네?”
멍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는 김상균의 다리는 대지로부터 3미터 정도는 떨어져 있었다.
“……아니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멍청한 질문이었다고 생각하며, 시현은 잠시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고고고.
착각이 아니었다.
아주 미세하게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시현이 그 자리에 멈춰 서면 진동 또한 멈추고 만다.
누군가가 악질적인 장난이라도 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
시현은 차분하게 주변을 살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듬성듬성 자란 나무들뿐이다.
그 상태에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이번에는 땅이 진동하지 않았다.
“착각이었나?”
영 찝찝한 기분을 억누르지 못하며 고개를 정면으로 돌린 시현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또다시 땅이 울렸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시현은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진동의 원인을 발견했다.
“이야…… 숲이 움직이고 있네?”
경이롭게도 조금 전 눈에 담은 나무들이 시현을 향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만약 시현이 미약한 진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저 나무인 척 하고 있는 악마들에게 기습을 허용하고 말았을 것이다.
‘베어 버릴까?’
정확한 종류는 알 수 없었으나, 덩치로 보아 소형 악마로 추측됐다.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정리할 수 있는 상대이지만, 생각보다 수가 너무 많다.
무엇보다 사이사이에 악마가 아닌 진짜 나무도 섞여 있었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까지 하려면 더욱 많은 시간이 소요될 터.
그렇지 않아도 수룡의 둥지를 처리하느라 시간이 지연될 것을 생각하면 여기서 고민하고 있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김상균 씨. 목적지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죠?”
“강물을 따라 가면 10분 정도 걸려요. 물론 제 비행속도를 기준으로 삼은 거니 강줄기의 곡선까지 계산하면 15분 정도 걸리려나?”
“그러면 목적지에서 뵙도록 하죠.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고도를 높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시현은 땅을 박찼다.
“어어? 시, 시현 씨?”
당황하는 김상균의 모습이 빠르게 멀어졌다.
그리고.
고고고고고.
땅울림이 조금 전과 비교해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정도로 심해졌다.
천리안을 통해 슬쩍 확인해 본 결과, 나무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시현의 뒤를 쫓고 있었다.
“으아아악! 나, 나무가…… 나무가……!”
김상균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고도를 높였다.
나무들은 빠르게 시현을 쫓았으나, 그보다 시현의 전력질주가 배는 빨랐다.
결국 시현은 어렵지 않게 나무들을 따돌리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방유라 씨가 말한 그 호수인가?”
호흡을 고르는 시현의 눈앞에는 굉장히 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넓이도 넓이지만, 깊이가 상당해 보였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고기들이 안쪽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그리고 호수의 중심부.
그곳에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아 보이는 원자력발전소가 반쯤 물에 잠긴 채 자리하고 있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김상균을 기다릴 겸 멍하니 호수를 구경하던 시현은 이름 모를 물고기의 뒤를 쫓는 무언가를 목격했다.
커다란 물방개처럼 생긴 악마였다.
“저것도 돌연변이네.”
이쯤 되면 방사능이 악마의 돌연변이 탄생률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는 게 증명된 거나 다름없다.
“이 물을 수룡의 여왕이 마셨기 때문에 돌연변이를 낳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다른 여왕종이 이 물을 마시고 돌연변이가 득실거리는 둥지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거잖아.”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당장 코앞의 미래가 아니라 수개월, 수년 단위의 미래를 생각해 보면 이 호수의 존재는 인류에게 있어 커다란 위험이자 해악이다.
“시현 씨……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그보다 무슨 사람이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 거예요?”
비행능력을 지녔음에도 한참이나 늦게 도착한 김상균이 시현의 옆에 착륙했다.
여기까지 오며 상당한 정신력을 소모한 게 원인인지, 움직이는 숲에 놀라서 그런 건지 김상균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조금 힘들기는 하네요. 하지만 작전에는 지장 없어요.”
“그렇다면 조금 더 걷도록 하죠.”
“네? 그게 무슨…….”
시현의 돌발행위에 김상균은 굉장히 당황해했다.
작전을 위해서는 이곳에 새로운 물길을 만들고 기존의 물길은 틀어막아야 한다.
그래야 섬을 둘러싸는 강에서 물이 빠질 테고, 수룡의 둥지를 처리할 수 있다.
그런데 시현은 무언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호수 주위를 걸으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야?’
당장이라도 그를 붙잡아 호기심을 충족하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시현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김상균은 말없이 시현의 뒤를 따랐다.
그러기를 약 10여 분.
“찾았다.”
시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호수의 규모는 굉장히 거대하다.
하지만 제아무리 거대한 호수라도 그만한 넓이에 그만한 규모를 가진 강을 유지하려면, 또 다른 수원지로부터 끊임없이 물을 공급받아야 한다.
그러나 방유라가 그려 준 지도에 수원지는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분명 하늘에서는 파악할 수 없는 장소에 수원지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시현은 주로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장소를 집중적으로 탐색했고 그 결과, 대량의 지하수가 쏟아져 나오는 커다란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물길을 돌릴 수만 있다면, 호수의 오염까지 동시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노력을 들여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으니 굳이 안 할 이유가 없다.
“이런 곳에 수원지가 있었군요. 제가 겁이 많아서 땅에는 발을 잘 안 붙이다 보니까 그런 것도 몰랐네요.”
“이 물길을 돌리도록 하죠. 그전에 말씀하신 강은 어디에 있죠?”
“안내해 드릴게요.”
정신력을 아끼기 위해 김상균은 대지를 걸었다.
김상균이 말한 것처럼 호수에서 딱 500미터 되는 지점에 한 줄기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수원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강물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폭과 깊이를 가졌으며, 물 안쪽에 보이는 소형 악마에게서 돌연변이의 낌새는 없었다.
“그러면 먼저 물길을 뚫도록 하겠습니다.”
수원지로 복귀한 시현은 강물이 역류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각도를 조절한 후 권능을 발현했다.
“폭풍.”
무심한 듯 내뱉은 짧은 명령어 한 마디.
그러나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굉음을 동반하는 매서운 칼바람이 정면의 대지를 찢어발겼다.
말랑말랑한 흙바닥은 깊게 패였고 무성하게 자라난 나무들은 몸통이 뚝 잘리거나 뿌리째 뽑혀 팽개쳐졌다.
“으아아아악!”
바로 옆에서 폭풍의 위력을 간접적으로 체험해야 했던 김상균은 비명을 질렀다.
아주 조금이지만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마음의 준비라도 하게 미리 말씀 좀 해 주시지. 세상에는 그런 무시무시한 권능도 있구나…….”
“그보다 이것 좀 보세요.”
시현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물길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혹시 몰라 천리안으로 확인해 본 결과 시현의 폭풍은 훌륭하게 목표지점까지의 길을 완성시켰다.
수원지에서 쏟아져 나온 물은 기존의 물길과 시현이 폭풍을 통해 만들어 놓은 새로운 물길, 이렇게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이제 기존의 물길을 막는다면, 모든 강물은 시현이 만든 새로운 물길을 통해 방사능에 오염되는 일 없이 바다로 흘러나갈 것이다.
“이제 김상균 씨 차례입니다.”
“알겠습니다.”
김상균은 마치 전쟁터에라도 나가는 사람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강물을 막을 건지 못 들었네.’
시현이 물길을 뚫는 방법을 사전에 고지하지 않은 것처럼 김상균 역시 어떻게 강물을 막을 건지 알려 주지 않았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니까 시현 씨는 최대한 멀리 떨어져 계세요.”
“위험하다고요?”
“네. 시현 씨가 강한 건 조금 전에 충분히 두 눈으로 확인했지만, 그래도 위험해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시현은 김상균의 말대로 수원지로부터 최대한 먼 곳에 자리를 잡았다.
김상균의 권능은 비행.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위험하다고 할 만한 결과를 내놓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도대체 그가 위험하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 지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어차피 천리안이 있었기에 김상균이 무엇을 하는지 파악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시현은 눈을 감고 천리안을 발동시켰다.
긴장을 풀기 위해서인지 몇 번이고 심호흡을 반복하는 김상균의 모습이 보인다.
각오를 다진 건지 김상균은 어디론가 이동을 시작했다.
그가 향하는 곳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설마 저걸 이용해서 물길을 막을 생각인가?”
사실 말이 좋아서 바위지, 그 크기는 어지간한 언덕만큼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다.
직경만 해도 50여 미터는 되어 보였으니, 물길을 틀어막고도 남을 것이다.
문제는 저걸 어떻게 옮기냐는 거다.
현대의 과학력을 총동원해도 저걸 멀쩡한 상태로 옮기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시현의 궁금증과는 무관하게 김상균은 바위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우어어어어!]
“크윽……!”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현의 귀에까지 닿는 괴성이 우레와도 같이 울려 퍼졌다.
급하게 귀를 틀어막은 시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바위가, 정확하게는 영락없이 바위라고 생각했던 무언가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웅크린 몸을 편 그것은 온 몸이 바위로 구성되어 있는 거대한 도마뱀이었다.
짧은 꼬리에 비해 팔다리는 길며 얼굴은 넓적하고 둥근 형태다.
“바위 도마뱀? 동해 어디엔가 있다고만 묘사되어 있는 대형 악마였는데 이런 곳에 있었던 건가…….”
거대한 적의 등장에 시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인근에 있던 나무 형태의 악마들이 발작하듯 뿌리를 이용해 달아나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바위 도마뱀을 깨운 김상균 역시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신체가 돌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런지 바위 도마뱀은 느렸다.
그러나 덩치가 덩치인지라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왔다.
“본 적은 없지만 골렘이 있다면 딱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네.”
대충 김상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보나마나 저 바위 도마뱀의 습성을 이용해 물길을 틀어막으려는 것이다.
나름 목숨을 건 도전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비행을 사용한 김상균은 필사적으로 달리는 와중에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바위 도마뱀이 자신을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이도 김상균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바위 도마뱀이 김상균의 뒤를 쫓다가 목적지인 강물로 들어간 것이다.
놀랍게도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갔음에도 강물은 바위 도마뱀의 허리까지밖에 닿지 않았다.
그를 확인한 김상균은 최고속도로 고도를 높였다.
자신의 머리 위로 점점 올라가는 김상균을 잡기 위해 바위 도마뱀은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은 닿지 않았고,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가버린 사냥감에 흥미를 잃은 바위 도마뱀은 새로운 사냥감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일대의 생명체들은 바위 도마뱀의 존재감에 놀라 달아난지 오래.
바위 도마뱀은 처음의 자세 그대로 몸을 웅크리고 말더니 잠에 빠졌다.
물길은 성공적으로 막혔고, 흐르던 물은 시현이 파놓은 새로운 물길을 타고 빠져나갔다.
“흐아……. 죽는 줄 알았다.”
바위 도마뱀의 감지범위를 피해 멀리 돌아온 김상균의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급격한 체력소모로 지쳤다기보다는 생사의 경계에 걸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느라 기운이 다 빠진 것이다.
“그래도 성공했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김상균은 굉장히 기뻐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로써 위기에 처한 섬의 주민들을 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호수로 다가갔다.
물길을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그만큼 호수의 크기가 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호수는 마를 것이고, 호수에서 물을 공급받는 수룡의 둥지는 바짝 마르고 말 것이다.
“지금 속도라면 대충 하루나 이틀 정도 걸릴 것 같네요.”
시현은 물이 빠지는 속도를 어림잡아 계산했다.
그리고 시현의 예상대로 약 27시간가량이 지났을 때, 호수는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다.
당연하지만 호수로부터 물을 공급받던 강도 질퍽한 진흙바닥을 드러냈다.
[크아아아아!]
돌연변이 수룡들은 진흙바닥을 엉금엉금 기며 사납게 포효했다.
그러나 그 포효가 그리 위협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수룡의 무기라 하면 물속에서 선보이는 엄청난 속도인데, 지금의 수룡은 모래사장에 올라온 거북이보다도 느려 터졌으니까.
“와…… 진짜로 강물을 전부 빼 버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이게 되네요?”
민서라는 감탄했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다.
강물이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섬의 주민들은 강가로 몰려나와 눈물을 흘렸다.
이제 곧 이 감옥과도 같은 섬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든 것이다.
“드디어 여길 벗어날 수 있어…….”
“꼼짝없이 여기서 생을 마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다 시현 씨 덕분이에요.”
“시현이 형님! 최고로 잘 생겼다! 우리의 영웅! 우주 최강 꽃미남!”
생존자들의 성향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응원을 받으며, 시현은 민서라와 함께 강의 밑바닥.
질척질척한 진흙 바닥에 내려섰다.
[크르르르…….]
마치 이 사태의 원흉이 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수룡은 톱니를 닮은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