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물가에 앉은 시현은 물끄러미 흐르는 강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몸이 젖어서 그런지 으스스함에 몸이 떨렸다.
눈앞에 흐르는 강의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폭도 굉장히 넓고 흐름도 굉장히 거세다.
비정상적으로 낮은 수온이나 짙은 물색은 문제도 아니라 여겨질 정도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언제 나오실 겁니까? 숨도 안 막혀요?”
흠뻑 젖은 머리를 털어 내며 말을 내뱉자, 수면에 작은 파동이 생겼다.
그러더니 물귀신마냥 머리를 축 늘어뜨린 민서라가 올라왔다.
“뭐야? 시현 씨를 위해 숭고한 희생을 택한 저를 떠올리며 오열이라도 하실 줄 알았는데. 되게 멀쩡하네요.”
“수면에 떨어질 때 충격은 제가 다 받아서 민서라 씨의 외피는 멀쩡하잖아요. 괜찮을 거 뻔히 아는데, 오열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음…… ‘시현 씨가 나를 이렇게나 생각해 주는구나’하고 제 마음이 굉장히 기뻐하지 않을까요?”
“흐어엉.”
“됐거든요.”
새침하게 눈을 흘긴 민서라는 긴 머리카락을 둘둘 말아 물기를 짜내며 시현의 곁에 앉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말없이 흐르는 강만 응시했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여기 어디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대충 둘러보니 강을 둘러싸고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수도권에는 이와 비슷한 장소가 존재하지 않으니 적어도 시골.
심하면 외국까지 날려졌을 가능성도 있다.
정확하게 정성국의 포탈이 어느 수준의 성능과 패널티를 가졌는지 알지 못하지만, LA에 있는 물정령사 이한솔을 데리고 온 걸로 보아 사실상 거리는 제한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만약 여기가 국외라면, 사실상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저 Re write가 시작되고 나서 이렇게까지 막막한 적은 처음이에요. 처음 악마랑 맞닥뜨렸을 때보다 더 난감하네.”
“마찬가지입니다. 그놈의 정훈이 뭐라고…….”
원작의 주인공에 눈이 돌아가 상대의 함정에 홀랑 빠져 버린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나름 경계를 한다고 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심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일단 천리안으로 주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언제까지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시현은 천리안을 이용해 주변을 살폈다.
위성사진처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일대는 상당히 독특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두 사람이 위치한 장소는 여의도처럼 강 위에 형성된 섬이었다.
섬의 형태는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처럼 원형이었으며, 섬 안에는 작은 규모의 숲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아파트가 한 채 있었다.
섬 바깥에는 기괴한 형태의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나 있었으며 식물형 악마가 가득했다.
시야를 한계까지 넓히자, 우측으로 바다가 보였다.
해안선의 형태를 면밀히 살피던 시현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여긴가 어딘지 알았습니다.”
“어디요? 기왕이면 아시아 어딘가였으면 좋겠네.”
“경북 울진인 거 같습니다. 주변 지형이 조금 과하게 바뀐 것 같기는 하지만. 아포칼립스의 영향이겠죠.”
“울진이면…… 멀기는 하지만 그래도 못 돌아갈 거리는 아니네요.”
그제야 안심한 듯 민서라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만 면했다뿐이지 울진이 결코 경기도와 가까운 건 아니다.
이동수단도 없는 지금 걸어서 경기도까지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숨이 턱 막혔다.
이동수단을 구해도 막막한 건 마찬가지였다.
보나마나 도로는 버려진 차들로 막혀 있을 게 빤한데 몇 날 며칠이 걸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공간이동……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늘을 날아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네요.”
“에잇! 이러고 있을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더 걷죠! 가서 그 망할 놈의 면상에 주먹이라도 꽂아 줘야 속이 풀릴 것 같아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민서라가 씩씩하게 강을 향해 나아갔다.
현재 장소가 섬이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강을 건널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안 돼!”
배후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노인과 젊은 여성이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인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헐레벌떡 달려와 민서라를 잡아당겼다.
“젊은 아가씨, 강에 들어가면 안 돼!”
“어? 저기…… 어르신은 누구세요?”
민서라는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질문했다.
그러나 노인에게는 대화를 할 정도로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물에 들어가면 안 돼. 악마가 있단 말이야!”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구원자거든요. 마지막에 폭발하는 게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겨우 물고기 따위한테 당할 정도로 약하지는 않아요.”
어지간히도 당황했는지 당장이라도 호흡이 끊어질 듯 헉헉대는 노인을 진정시키기 위해 민서라는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러나 노인은 끝까지 민서라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천천히 다가온 젊은 여자가 조심스럽게 시현의 앞에 섰다.
“절대 물에 들어가서는 안 돼요. 저 물, 되게 깨끗해 보이지만 방사능에 오염되어 있거든요.”
“바, 방사능이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단어의 등장에 시현은 헛기침까지 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아포칼립스는 강한 지진을 동반하며, 경상북도 울진에는 원자력발전소가 몇 개나 자리하고 있다.
강력한 지진에 직격당한 원자력발전소 한두 개가 터졌다 해도 그리 이상할 건 없다.
시현은 강물에 흠뻑 젖은 옷자락을 보며 찝찝함을 감추지 못했다.
구원자는 권능 외에도 다양한 축복을 얻는다.
그중 하나가 온갖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지만, 제아무리 위대한 축복이라도 방사능까지 해결해 줄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면 여러분은 강을 건널 때 어떻게 하시나요?”
시현의 질문에 여성은 병든 미소를 지으며.
“그런 건 없어요.”
……라고 말했다.
이상한 이야기였다.
섬의 면적은 그리 넓지 않았다.
섬에 몇 명의 생존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안에서만 생존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식량을 구하든 다른 물자를 구하든, 결국 밖에 나가야만 했다.
그런데 방사능 오염수 때문에 물에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면서 강을 건널 수단은 없다니.
그러면 도대체 이 두 사람은 어떻게 이 섬에서 생존하고 있단 말인가.
“오염된 강물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거든요. 어쩌다 이 섬에 들어오시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알아 두시는 게 좋아요. 이 섬은 감옥이에요.”
“감옥?”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시현이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요구되지 않았다.
“으아아악! 나왔다, 나왔어!”
노인의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려온다.
“시현 씨! 중형 악마예요!”
민서라가 다급하게 시현을 부르짖었다.
두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시현은 어째서 여성이 이 섬을 감옥이라 표현했는지 깨달았다.
“수룡…….”
수면을 뚫고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은 거대한 용이었다.
매끄러운 비늘과 커다란 지느러미, 길쭉한 몸체를 가졌으며 늑대처럼 길고 큰 머리에는 뼈로 된 투구를 쓰고 있다.
뭍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놈이지만, 물에서 마주친다면 사실상 손 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게 낫다고 말해지는 악마이기도 하다.
문제는 수룡의 비늘이 짙은 적색이라는 것이다.
보통 수룡의 비늘은 푸른 청색이지만, 아주 가끔 비늘이 적색인 놈이 존재한다.
구원자들은 그런 수룡을 보고 이렇게 칭하고는 한다.
“하필이면 돌연변이라고?”
돌연변이는 보통의 악마보다 월등하게 강하다.
특히 기존의 악마가 가지고 있는 단점을 상쇄하는 특징을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좀비의 돌연변이인 구울은 좀비의 단점인 나약한 내구도를 보강하는 단단한 피부를 가지고 있다.
민첩하지만 체력이 약한 검은 늑대의 돌연변이는 강인한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강한 체력과 힘을 가졌지만, 멍청한 트롤의 돌연변이는 뛰어난 두뇌를 가진 두 번째 머리를 가지고 있다.
수룡의 약점은 느려터진 속도다.
그러나 돌연변이는 기존의 수배에 달하는 속도를 손에 넣었다.
[크아아아아!]
우렁차게 울부짖은 수룡은 지상으로 발을 내디뎠다.
시현은 바로 전투태세를 갖췄다.
“제아무리 중형 돌연변이라 해도 하나 정도는 일도 아닌…….”
“뭐 하고 있어요? 도망가요!”
여성은 시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덕분에 자세가 흐트러지고 말았다.
[쿠오오오!]
수룡은 시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길……!”
싸우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랬다가는 시현의 팔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여성이 희생당하고 말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시현은 여성의 뜻대로 도주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민서라도 노인의 손에 붙잡혀 불가피한 도주를 하고 있었다.
시현은 여성의 설득을 시도했다.
“죄송한데 손 좀 놔주시겠어요?”
“안 돼요. 그러면 악마한테 달려드실 거잖아요.”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제가 좀 강하거든요. 제아무리 중형에 돌연변이라 해도 한 마리 정도는 가볍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한 마리가 아니에요.”
“네?”
“저희는 섬을 둘러싸고 있는 강에 최소 20마리의 악마가 있다고 파악하고 있어요.”
“……20마리요?”
말도 안 되는 숫자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나 여성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뒤에서 물이 솟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촤악!
솟구친 물줄기와 함께 등장한 것은 놀랍게도 붉은 비늘을 가진 수룡이었다.
“또 돌연변이라고?”
엄청난 확률을 뚫고 탄생하는 돌연변이가 한 장소에 둘이라니.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 놀랄 일은 끝나지 않았다.
[크아아아아!]
조금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세 번째 수룡이 목청껏 소리를 내지르며 등장했고, 강 건너편에서 다른 놈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수룡이 얌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두 마리 전부 붉은 비늘을 갖고 있었다.
“여긴 대체 뭐야? 지옥인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에 이제는 헛웃음만 나왔다.
민서라도 눈을 최대한으로 뜬 채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수룡 무리는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빨리요!”
여성은 시현을 강하게 잡아당겼고, 시현은 마지못해 끌려갔다.
천만 다행이도 물에서는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돌연변이 수룡이지만, 육지에서만큼은 적수가 없을 정도로 느려 터졌다.
섬 안에 있는 작은 숲으로 달아난 시현은 빠르게 수룡 무리를 따돌릴 수 있었고, 추격을 포기한 수룡들은 강으로 돌아갔다.
여성은 수룡 무리를 따돌렸음에도 달리던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고, 아이고 삭신이야.”
나름 필사적으로 달리던 노인이 관절의 통증을 호소하며 주저앉고 나서야 여성은 달리던 것을 멈췄다.
“어르신, 괜찮으세요?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온몸에 안 쑤시는 곳이 없어. 거 젊은 친구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노인이 슬그머니 시현에게 눈치를 줬다.
왜소한 체구의 노인 하나 업고 가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도 아니기에 시현은 기꺼이 등을 내줬다.
그러나 여성이 노인을 저지했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고 걸으세요. 지금 이분 흠뻑 젖은 거 안 보이세요?”
“에잉…… 늙은이가 살아 봐야 얼마나 산다고.”
노인은 툴툴댔으나 여성의 말을 따랐다.
구시렁거리는 노인이 얄밉다는 듯 눈을 흘긴 여성은 어정쩡한 자세로 있는 시현에게 일어설 것을 요구했다.
“저희 마을까지 얼마 안 남았어요. 도착하면 샤워 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니까 우선 몸부터 씻도록 해요. 저도 빨리 손을 씻고 싶네요. 옷은…… 버리고 새 걸 입는 게 좋겠지만, 안 된다면 빨래라도 해야죠.”
“와아, 샤워실!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엄청 찝찝했는데.”
어지간히도 찝찝했는지 민서라는 크게 기뻐했다.
몸을 씻어 내고 싶은 건 시현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기꺼이 여성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 상태로 약 5분을 더 걸은 결과.
천리안으로 본 아파트가 나타났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것 없을 만큼 위태로운 건물인지라 아무도 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아파트 안에서 몇몇 사람들이 빠져나왔다.
아파트 주변에는 작은 규모의 판자촌도 만들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어느덧 약 5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성별도, 나이대도 각양각색이지만, 그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된 점이 있었다.
사람들은 제대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 건지 비쩍 말라 있었다.
상황이 너무 긴박해서 못 알아봤다 뿐이지 시현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여성도 뼈가 드러날 만큼 앙상했다.
“일단 환영할게요. 여기가 저희가 사는 마을이에요. 저는 일단…… 지금처럼 리더가 자리를 비우고 있을 때 마을을 관리하는 사람이에요. 이름은 방유라고요. 음…… 사실상 리더는 마을에 있는 때보다 자리를 비우고 있는 때가 더 많으니, 대부분의 일은 제가 맡아서 처리하고 있어요.”
“여기는 대체…….”
시현은 질문을 끝까지 연결하지 못했다.
참혹한 광경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다행이도 방유라는 시현이 무엇을 질문하고자 했는지를 감으로 알아차렸다.
“말했잖아요. 여기는 감옥이라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포칼립스 당시 아파트에 있던 사람들이에요. 원래부터 여기가 섬이던 건 아니었어요. 아니, 애초에 저 강은 존재하지도 않았죠. 저희가 눈을 떴을 때 저 강은 돌연 생겨나 있었어요.”
“……그렇군요.”
그녀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건지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아포칼립스 이후.
이 땅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찾아왔다.
악마가 생겨났고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던 식물들이 자라났으며 온갖 지저분하고 끔찍하며 기괴한 것들이 가득 생겨났다.
그리고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지형 자체가 변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 섬도 그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자, 두 분 다 욕실로 안내해 드릴 테니 이쪽으로…….”
말을 하던 방유라는 돌연 하늘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자신의 옆에서 아른거리는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시현 역시 자연스레 그녀를 따라 자신의 머리 위를 확인했다.
“다녀왔습니다!”
놀랍게도, 경쾌하게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드는 젊은 남성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리더다! 리더가 돌아왔다!”
“김상균! 이게 얼마만이야? 엄청 기다렸잖아!”
마을 사람들은 격하게 남성을 반겼다.
모두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마을 위를 한 바퀴 비행한 남자는 사뿐하게 대지 위로 내려왔다.
“비행의 권능?”
시현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고, 그 중얼거림을 들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