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으아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머리를 감싼 채 주저앉았다.
시원스럽게 뻗어나간 핏빛 칼날은 남자에게 닿기 바로 직전에 멈췄다.
남자는 다소 왜소한 체구에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린 인상을 가진 미남자였다.
“아이고…… 나는 그냥 인사만 했는데 칼을 들이미는 건 너무한 거 아니에요? 동네사람들! 이 사람 좀 보세요!”
마음을 뒤흔드는 미성에 잔뜩 겁을 먹은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뭔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르고 있는 듯한 죄책감이 들었다.
허겁지겁 떨어뜨린 둥근 안경을 주워 쓰거나 하는 모습이 어수룩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시현은 보이는 것에 속지 않았다.
오히려 눈매를 사납게 만들며 칼날을 한층 더 들이밀었다.
“깜짝 놀랐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겁니까?”
분명 이 일대에 사람이라고는 시현과 민서라, 두 사람뿐이었다.
천리안을 통해 살펴본 결과이므로 착각했을 리가 없다.
“은신인가? 아니, 아무리 은신이라 해도 천리안의 감시까지 뚫을 수는 없어. 그렇다는 건 전이…… 아니면 공간도약?”
“아니, 아까까지만 해도 정답을 향해 질주하시더니, 뭐가 그리 급해서 갑자기 U턴을 하시나 몰라.”
역시 겁을 먹은 듯한 모습은 연기였는지, 슬쩍 머리를 감싼 팔을 내리는 남자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자신의 목에 들이밀어져 있는 핏빛 칼날이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했다.
남자는 실실 웃으며 손으로 칼날을 잡고 슬쩍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자기소개나 하죠. 제 이름은 정성국. 23세의 구원자이자 참가자입니다. 잘난 건 외모. 특기는 축구와 족구 등 발을 쓰는 각종 스포츠!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되고 나서는 하등 쓸모없는 특기라 슬퍼요. 이상! 자, 이제 두 분 차례에요.”
“…….”
“…….”
“하하! 두 분 다 수줍음이 많으시구나. 하지만 괜찮아요. 부끄러움은 한순간이니까요. 용기를 냅시다! 기왕이면 거기 아름다우신 여성분부터 소개해 주면 참 좋을 거 같은데.”
“…….”
“…….”
“아, 혹시 제가 너무 말이 많아서 부담스러우셨나? 이번에 새로 사귄 친구한테 너는 말 좀 줄이라고 종종 듣기는 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것도 정성국이라는 인물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인 것을. 그러니까 이제 슬슬 포기하시고 자기소개 좀 해 주시죠. 아무리 저라도 조금 무안해지네.”
쉬지 않고 떠들어 대는 남자, 정성국을 보며 시현은 생각했다.
‘와, 미쳤네.’
이나연에 이어 이재현.
두 사람을 뛰어넘는 친화력을 지닌 사람은 다신 만나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진짜는 여기에 있었다.
“소개는 그쪽이 제 질문에 답을 한 이후에 하도록 하죠.”
“방금 소개 드렸잖아요. 이거 젊은 사람이 기억력이 영 별로네.”
“제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란 거 알잖아요.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실실 웃으면서 약 올리려 하면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정성국이 야금야금 밀어내던 칼날이 목덜미를 지나는 정맥의 지척까지 단번에 접근했다.
역시 폭력 앞에 장사 없다고.
시종일관 장난기 넘치던 정성국의 표정이 조금은 진지해졌다.
“그렇게까지 저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 하시면 어쩔 수 없이 말해드려야죠. 정성국. 테크노벨리 소속의 구원자이며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던 공간계열의 권능인 포탈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모인 수많은 참가자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원작의 주인공 정훈을 손에 넣은 참가자이기도 하죠.”
마치 연극을 하듯 정성국은 과장된 손짓을 섞어가며 자기소개를 마쳤다.
“…….”
“…….”
이번에도 두 사람은 침묵했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침묵의 의미가 달랐다.
이전의 침묵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강렬한 캐릭터를 가진 남자의 템포를 따라가지 못해 발생한 침묵이라면, 이번에는 경악과 당혹스러움을 꾹 눌러 참기 위한 침묵이었다.
설마 싶었는데 원작에 등장하지 않은 공간계열 권능이라니.
그 유효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아군으로 두면 유용하고, 적군으로 두면 까다로운 것으로는 시간조작 계열과 쌍벽을 이루는 권능이기 때문이다.
“제 소개는…… 사실 필요 없잖아요? 이미 다 알고 왔을 테니까.”
“와아, 눈치가 엄청나시네요. 맞아요. 사실 두 분이 호텔의 윤시현과 민서라라는 것, 참가자라는 것, 그리고 윤시현 씨가 아르하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3레벨 구원자라는 것까지. 전부 알고 왔습니다.”
“귀찮은 짓을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시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상대가 상당히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시현이 4레벨 구원자라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는 듯 했다.
즉, 정성국이 가진 정보망도 완벽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굳이 여기까지 나를 만나러 온 이유는 뭡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도움 요청일까요.”
정성국은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이쯤 되니 웃는 게 습관이 된 게 아닐까 싶었다.
“윤시현 씨가 보기에 테크노벨리의 상황은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어떻긴요. 당장 오늘 내일을 걱정해야 할 팔자지.”
“네. 정답입니다. 슬프게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퍼뜨린 소문 탓에 제 사랑과 애정이 담긴 테크노벨리는 엄청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현재 테크노벨리의 상황은 도마 위에 놓인 생선, 먹음직스러운 파이 정도로 비유할 수 있겠다.
그 파이의 주인은 정성국인데, 여기저기서 어떻게든 한 입을 먹어보겠다고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달려드는 그런 상태다.
조금만 방심하면 아차 하는 사이에 파이를 빼앗겨 버리고 말 것이다.
“사실 테크노벨리의 힘만으로는 지금의 위기를 타파할 수 없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싫지만, 정말 너∼무 싫지만, 정훈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나누는 조건으로 타 세력의 도움을 받으려 했죠. 그래서 어떤 세력의 도움을 받으면 좋을까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걸! 윤시현 씨의 퍼포먼스가 눈에 확 들어오지 뭡니까. 그러니까 윤시현 씨.”
거기까지 말한 정성국은 처음으로 얼굴에서 얍삽한 미소를 싹 지우고는 진지한 얼굴로 시현을 마주했다.
“테크노벨리를 도와주세요.”
정성국은 깊게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이 상당히 간절해 보였다.
그러나 시현은 선뜻 알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무엇이 자신에게 더 이득이 될지를 생각했다.
‘아무리 내가 4레벨 구원자라지만, 몰려드는 구원자들을 전부 막아 낼 수 있을까? 심지어 상대방 측에 3레벨 구원자가 없다는 보장도 없는데.’
일대일을 여러 번 반복하는 거라면, 상대가 얼마나 있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다수의 구원자가 동시에 달려들면 제아무리 시현이라 해도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
2레벨 구원자만 해도 그런데, 만약 3레벨 구원자가 하나라도 포함되어 있다면 승산은 대폭 낮아진다.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도 있고.’
시현의 눈은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수리를 훤하게 내놓은 채 간절하게 호소하는 정성국이 아니라, 조금 전 은밀하게 호출한 Re write의 랭킹을 보고 있는 것이다.
시현이 확인하고자 한 것은 정성국의 랭킹이다.
그가 자신의 입으로 떠벌린 업적이라면 적어도 100위 내에는 랭크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정성국의 Re write : 497위.>
놀랍게도 그냥 하위권도 아니고 최하위권이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어디서나 평범하게 볼 수 있는 권능도 아니고, 무려 공간계열 권능의 소지자다.
그뿐이랴.
전이나 도약처럼 원작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했던 권능이 아니라 대륙 간의 이동까지도 가능하리라 유추되는 포탈 권능을 소지한 참가자다.
심지어 그는 원작의 주인공 정훈을 동료로서 손에 넣었다.
계승불가 유일권능인 물정령의 구원자 이한솔까지 더하면 멤버도 상당히 호화스럽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557위라니.
아무리 이해하려 해 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숨기는 게 있다고, 그의 감이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제 생각에는 나쁘지 않은 기회라고 봐요. 일단 다른 경쟁자들보다 한 걸음 앞설 수 있으니까요.”
민서라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시현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하면 정성국의 요청을 거절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557위라는 순위가 거슬렸다.
하지만 정훈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원작의 주인공이자 한 번 이 세상을 구한 전적이 있는 엄청난 구원자다.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단순히 느낌만 가지고 놓칠 수는 없었다.
이미 소속이 있는 정훈을 영입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 쳐도 정훈이 소속되어 있는 테크노벨리와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장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상 선택지가 있지만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알겠습니다.”
“이야∼ 잘 생각하셨어요. 사실 이거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한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유쾌하게 웃은 정성국은 굉장히 자연스럽게 두 손을 내밀었다.
뭔가 싶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아차 싶었는지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사실 제 권능인 포탈을 통해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테크노벨리로 복귀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이게 제한이 좀 있어서요. 함께 이동하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접촉해야 하고, 허가가 필요하거든요. 그러니까 혹시라도 속으로 부정적인 생각은 삼가 주세요. 자, 그럼.”
정성국은 양손에 각각 시현과 민서라의 손을 붙잡았다.
“어지러울 수 있으니 눈 꼭 감아 주시고. 출발합니다.”
그가 권능을 사용했다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지그시 뜬 정성국의 눈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빛은 정성국을 감싸더니 그와 연결되어 있는 두 사람에게까지 전달되었다.
그러더니 예고도 없이 세상이 뒤틀렸다.
“윽…….”
“우와! 깜짝이야!”
눈이 보이는 모든 것이 한 데 뒤섞여 사라지는 듯한 기상천외한 감각이 온몸을 지배했다.
한순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서 색조가 사라지고 세상이 어둠에 잠겼다.
그러나 어둠은 길게 지속되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진 한 줄기 빛이 어둠을 가르더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공간이동에 성공한 것이다.
“……어?”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눈에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이었다.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
저 아래에 보이는 아름드리나무가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게 보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시현의 몸은 중력에 따라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꺄아아아!”
“으하하하!”
민서라의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정성국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윤시현을 죽이는 게 이렇게 쉬울 줄이야! 역시 나야. 역시 내가 최고라고! 하하하하!”
함께 추락하는 와중에도 광인처럼 폭소하던 정성국이 돌연 웃음을 멈췄다.
그의 눈동자는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그 빛은 시현과 민서라에게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자, 두 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쓸모없는 조연은 제 무대에서 퇴장해 주세요.”
그 말과 함께 정성국은 모습을 감췄고,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자유낙하를 즐기던 시현은 짧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속았네.”
아주 제대로 속았다.
정훈이고 뭐고 그 자리에서 때려눕혔어야 했는데, 후회도 해 봤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시현은 침착하게 상황을 살폈다.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하기보다는 당장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아무리 4레벨 구원자라 해도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외피고 뭐고 죽는다.
다행이도 물이 흐르는 커다란 강이 보였다.
“민서라 씨.”
“흐아아앙! 이렇게 죽는구나. 아직 하고 싶은 일이 산더미같이 많은데!”
이미 민서라는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러는 순간에도 지상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설명할 시간조차 아까웠기에 시현은 민서라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비어 있는 손을 정면으로 뻗었다.
“폭풍.”
그야말로 태풍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바람이 쏘아졌다.
딛고 있는 땅이 없기에 두 사람의 몸은 폭풍의 반동에 속절없이 밀려났다.
그 덕에 낙하 지점이 변동되었다.
본래라면 딱딱한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피떡이 될 운명이었지만, 폭풍 덕분에 두 사람은 물 위에 떨어졌다.
퍼억!
수면과의 충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났다.
불가피하게 등부터 떨어졌지만, 시현의 외피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해 내고는 깨져 버렸다.
온몸이 물에 잠기고, 온몸을 통해 느껴지는 차가운 물의 감촉이 아직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시현은 눈을 뜨고 수면으로 올라가려 했다.
콰직.
무언가가 시현의 발목을 물었다.
‘크윽……!’
통증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숨을 토해 내고 말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아래를 바라보니 대형견만 한 크기의 물고기가 시현의 다리를 깨물고 있었다.
마치 비단잉어처럼 화려한 무늬를 가진 놈이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다리로 파고들며 대량의 피가 흘러나왔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으나 물은 상당히 깊었고, 해가 쨍쨍하게 떠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면 아래는 심해라도 되는 것처럼 굉장히 어두웠다.
시현은 핏빛 칼날을 이용해 물고기를 찔렀다.
크게 몸부림치던 물고기는 이내 숨이 끊어진 듯 축 늘어졌다.
이걸로 끝이라 생각한 시현은 물고기를 떨쳐내는 시간조차 아까워 바로 수면 위로 올라가려 했다.
‘……!’
크게 당황한 민서라가 다급하게 아래쪽을 가리켰다.
뭔가 싶어 아래를 바라본 시현은 사색이 되었다.
숨이 끊어졌음에도 시현의 다리를 물고 놓아주지 않는 물고기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소형 악마의 자폭쯤이야 웃으며 무시했겠지만, 외피가 없는 지금은 다르다.
제아무리 축복을 통해 강화되었다 한들 결국은 인간의 육체.
견딜 수 있는 충격에는 한계가 있다.
다급히 물고기를 떼어낸 시현은 온 힘을 다해 물고기를 내던졌다.
그러나 물의 저항이 강한데다가 물고기의 몸이 가벼워 생각보다 멀리 나가지 않았다.
폭발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이상, 절체절명인 건 여전하다.
그 순간, 민서라와 눈이 마주쳤다.
말하지 않아도 표정을 통해 민서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시현은 수면 위로 빠르게 헤엄쳤고, 반대로 민서라는 물고기를 손에 잡은 채 아래로 헤엄쳤다.
“푸하!”
가까스로 수면 위로 올라온 시현은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그 직후.
퍼엉!
굉음과 함께 물줄기가 높이 솟구쳐 올랐다.
60억 로또 당첨자는 돌아가고 싶다